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1516년에 처음 세상에 나온 이래 늘 좋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왔다. 이 책을 통해서 모어가 하려고 했던 것은 물론 하나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묘사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정의와 평등에 기초하여 누구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사회였다. 모어는 그것을 토지 공유제를 기초로 한, 돈이 필요 없는, 자급자족의 소박한 생활방식이 구현된 사회로 묘사했다.
이 사회에는 화폐가 없는 대신 공동물품저장고가 마련돼 있어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 생산한 것을 거기에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꺼내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필요한 생활물자가 모두 늘 거기에 있으므로 누구도 쓸데없는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불안에 쫓기는 일 없이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이 책은 단지 가공의 이상사회에 대한 몽상이 아니라 당대 영국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겨냥했다고 할 수 있다. 모어는 헨리 8세가 이혼을 금하는 가톨릭교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멋대로 ‘영국교회’를 창립하여 스스로 그 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했을 때 거기에 동조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처형을 당하기는 했으나 생애 말년까지 국왕을 측근에서 보좌한 지배층 인사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당대 지배층의 전횡과 탐욕에 끝없이 시달리는 백성들의 참상을 외면할 수 없었던 양심적인 인간이었다. 그 양심이 우회적으로 표현된 게 바로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모어가 볼 때, 당대의 가장 큰 사회적 부정의는 ‘엔클로저’ 현상이었다. 당대 지배층은 양모산업의 발흥에 편승하여 떼돈을 벌기 위해서 농민들의 전통적인 생활 근거지인 공유지를 사유화하여 양떼를 키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어는 이것을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현실로 규정했다. 그리하여 생활 터전을 빼앗긴 백성들은 도시로 흘러들어가 극도의 빈곤을 감수하면서 떠돌이, 걸인이 되거나 범법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지배층의 반응은 이른바 ‘국법’에 의한 가차없는 형벌의 집행이었다.
어떤 점에서 <유토피아>는 이 법치의 근본적 허구성을 폭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범법자를 처벌하기 전에 범법의 원인을 직시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토피아> 속에서 정의와 평등에 기초한 사회질서를 꼼꼼히 묘사했을 때, 모어는 백성들의 생계수단을 강제로 빼앗아놓고 오히려 그 백성들을 무서운 형벌로 다스리는 지배층의 후안무치한 범죄행위에 대한 간접적인, 그러나 통렬한 고발을 행했던 셈이다.
‘용산참사’에 대한 최종적인 법적 판결이 희생자와 그 가족의 책임을 물어 그들에게 무거운 형벌이 내려지는 것으로 끝났다. 인권운동가 박래군씨의 지적대로, 이것은 “국가권력에 의한 모든 공무집행을 정당한 것으로 판단한 매우 위험한 판결”이라는 점에서 크게 우려할 일이다. 그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가 다시 한번 심각한 상처를 입었음을 보여주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착잡한 것은 500년도 더 전에 토머스 모어가 엄중히 고발한 부조리한 현실이 고스란히 지금 이 사회에서 재현되고 있는, 심히 시대착오적인 상황이다.
용산참사란 무엇인가. 도시 재개발이니 뭐니 하는 온갖 거짓언어를 배제하고,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이 사회의 지배층이 서민들의 생활터전과 생계수단을 강탈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난 참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준엄한 ‘국법’은 희생자들의 책임을 묻고,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남편이 불타 죽고, 이제 아들까지 감옥에 보내게 된 어머니(전재숙씨)가 대법원 판결 직후 눈물을 흘리며 했던 비통한 말처럼, “있는 사람 살리고 없는 사람 다 죽이는 이 나라는 정말로 이해가 안 가는” 나라임이 틀림없다. 이것을 인간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