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일 화요일

'책읽기의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책읽기의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억지로 책읽기를 강요하기보다는 '책읽기의 즐거움'이 느낄 수 있도록 독서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논어>는 계속적으로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다. <논어> 7편 술이편 19장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공자는 이 대목에서 자기의 사람됨이 스스로 이러하다고 이야기하며 제자인 자로를 나무라듯 이야기한다. 이 대목에 나오는 '낙이망우(樂以亡憂)란 말은 "즐거워 근심을 잊었다"는 말이다.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는데 자로가 대답하지 못했다. 공자가 말했다. "너는 왜 말하지 않았으냐? 그 사람됨이 분발하면 먹는 것도 잊고 항상 즐거워하며 근심을 잊고, 자기가 늙어가는 것도 모른다고.

 

리쩌허우(李澤厚)는 <논어금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자는 여러 차례 '즐거움'을 말하고, 안회가 "그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았다"고 칭찬했다. 후세의 양명학파 또한 "배움은 이 즐거움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즐거움'은 곧 '인'이고 인생의 경지이며 또한 인격적 정신이다.

 

리쩌허우는 특히 '공자와 안자가 즐거워한 것'의 원시적 근원은 무속의 신비적 경험, 즉 사람과 우주만물이 합하여 일체가 되어 혼을 빼앗길 정도의 즐거움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리쩌허우 특유의 논지다. 리쩌허우는 유학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문화는 바로 이 '즐거움'의 문화라고 논파하고 있다. <논어> 1편 학이편 1장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듯이 다음과 같다. "배우고 항상 실천하니 기쁘지 않은가? 친구가 멀리서 찾아와 만나니 즐겁지 않은가?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번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여기서 말하는 '즐거움'이란 완전히 인간 삶의 것이다. 그것은 홀로, 그리고 스스로 배우고 실천하는 '기쁨' 위에 있다. '즐거움'은 인간세상의 것이며 인간관계의 것이며, 상호주관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정서다.

 

오늘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대목과 만났다. 프랑수아 줄리앙의 <무미예찬(無味禮讚)>에 나오는 이야기다. 줄리앙은 이 책 제1장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바로 <논어> 7장 '발분망식, 낙이망우'에 대한 그이의 해석이다.

 

공자가 내놓은 답변은 그의 생애를 두 국면으로 요약하여 보여준다. 즉 배움의 국면과 기쁨의 국면이니, 그는 배움을 열심히 추구하여 '먹기'를 잊었으며, 배움에 도달한 기쁨이 하도 커서 모든 '근심'을 잊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참구나 행복에는 딱히 대상이 없으니, 그것은 특정한 지식이 아니며--'절대적 지식'조차도 아니고--그라는 인간의 생애와 별도로 떼어서 정의하거나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두 국면--좀 더 정확히는 두 가지 추동(열망과 내적 만족)--이 전 생애에 걸쳐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망식(忘食) 즉 먹기를 잊음이란 금욕적으로 먹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며, 망우(忘憂) 즉 근심을 잊음이란 세상 일에서 완전히 떠난다는 것이 아니다. 열렬한 향상심과 초월의 논리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다가오는 노경까지를--스승은 자기 자신에 대해 미소한다--잊게 하는 것이다(하기야 그쯤 되면 노경도 더는 문제되지 않을 테지만). 스승은 자신을 지혜나 학식을 가진 자로 묘사하지 않으며, 이미 성취한 것들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겸손에서만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갱신과 지속의 반복 속에 있는 긴장이기 때문이다. --이 부단한 향상심은 그 안에서 자신의 목표(그의 '행복')을 발견하며, 삶은 젊음 가운데, 정진 가운데 유지한다. (강조 인용자)

 

아, 그런데 잊을 망(忘)을 망할 망(亡)으로 잘못 썼다. 망했다. 언젠가는 고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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