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두기로 했어요.” 서른여섯살에 늦깎이 한의사가 된 박현준씨(41·사진)가 지난 13일 밤 전화기 너머에서 한 말은 짧고 떨렸다. 한 달 전 첫 인터뷰 때부터 비장함이 보였지만, 그사이 그의 결심은 더 확고해졌다. 의료인의 꿈을 접은 청년 한의사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면 안되죠. ‘사무장병원’의 먹이사슬 구조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의사면허를 포기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꿈을 실현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이제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죠. 더 이상 못하겠어요. 제 생각은 굳어졌습니다.”
그는 서울의 한 사립대학을 졸업하고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 의료인이 되려고 2005년 우석대 한의예과에 입학했다. 2013년 한의사 면허를 취득한 그는 5년간 병원 5군데를 옮겨 다녔다. 불행히도 그가 정식 채용돼 근무한 병원들은 의사·한의사가 아닌 사무장이 투자 수익을 노리고 설립한 일명 ‘사무장병원’이거나 그 의심이 짙은 병원이었다. 중간중간 병원을 옮기기 위해 면접을 본 병원까지 합치면 그가 경험한 사무장병원은 10곳도 넘었다.
“5년간 제가 거쳐온 병원들은 임시직으로 일한 두 군데만 빼고 모두 사무장이 투자수익을 위해 불법적으로 설립한 병원이었습니다. 처음엔 ‘참 운이 없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저 혼자만이 아니었어요.”
박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한의사 인터넷 카페 회원 4500명 중 80~90%는 사무장병원에 고용됐거나 사무장병원 설립을 제안받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그는 “병원이란 곳에 누군가는 투자를 하고, 의료인들이 투자자에게 종속되는 순간 결과는 뻔하다”고 말했다. 졸업 후 가장 흔하게 접한 불법 의료행위는 과잉진료이거나 ‘가짜환자’였다고 했다. “차트에 제 사인을 미리 받아간 다음 덧칠하거나 아예 환자에게 부당청구를 강요합니다. 의사면허로 보험사기를 하라는 거죠. 의학적 근거가 없는 고가 진료들을 의사 권위를 빌려 선전하기도 하고요.”
그는 사무장병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직접 병원을 차려야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라고 했다. “저처럼 집안이 넉넉지 못한 사람이 의대를 졸업하려면 6년간 1억2000만원 정도 빚을 져야 합니다. 한의원을 개원하려면 최소한 3억~5억원이 들고요. 최소한 6개월에서 1년은 적자를 감수해야 하는데, 한의대를 갓 졸업하고 누가 그런 경영위험을 무릅쓰려고 하겠어요. 그때 사무장병원 설립 제안이 들어오면 솔깃해지는 거죠.” 박씨가 처음 사무장병원 제의를 받은 것도 2013년 말 첫 근무지였던 경기 화성의 한 요양병원에서 한방과장으로 일할 때였다
그는 “병원 이사장 부인이 ‘식당 위에 한 층을 증축해 한방전문 병실을 만들려고 하는데 투자하라’고 했다”며 “급여 외 배당금은 이사장 동생의 건축회사를 통해서 주겠다는 조건이었다”고 했다. 그는 “한의대를 졸업한 지 1년도 안돼 사무장병원 제안을 받으니 몹시 당혹스러웠다”며 “당시에는 ‘이 병원만 아니면 다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순진했다”고 말했다.
2014년 들어간 경기 남양주의 요양병원에서는 더 극악한 사무장병원을 경험하게 됐다. “면접을 보는데 병원장 대신 행정원장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 앞 카페에서 보자고 하는 거예요. 계약서도 행정원장이 병원장 도장을 갖고 와 작성하고, 병원장은 계약이 끝난 다음에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한방과장으로 근무한 병원에서는 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요양병원에 들어가서 하루에 11시간씩 환자 60여명을 진료했어요. 정말 잠깐 의자에 앉아 볼 사이도 없었죠. 그런데 주변에서 내가 열심히 일할수록 병원장이 불안할 거라고 해서 이상했죠.” 그는 그 이유를 나중에 알 수 있었다. 행정원장이 병원의 주인이고 마음만 먹으면 병원장을 젊고 돈 많이 벌어다 줄 것 같은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어 나이 든 병원장이 불안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얼마 안돼 행정원장으로부터 ‘이 병원을 박 선생 명의로 돌리고 같이 손잡고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그럴 거면 차라리 내가 이 병원을 인수하겠다’고 하니까 행정원장이 ‘70억원짜리 요양병원 부지가 있는데 내가 경영고문을 해줄 테니 같이 병원을 설립해보자’는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고 했다. 그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당시 내 병원을 갖고 싶은 욕심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며 “생각해 보면 사무장(행정원장)은 운영하던 병원 외에 또 다른 사무장병원에서 돈을 벌어줄 기계를 찾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사무장병원 제안을 거절한 후 박씨는 병원 내에서 온갖 핍박에 시달렸다. 특히 간호조무사인 행정원장 부인은 ‘병원 이사’ 직함을 달고 한의사인 박씨에게 침구시술 오더까지 내리며 자존심을 자극했다. 그는 “자신들의 정체가 들통나자 온갖 모욕을 줘서 나를 쫓아내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고 했다.
박씨는 이때부터 사무장이 ‘행정원장’이란 이름으로 병원을 운영하면서 온갖 불법 의료행위를 자행한 증거들을 수집했다. 박씨는 병원을 나오기 두 달 전인 2014년 10월 국민권익위에 신고했고 행정원장은 구속됐다. 이후 그는 2015년 2월 수원의 한 한의원에 들어갔다. 남양주에서 가급적 먼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해 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원의 한의원은 모 대학 체육교수가 제자들을 의료생활협동조합(의료생협)에 가입시켜 돈벌이하려는 또 다른 형태의 사무장병원이었다. 그는 ‘이러다가 사무장병원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고 했다.
“취업 알선 사이트에 등록해 놓으면 여기저기서 사무장병원을 개설하자는 전화가 옵니다. 한의원급은 월 1000만~1500만원, 한방병원은 1500만~2000만원 선이었죠. 보통 고용 한의사 월급이 세후 500만원 정도니까 큰 돈이죠. 부산의 한 요양병원에서는 최대 3000만원까지 제안받아 봤어요. 헤드헌터한테도 전화가 와요. 아주 당당하게 사무장병원을 해보자고 합니다. 암시장이 두껍게 형성돼 있는 거죠.”
‘이대로 안되겠다’ 싶어 그는 면접을 볼 때마다 녹취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2015년 7~8월 인천에서 5대째 사무장병원의 ‘바지 원장’을 물색하던 ㄱ한의원과 ‘사이비 의술’로 제주에서 돈을 번 약사 남매가 인덕원 근처에 분점을 내려고 시도하는 것을 고발하게 됐다.
“인천의 사무장병원은 면접을 보는데 환자들이 사무장을 사장님이라고 불렀어요. 한의사는 어떤 진단을 하든 처방은 소화제와 보약 단 2가지만 하도록 했어요. 약은 사무장이 따로 팔면서 병원 수익을 빼가는 구조였죠. 약사 남매가 운영하는 제주의 사무장병원은 남동생이 면접을 보는데 ‘누나가 신기가 있어서 병점(病占)을 잘 본다’고 해요. 한의사는 약사인 누나가 사이비 의술로 돈을 벌 수 있게 협진을 하는 것처럼 연출하는 거였죠.”
박씨가 경험한 사무장병원은 그 형태도 다양했다. 2015년 9월 들어간 한의원은 서울 대치동에 있었는데 의료생협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좀 다를 줄 알았다. 마찬가지였다. 의료생협 이사장이 노인들을 상대로 ‘한의원에서 진료받은 실적에 따라 오빠가 하는 김치공장에 취업시켜주겠다’며 과잉진료를 유도했다. 그는 “하루에 120~200명의 노인들이 월 120만원을 받는 김치공장 취업을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다 서로 욕하고 싸우는데 무슨 진료가 되겠느냐”며 당시 끔찍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부천의 한 의료생협에서 운영하는 한방병원은 초진 후 환자별 ‘일일물리치료 현황표’를 공란으로 비워두게 하고 진료차트는 ‘상동(上同)’으로만 기재하도록 강요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병원이 시키는 대로 했으나 나중에 우연히 퇴원한 환자의 차트를 보고 그것이 허위 급여 청구를 위한 꼼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뒤로 진료차트에 시행하지 않은 치료는 ‘○○○ 제외’라고 기재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병원 측은 화이트로 기재사항을 지우고 해당 시술이 이뤄진 것처럼 차트를 조작했다. 병원 대표는 사석에서 술을 마시다 “박 선생도 2000만원 투자하면 월 100만원씩 배당을 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의료생협은 허울일 뿐 온갖 보험사기를 통해 투자금에 따라 병원 수익을 나눠먹는 불법적인 영리법인일 뿐이었다.
박씨는 쉽게 타협하지 않았다. 사무장병원으로 판단되는 순간 증거를 수집하고 국민권익위나 수사기관에 고발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업계에서 자신이 ‘기피인물’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구직 사이트에 이력을 올려도 연락이 잘 오지 않았다. 2016년 10월 의정부의 한 의료재단에서 운영하는 요양병원에서는 채용 10일 만에 갑작스럽게 해고통보를 받았다. 재단 이사장이 ‘일 잘한다’고 칭찬하고 사이가 좋아 해고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해고사유를 알려주지도 않았고 이사장과의 면담도 거부된 채 무조건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블랙리스트’ 한의사가 됐다는 사실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결국 그는 지난달 초 어렵게 들어간 요양병원에서 한 달 정도 일하는 것을 끝으로 한의사 일을 놓았다. “환자를 제대로 보려면 현재 상태를 묻고 얘기한 것을 기록하고 혈자리를 판단하고 치료계획을 세워야 해요. 이런 걸 다 하려면 한 사람당 20분 정도 걸리죠. 1시간에 3~4명 정도 환자만 볼 수 있어도 ‘아, 내가 의료행위를 했구나’ 하는 뿌듯함을 가질 수 있죠. 하지만 사무장이 장악하는 병원에서는 불가능해요. 최소한 70명 정도는 진료해야 돼요. 물론 환자 얘기는 듣는 둥 마는 둥 어제 놓은 자리에 침 예닐곱 개 꼽고 이동하면 환자 1명당 1분이면 끝나요. 하지만 그건 의료인으로 할 짓이 아니죠.”
그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오면서 사무장병원이 똬리를 틀기 쉬운 의료생협과 요양병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며 “의료업계는 이미 영리화 길을 걸을 토대가 마련돼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뭘 하면서 생활을 유지하느냐’는 질문에 요양병원 야간당직 의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전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최우선 계약조건이 진료는 안 하고 사망진단서만 발부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의사를 그만두기에 앞서 진료만 안 하는 것인데도 세상 살 것 같다”며 “배운 게 아깝고 ‘사’자가 주는 사회적 안정감 때문에 그만두지 못할 뿐이지 솔직히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이 좋아서 하는 한의사가 몇 명이나 될지 묻게 된다”고 했다. 그는 새벽 1시 요양병원에서 심야 당직 중 3시간 가까운 통화를 끝내면서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나는 앞으로 뭘 해도 다른 걸 할 겁니다. 제 마음대로 사는 거죠. 어떻게 보면 정직한 것이고 어떻게 보면 바보인 거죠.”
■사무장병원
■사무장병원
사무장이 투자 수익을 목적으로 의사와 한의사를 고용하거나 이들의 면허를 빌려 운영하는 병원. 의료법상 개인은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가 아니면 의료기관을 설립할 수 없다. 사무장은 의사나 한의사 명의로 병원을 개설한 후 원무부장이나 행정원장이라는 직함으로 병원 운영 및 수익 분배에 간여하는 게 일반적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180600075&code=940100#csidxf220bc42c04496385a78d71c4e6f6d6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