2017년 12월 12일 화요일

그 겨울 20년 뒤, ‘밥.꽃.양’ / 권영숙 노동사회학자

1998년 민주노총이 합법화되었다. 조직 노동이 자신들의 체제 편입을 환호하고 있을 바로 그 순간에, 진정한 재난이 시작되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조건하에서 노동시장에 대한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첫 시험대가 현대자동차였다. 누군가는 ‘짤려야만’ 했다. 그리고 선택된 것이 가장 ‘덜 정규직스러웠던’ 현대차 구내 식당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당시의 사건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영화 <밥.꽃.양>은 정리해고법이 어떻게 노동현장에서 폭풍을 몰고 왔는지, 그리고 노동자들 내부에서 자신들이 살자고 다른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것을 어떻게 묵인 방조했는지를 보여준다.
‘밥꽃양’이 쫓겨난 빈자리는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그 부메랑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여지없이 다시 돌아왔다. 처음에는 식당 여성 노동자들이었지만, 그 다음은 ‘공장 생산 라인’ 밖의 남성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몰렸고, 그 다음에는 생산직 남성 노동자들이, 그 다음에는 사무 판매직이 차례로 제단에 올려졌다. IMF 외환위기는 끝났고, 정권의 이름은 DJ,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로 바뀌었지만, 이 ‘법’과 ‘기조’는 바뀌지 않았으며, 오히려 강화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 초에 이미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으로 채워졌다. 
집권 이후 문재인 정부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서 공공부문 정규직화를 핵심 정책 과제로 들고나왔다. 그러나 그 첫번째 대상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인천공항공사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고 나섰고, 전교조도 기간제 교사들의 정규직화 반대를 선언했다. 창원의 한국지엠 공장은 일거리가 줄어들자 비정규직을 해고하고 그 자리를 기존 정규직으로 채우는 ‘인소싱’을 노조가 합의하고 나섰다. 
왜 그럴까? 노동자들이 자기 밥그릇에만 목을 매는 이기주의자들이라서? 20여년 전의 밥꽃양이 그랬듯이, 부분적으로는 그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노동을 보호해주지 않았는데, 그들이 개인들의 생존을 위해 ‘덜 규범적’으로, 즉 이기적으로 행동했다고 해서 비난할 수 있을 만큼 떳떳한 명분을 가진 주체가 이 사회에 과연 존재할까?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밥꽃양을 불러온 정리해고법은 여전히 개정되지 않았다. 또한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은 단지 공공기관에만 국한된 것이다. 게다가 이것마저도 기획재정부가 ‘임금총액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비정규직이 정규직화되면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자리’뿐만이 아니라, 임금을 둘러싸고 분열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업장에 주어지는 임금 총액은 한도가 있는데 동일 임금을 받는 정규직 노동자 숫자가 늘어나면 기존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인상률이 억압되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는 나중에는 결국 세금 부담을 둘러싼 노동자 내부의 분열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의 사태는 20여년 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노동은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면, 또 다른 밥꽃양들을 양산해낼 것이며, 서로에게 총질을 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할 것이고, 지금 살아남은 자들도 이내 총알받이가 될 것이다. 또한 단지 정부의 지침이나 정책이 아니라 법 제도 판례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즉 노동시장의 프레임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한다면, 그나마의 정규직화조차도 정권이 바뀌는 순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한국의 노동에는 20년 전의 IMF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영화 <밥.꽃.양>의 삽입곡인 박창근의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내게 목을 죄는 쇠사슬을 준다면/ 나는 순순히 응하지 않을 거야, 물어 볼 거야/ 난 물어보고 싶어, 함께 살아가는 이유를.”
사회를 구성한다는 것은 ‘공존’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쇠사슬을 끊어라. 공존은 노예이기 거부하는 자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112044005&code=990100#csidx00e48a59ba45a83825a1012292b73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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