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척추동물이 목과 입으로 소리를 내지만, 입술 닿는 소리, 즉 순음(脣音)을 낼 수 있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한글로 ㅁ ㅂ ㅍ 계열에 해당한다. 우리는 아기가 이 발음을 한 뒤에야 비로소 말을 한다고 하며, 그 전까지 내는 소리는 따로 옹알이라고 한다. 언어는 달라도 아기가 처음으로 내뱉는 말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맘마다. 엄마이기도 하고 젖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말에서는 원초적 중요성을 담은 단어들 다수가 순음으로 시작한다. 엄마 다음이 아빠인데, 이는 맘마 다음이 밥인 것과 공교로울 정도로 유사하다. 말, 물, 불, 빛, 바람, 밭, 먹다, 보다, 만지다, 묻다, 배우다, 만들다 등은 인간으로 생존하며 성장하는 데에 꼭 필요한 요소와 행위들이다. 인간을 이루는 양대 구성 요소도 몸과 마음이다.
우리 옛 선조들이 몸과 마음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 때 어떤 것을 먼저 만들었는지, 본래 하나였다가 나중에 둘로 나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뿐 아니라 인류 전체가 문명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몸보다 마음을 중시했다는 점만은 단언할 수 있다. 몸이 머리 팔 다리 손 발 내장 등으로 이루어진 총체이듯, 마음은 신념 의지 소망 이상 판단 감정 취향 기호 등으로 구성된 총체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는 말에서 마음은 앞의 어느 단어로 바꿔도 된다. 종교의 언어에서는 마음이 곧 정신이자 영혼이다.
옛사람들에게 몸은 아무리 정성 들여 꾸며도 결국 늙고 병들어 추해졌다가 소멸하는 유한한 것이었으나, 마음은 가꿀수록 성숙하고 아름다워져 몸이 죽은 뒤에도 후세에 전해지거나 영생할 수 있는 무한한 것이었다. 마음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은 몸뿐이었지만, 옛사람들은 이를 오히려 허물(虛物)이라 부르면서 죄악이 깃드는 곳으로 인식했다. 마음을 가꾸기 위해 제 몸에 고통을 가하는 수행법은 어느 종교에나 있었다. 인간의 본질과 개성은 그의 마음에 있는 것이었지 몸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세 사회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믿음도 무너져갔다. 제 몸 밖의 신과 연결되어 있던 마음이 자립했으며, 더불어 몸도 마음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간함으로써 ‘하늘은 없다’고 선포했을 때부터, 같은 해 베살리우스가 <인체 구조에 관하여>를 발표하여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는 사실을 밝혔을 때부터, 마음이 의지하던 곳과 깃들던 곳에 대한 일반적 신념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괴테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은 인간의 영혼이 복귀할 천상의 낙원을 없애버린 일이었다. 더불어 거룩함이나 죄 없는 세상에 대한 희망도 사라졌다. 같은 방식으로 말하자면, 베살리우스의 발견은 신을 인간의 몸 안에 가둔 일이었다. nerve를 ‘신이 다니는 길’이라는 뜻의 신경(神經)으로 번역한 것만 보아도, 한자 문화권 사람들이 이 인체 기관에서 느꼈던 당혹감을 이해할 수 있다.
산업혁명은 물질 생산의 속도뿐 아니라 몸의 해방 속도도 비약적으로 높였다. 값싼 유리거울이 보급됨으로써 사람들은 비로소 제 몸과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섬유 생산이 급증하고 인간 사이의 교류가 범지구적으로 확산된 덕에, 민족과 신분 등 집체성을 표현하던 의복이 개성을 드러내는 물건으로 위치를 옮겼다. 청결과 위생, 운동이 개개인의 건강과 수명 연장에 도움이 된다는 담론이 확산되고 사실로 입증됨으로써, 제 몸을 다듬고 가꾸고 꾸미는 모든 일들이 미덕의 지위를 얻었다. 게다가 개개인의 건강한 몸을 국력의 원천으로 보는 국민국가 이데올로기는, ‘몸 가꾸기’를 국민적 의무로까지 승화시켰다.
압축 성장을 경험한 우리의 경우, 몸과 마음의 관계 변화 속도도 그만큼 빨랐다. 우리나라에서 몸을 독립된 육성 단위로 인정한 최초의 공식적 선언은 1894년의 ‘교육입국조서’였다. 지육(智育) 덕육(德育)과 더불어 체육(體育)을 교육의 3대 목표로 정한 것인데, 그 전까지 ‘몸을 다듬는다’는 뜻의 수신(修身)은 마음을 바로잡는 정심(正心)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물론 중세의 힘 또는 전통의 힘은 일순간에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몸을 절대화하려는 욕망이 봇물 터지듯 분출하기 시작한 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절대적 결핍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끼던 때부터였다. 인문학의 위기가 본격 거론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로부터 반세기,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자기 본질과 개성이 마음이 아니라 몸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책보다 거울을 훨씬 더 자주 보며, 여가 시간 거의 전부를 제 몸을 가꾸고 다듬는 데 쏟아붓는다. 심지어는 의술을 이용하여 타고난 용모까지 바꾼다. 몸을 중시하는 것이야 현대 세계의 일반적 현상이지만, 인구비례로 본 이발소 미용실 목욕탕 찜질방 헬스장 운동기구 성형외과의원 등 몸을 씻고 가꾸고 다듬고 바꾸는 시설과 업체의 숫자는 우리나라가 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반면 1인당 독서량은 OECD 최저 수준이다.
마음을 신에게 속박시키고 몸을 마음에 종속시켰던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도 가꾸지 않으면 병들고 더러워진다.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제 몸에 쏟아붓는 열정의 10분의 1만이라도 제 마음을 살피는 데 써야 하지 않을까? 거울 보는 횟수만큼만 책장을 넘기는 건 어떨까? 아무리 몸이 우위인 시대라도 선(善)은 마음에 깃드는 법이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은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려면, 각자가 제 마음을 더 선하게 가꾸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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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182031005&code=990100#csidx0f470e7b2a19674b3461418571db1c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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