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에 대한 <시사in>의 기사 “장하준과 점심이라도 함께 하라”를 여기에 옮겨놓는다.
영국의 유력 진보 매체 <가디언>은 지난 9월29일자 사설 ‘장하준을 칭찬함(In praise of Ha-Joon Chang)’에서 장하준 교수(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신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3가지>)를 극찬했다. 그러면서 영국의 에드 밀리반드 노동당 신임 당수에게 “장하준과 점심이라도 함께 하라”는 권유까지 보낸다. 밀리반드가 “신노동당(New Labor)은 끝났다”라고 선언한 전당대회 연설 다음 날이었다.
ⓒ송인호 제공 장하준 교수는 사회투자국가론의 금융에 대한 지나친 중시, 제조업 경시, 탈산업화론 등을 강력히 비판한다. |
진보의 정치 노선, 왜 파탄났을까
<가디언>이 <23가지>를 이례적으로 여러 차례 소개한 이유는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은 1990년대 이후 영국 노동당과 미국 민주당을 비롯한 선진 자본주의국에서 제도권 진보의 정치 노선이 왜 파탄날 수밖에 없었는지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3의 길 혹은 사회투자국가론의 원형은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취임한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태어났다. 미국 민주당이 본류인 이 노선은 1990년대 중반 영국 노동당으로 수출되면서 보수당의 18년 장기 집권을 종식시킨다. 그리고 2000년대 초 ‘닷컴버블’이 폭발하기 전까지 영·미를 중심으로 세계적 호황을 이끌었다. 그러나 사회투자국가론은 2008년 가을, 미국과 영국을 진원지로 한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헐떡이기 시작한다. 급기야 2010년, 이 노선은 민주당과 노동당이 모두 정치적 패배를 겪으면서 결정적 위기를 맞게 된다. 특히 얼마 전 미국 민주당의 중간선거 참패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대규모 교육 투자, 보육·육아 지원 등 전형적 사회투자 정책을 2년여 펼친 뒤 나타난 결과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민주당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제도권 진보 세력도 사회투자국가론의 자장 안에 있었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참여정책연구원장은 참여정부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부터 사회투자정책을 주창해왔다. 2007년에는 <대한민국 개조론>이라는 단행본을 통해 사회투자국가론을 ‘국가 발전전략 어젠다’로 제시하기도 했다. 진보·개혁 진영의 주요 브레인 집단 중 하나인 사회디자인연구소 김대호 소장도 <노무현 이후> 등의 저서를 통해 같은 주장을 피력해왔다. 이 같은 흐름이 발생한 직후 세계적 차원에서 사회투자국가론이 침몰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에는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AP Photo 빌 클린턴(왼쪽)과 토니 블레어(오른쪽)는 집권할 때 ‘부자 감세’ 등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빈부 격차, 사회적·환경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
그러나 사회투자국가론은 이런 ‘대세’를 비판하거나 뒤엎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세에 올라탔다. 예컨대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지구화 덕분에 부상하는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을 육성해서 일자리를 창출하면 된다.
예컨대 금융 같은 ‘지식기반산업’에서 말이다. 미국·영국은 1990년대 이후 대대적인 탈규제를 통해 금융산업을 육성해왔다. 특히 미국은 한 금융기관이 상업은행업(예금·대출업)과 투자은행업(증권중개업·자산운용업 등)을 함께 운영하도록 허용했다. 이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60여 년간 유지된 금기를 깨는 행위였다. 더욱이 초대형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금융감독도 폐지하고, 각종 기기묘묘한 파생 금융상품을 마음껏 출시하도록 했다.
소득 재분배하던 전통적 복지를 해체하다
더욱이 이런 초대형 금융기관이 세계를 무대로 장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제도를 바꾸기까지 했다. 예컨대 1997년 외환위기 이전의 한국에서는 대기업 주식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없었는데, 이런 상태라면 월스트리트는 한국에서 장사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월스트리트는 국제통화기금(IMF)을 앞세워 한국의 주식시장을 자유화·개방시킨다.
그러나 이들이 ‘평등’이라는 좌파의 전통적 이상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다만 소득 재분배를 원칙으로 시민들에게 직접 현금 지원을 제공하던 ‘전통적 복지’는 해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국민 개개인에게 지구화·탈산업화·지식기반경제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능력’을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금융산업에서 일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서비스 인력을 많이 키우면 된다.
어떻게? 교육과 보육에 대한 국가 지원을 통해서다. 결국 영·미 진보 세력의 과제는 교육과 보육의 강화로 어린이·청소년을 능력 있는 어른으로 만드는 것으로 압축된다. 저소득층 어린이들도 중산층과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른바 ‘기회의 균등’이다. 그리고 이런 기회 균등이 견지되는 한, 가난한 사람의 존재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기회가 균등한데도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어서 시장 적응에 실패한 결과일 뿐인데, 국가더러 어쩌란 말인가! 사실 사회투자국가론의 주창자들은 ‘근본주의적 신자유주의자’만큼이나 시장에 맹목적이다.
서구의 전통적 복지국가는 세금을 기반으로 거의 모든 국민에게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시스템이었다(보편적 복지). 이로써 최소한의 ‘결과의 균등’은 보장되었다. 그러나 사회투자국가론은 이런 복지 혜택을 ‘낭비’로 규정한다. 국가 지원 중 상당한 부분이 ‘단순 소비’로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투자국가의 청장년 시민들은 취업과 관련해서만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른바 ‘근로 연계 복지’, 즉 ‘일 시키는 복지’다. 교육이나 ‘일 시키는 복지’처럼 언젠가 수익이 발생할 부문에만 ‘국가의 돈’을 쓰겠다는 이야기다. 이런 재정지출이야말로 사회 ‘투자’로 불릴 수 있을 것이었다.
교육투자 해도 일자리 없다면?
그러나 아무리 교육과 일 시키는 복지에 국가의 돈을 퍼붓고, 인적 자원을 양성해도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결국 기회 균등은 공허해지고 ‘결과의 균등’은 황폐해지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장하준 교수는 이와 관련해 <23가지>에서 “기회의 균등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일정 수준 이상으로 결과의 균등이 보장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기회의 균등을 위한 여러 제도를 신설하는 대신 결과의 균등에 필요한 전통적 복지제도를 폐지한 것이 영·미 제도권 진보의 패착이라는 이야기다. 예컨대 무상교육·무상급식 등은 어린이들에게 기회의 균등을 제공하는 훌륭한 제도다. 그러나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장 교수는 “아이들에게 공정한 기회 비슷한 것이라도 확보해주려면, 부모 소득을 최소한 어느 정도는 균등하게 맞춰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 한 무상교육 따위 공공 서비스를 아무리 제공해도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기회 균등을 제공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더 나아가 장하준 교수는 사회투자국가의 이론적 인프라들을 공략한다. 그것은 ‘탈산업화’ 및 ‘기술 발전에 따른 불가피한 지구화(개방)’라는 현실 인식이다. 현실을 잘못 인식했다면 이에 따른 대안도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예컨대 선진국에서 제조업의 중요성이 많이 사라졌다고 보는 탈산업화론은 착시현상에 불과하다고 장 교수는 주장한다. 한 예로 10여 년 전과 비교할 때 제조업 부문의 컴퓨터 가격은 많이 내렸지만, 서비스 부문의 이발비는 비슷하거나 오히려 올랐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제조업 제품을 예전과 비슷하거나 심지어 더 많이 사용하면서도, 이 부문에 쓰는 돈이 줄어들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더욱이 제조업 제품의 가격이 크게 내린 것은 이 부문의 생산성 증가가 워낙 빠르기 때문이다. 반면 서비스 부문의 생산성은 매우 느리게 상승하고 올리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서비스업이 국민경제를 주도하는 경우 전반적 생산성 증가가 늦춰지고, 이는 성장 잠재력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서비스업이 주도하는 국민경제는 국제수지 실적도 매우 불량하다. “(지식기반 서비스 강국이라는) 영국도 국제수지 흑자 규모는 GDP의 4%에도 미치지 못해 제조업 부문에서 발생하는 국제수지 적자를 간신히 메우는 수준이다”라는 것이다. 더욱이 미국은 서비스 부문의 흑자가 GDP의 1% 미만인데 제조업 적자는 4%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탈산업 사회라는 환상은 선진국에도 좋지 않지만 특히 개발도상국에는 대단히 해롭다”라고 장 교수는 경고한다.
ⓒAP Photo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년간 교육투자를 통한 ‘기회 균등’ 정책을 폈지만, 중간선거에서 패배했다. |
사회투자국가론의 핵심적 대안인 ‘교육 강화’에 대해서도 “교육을 더 한다고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영국의 경우, 지난 세월에 걸친 대규모 교육 투자의 결과가 현실적 경제성장이나 생산성 향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실질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기계화의 발전으로 선진국에서는 대다수 일자리에 필요한 지식 수준이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등 교육을 강조한 사회투자국가론은 결국 ‘학력 인플레이션’만 초래했고, 많은 나라에서 대학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일어났지만 사회적 낭비로 그쳤다고 장 교수는 주장한다. 사실 교육을 아무리 잘 받아도 일자리가 없으면 취업할 수 없는 것은 불문가지다.
‘복지국가’라야 상류층의 ‘부’ 끌어낸다
토니 블레어와 빌 클린턴이 밀어붙인 감세 등 ‘부자들에게 유리한 소득 재분배’ 정책 또한 장 교수의 공격 대상이다. 그에 따르면, 이는 빈부 격차와 사회적·환경적 갈등만 심화시켰을 뿐 경제성장을 촉진하지 못했다. 오히려 서구 정부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누진세제와 강력한 사회복지 지출을 실시하던 시대(1950~1973년)에 자본주의 국가들은 사상 최고의 성장률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부자들에게 유리한 소득 재분배’로 ‘사회적 파이’가 불어났다고 해도 “그냥 시장에 맡겨두면 상류층의 부가 밑으로 흘러내리는 정도가 미약하다. 상당한 양의 물이 밑으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복지국가라는 이름의 전기 펌프가 필요하다”라고 장 교수는 주장한다.
더욱이 ‘복지제도 혹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소득 재분배는 경제성장까지 촉진한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많으며 잘 설계된 복지정책이 있는 나라 국민들은 일자리와 관련된 위험을 감수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에 오히려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므로’ 경제구조 고도화에도 유리하다는 것이다.
ⓒAP Photo 두바이(위) 등 개도국들마저 ‘탈산업화라는 환상’ 때문에 금융산업을 집중 육성하다 파국을 맞았다. |
국내에서도 복지가 2012년의 권력 재편기를 판가름할 강력한 정치·경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진보·개혁 세력 대다수와 심지어 보수 세력 일부까지 복지를 내세우는 상황이다. 지난 10~20여 년 동안 세계적 차원에서 복지 담론을 이끌었던 사회투자국가론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비판이 한국에도 의미심장한 이유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는 “사회투자국가론은 신자유주의와 다를 바 없다. ‘보편적 복지’의 결여로 빈부 격차는 심화되고 사회 투자는 실패하면서 영·미 제도권 진보 세력이 붕괴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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