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이세영 기자는 2010년 2월 2일 서울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시민인문학 방향성 모색' 심포지엄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 동안 한국에서 전개된 '희망의 인문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자리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김진해 경희대 교수는 시민 인문학 교육의 궁극적 목표가 모호하다는 점을 꼬집었다"고 한다. 또한 유흔우 동국대 교수는 "인문학은 '정치행위를 위한 준비'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험’한 사람들로 변화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을 갖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현재 전개되는 '희망의 인문학'이 사람들을 '위험'한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이에 대해 수유+너머의 고병권 박사는 “인문학이 새로운 삶을 생산하는 ‘생산재’라기보다, 현재의 삶을 소비하는 ‘소비재’라는 느낌을 줄 때가 많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고병권 박사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인문학이, 그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것보다 훨씬 큰 수확을 인문학자들 자신에게 안겨다준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며, 시이오 인문학에 대해서도 “앎을 폐쇄할 이유가 없다”며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한다.
‘낮은곳으로 임한 인문학’ 약자들의 희망될까 ‘시민인문학 방향성 모색’ 심포지엄
백화점 교양강좌와 큰 차이 없어
약자들간의 공감·연대에 목표 둬야
“지식인 우월적 태도 경계” 지적도
» 한국 사회의 양극단에 위치한 집단들이 인문학 강좌를 듣는다. 한쪽에 돈 많고 힘 있는 경영자와 고위공무원들이 있다면 다른 한쪽엔 재소자·노숙자 등 돈 없고 비천한 약자들이 있다. 과연 인문학은 이들 모두의 삶에 구원의 빛을 비춰줄 수 있을까. 사진은 2007년 경기도의 한 교정기관에서 재소자들을 상대로 진행됐던 철학강좌의 수업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안에서는 ‘죽겠다’ 아우성인데, 밖은 ‘지금만 같아라’며 환호작약이다. 조찬모임 인문학, 문화센터 인문학, 카페 인문학, 동사무소 인문학…. ‘인문학의 위기’란 말을 무색하게 하는 ‘대학 밖 인문학’의 열기는 더 이상 새삼스런 얘깃거리가 못 된다. 이 예기찮은 ‘호황’에 대해선 아직까지 긍정적 반응이 우세한데, 물질만능의 척박한 삶을 뒤돌아보게 하고 고사 직전의 ‘대학 인문학’에도 숨통을 터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다.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열기를 냉소하거나 정치적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들도 들려오기 시작한다. 저급한 경영논리를 문화적으로 분식하거나, ‘고급 교양’에 대한 중산층의 욕망에 영합하는 ‘지식 장사’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극복과 성찰의 노력이 호텔 인문학, 백화점 인문학 같은 ‘유한계층 인문학’을 넘어 ‘약자들의 인문학’을 표방하는 ‘시민 인문학’ 영역에서도 관찰된다는 점이다.
2일 서울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경희대·동국대·서울시립대·성공회대 연합 심포지엄은 이들 대학이 지난 2년간 서울시의 위탁을 받아 노숙인과 저소득 시민을 상대로 실시한 희망의 인문학 과정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약자를 위한 인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희망의 인문학은 1995년 미국의 작가 얼 쇼리스가 노숙인·마약중독자·재소자 등 사회의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자존감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진행한 ‘클레멘트 코스’를 모델로 삼은, 시민 인문학 프로그램의 일종이다.
이 자리에서 김진해 경희대 교수는 시민 인문학 교육의 궁극적 목표가 모호하다는 점을 꼬집었다. 일반 평생교육이나 백화점 교양강좌,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인문학 과정과 명확한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김 교수는 ‘성찰적 자아의 발견’이라는 인문학의 보편 과제와 ‘약자들 간의 공감과 연대’라는 구체적 과제를 연동시킬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실패가 개인적 무능이나 불성실 때문이 아니라 체제 모순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사실 또한 확인되고, 성찰의 중심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 부분을 소홀히 할 경우 “체제논리에 대한 순치·동화의 수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김 교수는 경고한다.
» ‘낮은곳으로 임한 인문학’ 약자들의 희망될까 클레멘트 코스와 희망의 인문학을 비교한 유흔우 동국대 교수의 지적 역시 같은 맥락에 자리잡고 있다. 그는 클레멘트 코스가 철학 교육을 통해 ‘정치적 삶’과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 주목하는데, 이 점에서 인문학은 “정치행위를 위한 준비”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험’한 사람들로 변화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을 갖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지점에서 유 교수는 묻는다. “클레멘트 코스를 벤치마킹한 희망의 인문학이 과연 가난한 사람들을 ‘위험’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는가?”물론 현장에서 ‘시민 인문학’을 실천해온 인문학자들의 생각은 조금씩 다르다. 이날 토론자로 참여한 ‘흐르는 문화학교’의 김보성 교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화하거나 동정·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 과정에 투입된 무수한 노력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들을 교육·지도를 통한 각성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지식인의 우월적 태도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2년 남짓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진행해온 수유+너머의 고병권 박사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인문학이 새로운 삶을 생산하는 ‘생산재’라기보다, 현재의 삶을 소비하는 ‘소비재’라는 느낌을 줄 때가 많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라고 했다. 고 박사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인문학이, 그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것보다 훨씬 큰 수확을 인문학자들 자신에게 안겨다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이오 인문학에 대해서도 “앎을 폐쇄할 이유가 없다”며 관대한 입장인데, ‘배움’이 가져다 주는 삶의 변화를 신뢰한다면 시이오들이 인문학을 하는 것도 무조건 배척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한편 각종 강좌들과 연계돼 인문학 붐을 주도하고 있는 책읽기 시장에 대해서도 성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다. 인문학 도서 판매량이 뛰어오르고, 인터넷 서점이나 개인 블로그를 중심으로 책 정보와 품평을 교환하는 문화가 확산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그것이 사람들을 비판적 독서나 그것을 매개로 한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주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는 지금의 책읽기 형태가 특정한 분야에 대한 생각과 식견을 넓히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브랜드화된 저자’에 대한 ‘애호가적 소비’의 형태로 변질된 측면이 강하다고 꼬집는다. 이를 서 교수는 마르크스의 책을 읽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팬’이 되는 것에 비유한다. 달리 말하면 “라이프스타일 가꾸기의 방편으로 책을 수집하고, 읽고, 그 경험을 나누는” 새로운 지식소비 패턴이다. 서 교수는 말한다. “이런 ‘취미의 독서’가 자리한 곳에는 다른 사회적 삶에 대한 고민과 모색으로 이어지는 ‘노동’ 혹은 ‘싸움’으로서의 책읽기가 자리잡기 힘들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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