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겸손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세종 10년(1428년) 진주 사람 김화라는 이가 제 아버지를 살해했다. 왕은 통탄했다. “모두가 나의 잘못이다.” 군왕으로서 만백성의 모범이 되고 성인의 도를 잘 따르도록 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괴감이었다. 아버지 태종의 패륜도 생각났을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역대 충신과 효자를 가려뽑아 그 행실을 책으로 편찬토록 했다.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해 그림도 곁들여 편집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6년 뒤 발간된 것이 <삼강행실도>였다. 그러나 패륜 사건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종은 이렇게 한탄했다. “그림을 붙였으나, 백성이 글을 모르니 가르쳐주기 전에야 어떻게 그 뜻을 알 수 있을까.” 그 후 왕은 칩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9년 뒤(1443년 12월), 왕은 듣도 보도 못한 글자 28자를 불쑥 제시했다. 왕조실록은 그날 이렇게 기록했다. “글자는 간단하고 쉽다. 그러나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렀다.” 편전의 일까지 사사건건 기록하던 사관도 이전까지 글자에 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만큼 작업은 은밀하게 진행됐다. 왕은 정음청을 두어 정인지·신숙주·성삼문·이개 등으로 하여금 글자를 다듬고 창제 원리와 해례, 용례를 정리하도록 했다. 사대부와 유생들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1444년 2월, 부제학 최만리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왜 사대에 거스르며, 엉뚱한 일로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려 하느냐는 것이었다. 정창손·하위지·김문 등 집현전의 주력 학사들이 그와 함께했다.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들어가 비난을 사게 된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다 하겠습니까. … 새 글자를 따로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니 어찌 문명의 큰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 왕의 멱살을 움켜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국 운운한 것은 폐위 위협이었다.
당시 문자는 역법·지리·도량형 등과 함께 중국이 주변 나라들을 통치하는 기반이었다. 이 나라들은 비록 말은 달랐지만 문자와 역법은 중국을 따랐다. 천자에 대한 복속의 표시였다. 그런데 문자와 역법을 독립하겠다고? 그건 천자와 중화에 맞서겠다는 뜻이었다. 사대론자에게 이보다 더 큰 불충이 어디 있을까. 정창손이 일찍이 제기했다.
세종은 새 글자로 <삼강행실도> 언해본을 편찬하도록 정창손에게 지시했다.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정창손은 이렇게 되받았다. “그럴 리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는데,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맞짱 뜨자는 투였다. 그러나 인간의 자질은 교육으로 바뀌고 향상될 수 있다는 유학의 근본 가르침을 부인하는 실수를 정창손은 저질렀다.
“지금 쓰는 이두도 본뜻이 백성을 편하게 하려 함이다. 그러나 이두도 한자에서 따온 것이어서 백성이 알기 힘들다. 내가 만든 문자도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설총은 옳다 하고, 너희들이 섬긴다는 임금은 그르다 하는가. 너희가 운서를 아는가,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는지 아는가.”
왕은 최만리와 그에 동조하는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등을 불렀다.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백성이 글자를 알아야 송사에서 억울함을 줄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왕의 설명에 “그건 관리의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이지 백성이 글자를 알고 모름과 무관하”다고 맞받았다. 왕은 더 단호했다. “지금 쓰는 이두도 본뜻이 백성을 편하게 하려 함이다. 그러나 이두도 한자에서 따온 것이어서 백성이 알기 힘들다. 내가 만든 문자도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설총은 옳다 하고, 너희들이 섬긴다는 임금은 그르다 하는가. 너희가 운서를 아는가,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는지 아는가.” 정창손의 언설을 거론한 뒤 “진실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들”이라며 의금부에 하옥시켜 버렸다.
문자 창제는 왕위는 물론이고 생명까지 건 사업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28자를 처음 알리고 2년10개월 뒤(1446년 9월 상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을 반포한다. “…백성이 말하고자 할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알리지 못하니, 이를 위하여 가엽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매일 써서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그렇게 탄생한 한글은, 문자 창제의 배경과 원리 그리고 철학이 분명한 유일한 문자, 가장 과학적인 표기체계(언어학자 라이샤워 교수), 세상에서 가장 익히기 쉬운 문자(소설가 펄 벅)였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1997년 문맹퇴치에 기여한 이에게 주는 상을 ‘세종대왕상’이라 이름했다. 표현력은 특히 독보적이어서 자연계의 소리를 거의 모두 표시할 수 있어(8800여개), 일본어(300개)나 중국어(400여개)와는 비교도 안 된다. 영어로는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 어려움이 많지만, 한글로는 영어 발음의 90% 이상을 표기할 수 있다. 게다가 표음문자에 모아쓰기 형태여서 디지털 시대에 정보 전달의 총아다.
여주 영릉, 조카(단종)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정권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새로 조성한 부왕 세종과 어머니 소헌왕후의 유택. 모란반개형이니 비룡포란형이니 하는 풍수의 설명이 아니어도 땅은 온화하고, 기운은 드높고, 풍광은 단정하다. 남한강은 여전히 넉넉했고, 드넓은 숲은 그 짙은 그늘로 말미암아 더욱 푸르다. 공기마저 향기롭다. 그 기운과 향취에 취한 채 민족사 최고의 명장면을 즐기고 있을 때 누군가의 개탄이 콧잔등을 때린다. 언어학자 유재원 교수(외국어대)다.
“도자기에 비교하면 한글은 고려청자와 같고, 일본의 가타카나나 중국의 한자는 종이접시에 불과한데, 청자엔 줘도 안 먹을 음식이나 담겨 있고 종이접시엔 산해진미가 담겨 있다면, 손님들이 어떤 접시를 집어들까?”
“한글의 과학성, 편리성 그리고 위민정신, 그거 아무리 자랑한들 뭐하는가. 가꾸기는커녕 쓰기도 귀찮아하면서…, 100년 뒤 한글이 살아남기나 할는지.” 23년 만에 한글날을 공휴일로 부활시킨 것도 유 교수에겐 빛 좋은 개살구다. “도자기에 비교하면 한글은 고려청자와 같고, 일본의 가타카나나 중국의 한자는 종이접시에 불과한데, 청자엔 줘도 안 먹을 음식이나 담겨 있고 종이접시엔 산해진미가 담겨 있다면, 손님들이 어떤 접시를 집어들까?”
세종은 고심참담 끝에 최고의 문자 한글을 창제했지만, 사대부나 학자들은 한자로만 학문을 했고 시를 남겼다. 지금도 가진 자, 배운 자들은 영어를 한자처럼 숭상하고, 학문도 영어로 하도록 한다. 그러다 보니 한글로 된 세계적 저작은 드물다. 굳이 한글을 배울 이유가 없다. 김정희·한석봉 등 중국을 능가하는 서예가가 많았다. 하지만 모두 한자만을 쓴 까닭에 한자 서체만 풍부하게 했다. 한글 캘리그래피는 이제야 조명을 받고 있다. 일본과 중국? 그들은 그 누추한 문자로 많은 세계적인 학문 저작과 문학 작품을 남겼다. 그들 문자는 이제 중요한 디자인 요소가 되기도 했다.
강영환 시인은 어느 날 일제 때 규슈 탄광으로 끌려간 동포들이 수용소 숙소 담벼락에 써놓은 글을 보았다. ‘고향에 가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 그 핏빛 선연한 모국어의 절규 앞에서 그는 한탄했다. “…내가 수없이 뱉어내는 말들이/ 그들의 절실한 말에 비하면 아무 소용 없는 것/ 서투른 붓끝으로 밝히는 내 가슴은/ 아직 모국어의 깊은 맛에 닿지 못하고/ 껍질만 벗기고 있는 것인지.”(시 ‘모국어’) 징용노동자들에게 모국어는 그 지독한 고통과 슬픔과 염원을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고향이요 조국이요 어머니였다. 그런데 시인이라는 사람이….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한글날만 되면 식자들이 한번씩 읊조리는 경구다. “모국어를 잃은 민족에게 귀 기울일 사람은 없다.”
왕비를 지극히 사랑했던 세종. 체통을 염려했을 법도 한데 그는 조선 왕으로는 처음으로 왕비와 함께 한 봉분 아래 누웠다. 훈민정음 반포 6개월 전 소헌왕후가 세상을 뜨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둘째 아들(수양대군)로 하여금 석가의 일생을 쓰게 하고, 김수온으로 하여금 증보케 하고, 이를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것이 <석보상절> 언해본이다. 목숨 걸고 창제한 백성의 문자로, 죽어서도 함께하려 했던 사람을 위해 편찬한 책이었으니, 그 애틋함이 절절하다. 그 길을 따를 순 없다. 하지만 이 정도의 꿈은 꿔야겠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김현승 ‘가을의 기도’)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0625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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