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31일 화요일

분투가 필요한 독서/김정규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문화원·시인

방송대 출판문화원에서는 매년 여름방학 때 학생과 동문을 대상으로 독서감상문 공모 행사를 개최한다. 2004년부터 시작해 10년을 넘기다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 그런데 응모작이 갈수록 줄어들어 고심 끝에 재작년에 대회 명칭을 ‘독서분투기 대모집’으로 바꿨더니 250여 편에 불과하던 응모작이 350여 편으로 크게 늘어났다.

그 이유는 응모작 내용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응모작 내용을 보자. “독서 분투기. 있는 힘을 다해 힘껏 노력한 독서 기록. 처음 이 공고문을 보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책 한 권 읽고 나름대로 정리하면 될 것을 꼭 ‘분투’를 붙여야 하나?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나의 잘못된 셈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다.”

“학창시절 한 달에 몇 권씩 읽었던 내게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늘 예상은 늘 빗나가듯 사회생활 중 독서는 결코 쉽지 않았다. 왜 독서에 대해 ‘분투’라는 표현을 썼는지 하루하루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직장과 개인의 삶만으로도 벅찬 생활의 틈 사이로 독서가 들어갈 자리를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평균 나이가 43세인 방송대 학생들이, 나름대로는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책 한 권 읽는 시간을 확보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독서는 ‘분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

분투가 필요한 이유를 하나 더 들어보자. 가치관의 문제다. “그녀는 <조선일보> 골수독자였다. 남편의 권유로 30년간 <조선일보>만을 읽어온 그녀에게 진보논객 홍세화의 책을 권했으니 그 낯설음이 오죽했으랴! 태어나 처음으로 책을 읽으며 분통이 터져 밤을 새웠다는 고백이었다. …… 저와 다른 생각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됐어요. 60년간 품어온 사고방식을 책 한 권으로 바꿀 순 없겠지요. 하지만 이제 저와 다른 쪽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순 있겠다 싶어요. 큰 경험이었습니다.”(『이젠, 함께 읽기다』, 신기수 외, 북바이북, 2014)

그래도 이 분들은 책과 가까이 있는 경우다. 1년에 일반 도서를 한 권도 안 읽는 사람이 전 국민의 35%다. 하루 평균 독서시간은 평일 기준 2010년 31분에서 2015년 23분으로 25%p가 감소했다고 한다(2015년 조사 기준). 이렇게 독서도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으므로 안 읽는 사람들은 논외로 하고, “좋은 책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사기』를 읽을 때 나는 2000년을 단숨에 건너뛰어 사마천의 숨결을 느낀다”라는 유시민의 말에 동의하는 분들을 위한 이야기를 해 보자.

보통의 직장에서는 책잡힐 짓하면 나만 손해고, 뒷담화에 발만 담궈도 한패가 된다. 매사가 경쟁이고 감시이므로 속내를 쉽사리 내보일 수가 없다. 이런 생활에 찌들다 보니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원하는지 전혀 모르는 벽창호가 되어간다. 대부분의 40, 50대 직장인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귀도, 이야기에 공감할 심장도 고장난 지 오래라는 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람은 책을 읽어도 열린 사고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사고의 틀 안에 가둬 두고 만다. 반쪽짜리 독서인 셈이다.

데카르트의 명제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생각하고 존재하는 인간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인식하고 경험하기를 바란다. 창의적 존재를 꿈꾼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독서가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습관처럼, 사서-읽고-꽂아두는 독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독서 후 활동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近思錄』에 이런 구절 있다. “공부의 첫걸음은 독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책을 많이 읽으라는 뜻이 아니다. 제대로 읽어 그 중요한 뜻을 확실하게 아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저 많이 읽기만 하고 외우기만 하는 것은 의미 없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많이 읽어도 그저 책을 많이 쌓아둔 서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IT미래학자이자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저자인 니콜라스 카는, “검색엔진은 몇몇 단어를 보여주며 관심을 끌지만, 전체를 파악할 근거는 거의 제공하지 않아 (우리는) 숲은커녕 나무조차 못 보게 되어 잔가지와 나뭇잎만 볼 뿐”이라고 우려한 바 있다. 때문에 우리는 스마트폰과 SNS 홍수시대의 맹점을 극복할 수 있는 독서활동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

골방독서에서 광장독서로 바꿔 보는 것은 어떨까. 혼자 읽는 데서 그치지 말고 서평을 쓰고 다른 사람들과 토론을 하면서 사고의 외연을 확장하는 독서활동은 40, 50대 중년뿐만 아니라 20대 학생들에게도 유효할 것으로 본다. 주변을 돌아보면 당신만 모르게 암암리에 활동하는 독서클럽들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진짜들은 자기들끼리 꽁꽁 숨어서 암약하기 때문에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니 웬만하면 그 중 하나를 일단 선택해서 지금 바로 입회 원서를 제출해 보시라.


출처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0030

공공도서관 이용자 수 감소/ 이데일리 채상우 기자

이데일리 채상우 기자
지난해 도서관 이용자 평균 27만명..5년새 20% 감소
"독서율 감소·도서관 관리 미흡이 이용자 감소 이유"
독서율 감소 국가경쟁력 손실로 이어진다는 연구결과
정부·지자체, 도서관 문제 해결에 무신경한 모습 보여
도서 구매량 줄이고 관리하는 사서 수도 턱없이 부족
공공도서관을 찾는 이용자의 수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도서관 관리 소홀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지만 정부와 지자체는 오히려 도서관에 구입하는 책의 양을 줄이는 등 무신경한 모습이다. 도서관 관리를 책임지는 사서의 수도 턱없이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나서서 도서관 문제에 칼을 빼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공공도서관 이용자 수 5년 새 20% 감소
지난 25일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전국도서관대회’에서 “독서의 미래는 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며 “도서관의 질적 양적 성장을 위해 정부와 전국민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 장관이 이토록 호소한 배경에는 암담한 한국 도서관의 현실이 있다.
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에에 따르면 공공도서관 1곳당 평균 이용자 수는 2012년 34만명에서 지난해 27만명으로 20%가 줄었다. 독서 문화의 산실인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은 국가경쟁력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현대경제연구원 ‘독서의 경제적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독서율과 국가경쟁력은 0.77(1에 가까워질수록 높은 상관관계)을 보였다. 독서율이 높은 국가일수록 국가경쟁력도 높다는 말이다.
도서관 이용자 수가 줄어든 이유는 독서율 자체가 줄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19세 이상 성인의 연간 독서율은 65.3%에 불과하다. 성인의 3분의 1은 1년에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 다른 이유는 도서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데 있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원하는 책이 없다든지, 훼손된 책을 그대로 방치한다든지 도서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며 “이런 도서관 문제를 개선하지 않으면 이용자는 당연히 감소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무신경한 정부…도서 구매량 줄어들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나 지자체는 공공도서관 문제 개선에 뒷짐을 지고 있다. 2007년 도서관 문화 활성화를 위해 야심차게 발족한 대통령 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는 10년이 지나도록 대통령 대면보고를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오히려 공공도서관 도서 구매량은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공공도서관 한 곳당 평균 도서 구매량은 6299권으로 2012년 8539권 대비 26% 감소했다. 인기 베스트셀러나 신간을 구비하지 않은 도서관도 많다. 백 대표는 “읽고 싶은 책이 없으니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도 당연한 이치”라고 말했다.
도서관 관리를 책임지는 사서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는 것도 문제다. 한국도서관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공공도서관에 필요한 법정 사서 인원은 2만3222명이지만 실제 배치된 사서는 4238명에 불과했다. 공공도서관 989개관 중 최소 배치 기준인 3명을 충족하지 못한 곳이 전체의 40.5%다. 사서가 아예 없는 공공도서관도 48개에 이른다. 이 같은 인력부족으로 현장 사서들의 1명당 평균 봉사대상인구는 2만3000여명에 달한다.
이상복 대진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사서 한두 명이 관리하는 공공도서관이 태반”이라며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1년에 2400명의 사서가 배출되지만 그중 70%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돼 월급 170만원을 받고 일을 한다”며 “사서에 대한 대우가 낮으니 국민 대부분이 사서를 도서출납을 하는 사람쯤으로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도 문제는 산적해 있다. 도서관발전종합계획에 따라 2013년 1개였던 취약계층을 위한 도서관을 2018년 17개로 늘리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이후로 단 한 곳도 늘지 않았다. 또 고령화사회에 진입함에 따라 노인층을 위한 서비스 강화에도 적극 나서겠다고 발표했지만 지원책이라고는 돋보기를 비치하는 것뿐이었다.
지난 5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스타필드 코엑스몰에 문을 연 별마당 도서관. 특설무대가 있어 명사의 강연과 음악 공연 등이 상시 열린다. 전문가들은 도서관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종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사진=신세계그룹).
◇“정부 지원 늘리고 도서관 질적 향상 해야”
전문가들은 도서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백 대표는 “우리나라는 공공도서관이 대부분인 만큼 정부와 지자체가 도서관 문제 개선의 핵심 주체”라며 “이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이 일차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도서관을 가고 싶은 장소,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탈바꿈해야 한다”며 “책만 읽는 곳이 아니라 종합 문화 공간으로 이용자들을 유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곳이 지난 5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스타필드 코엑스몰에 문을 연 별마당 도서관이다. 이곳에는 특설무대가 있어 명사의 강연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도서관은 성공적으로 자리 잡아 주변 매장의 매출을 30% 끌어올리는 성과를 달성했다.
하지만 이런 부가적인 서비스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 교수는 “부가적인 서비스 제공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서의 수를 늘리고 사람들이 보고 싶은 책들이 가득한 도서관을 만들어 독서의 산실로서 도서관의 기능을 되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채상우 (doubleu@edaily.co.kr)

출처 https://goo.gl/2Mt7Hy

탄핵광장의 안과 밖/ 이지호, 이현우, 서복경

['탄핵 광장의 안과 밖' 이지호 이현우 서복경] 촛불은 좌파 동원? "친구·가족과 자발적으로 참가"


뉴스를 접하고 스스로 참가 80%
친구·동료·가족 함께 했다 82%
133일간 20차례 1656만명 참가
내일신문과의 '촛불기획' 밑바탕

2017-07-25 10:46:59 게재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20차례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을 "박근혜 퇴진" 함성으로 가득 채웠던 촛불집회. 촛불집회는 박근혜 탄핵과 구속을 이끌면서 한국정치를 한단계 상승시켰다는 평가를 받지만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보수 일각에선 "촛불은 좌파가 꾸며낸 짓" "박근혜는 억울하게 탄핵 당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촛불집회를 '일방적 주장'이 아닌 '조사'와 '수치'를 통해 객관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처음으로 나왔다. 연구자들은 주관적 판단이 아닌 과학적 여론조사를 통해, 때론 촛불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촛불을 해부했다. 촛불에 대해 지금까지 나온 분석 가운데 가장 객관적이라는 평가다.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에서 한솥밥을 먹는 이지호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대우교수,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가 '탄핵광장의 안과밖'이란 제목의 책(책담)을 냈다. '133일간의 촛불시민을 가장 객관적으로 분석한 민심 보고서'란 부제가 붙었다.

이 책의 주요 근거가 된 여론조사(△촛불집회 현장조사 : 2016년 11월 26일 조사, 광화문 촛불집회 참석자 대상, 표본 2058명, 내일신문 의뢰-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조사, 이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일반유권자 조사 : 2016년 12월 26일∼28일 조사, 전국 유권자 대상, 표본 1200명, 내일신문 의뢰-한국리서치 조사)는 내일신문과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가 함께 진행한 촛불집회 기획 과정에서 실시됐다.

박근혜 촛불 운동권의 조직 동원?

"좌파종북 세력이 분대 단위로, 지역별로 책임자를 다 정해서 시위에 나온다." 새누리당의 김종태 전 의원이 2016년 11월 26일 촛불집회를 겨냥해 한 발언이다. 김 전 의원의 발언이 사실일까.

내일신문-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가 지난해 11월 26일 광화문 촛불집회 참가자 2058명을 대상으로 '어떤 계기로 집회에 참여했는가'라고 묻자 참여자의 80%는 '뉴스를 접하고 스스로 판단했다'고 응답했다. '친구 권유'(9%) '가족 권유'(5%) 등 다른 사람의 권유에 의한 참여는 소수였다.

'누구와 함께 참여했는가'라고 묻자 친구나 직장동료(50%), 가족(32%), 혼자(13%), 정당 및 단체·동호회 회원(3%) 순이었다.

이번 촛불집회를 2008년 쇠고기 촛불집회와 비교했다. 2008년 촛불 참가자에게 '문자나 댓글로 집회 참여를 권유해본 경험이 있냐'고 묻자 47.4%가 '있다'고 답했다. 2016년 촛불 참가자는 33.1%만이 '있다'고 답했다. 정치참여에 소극적인 시민이 2016년 촛불에 더 많이 참여했다는 얘기다.

저자들은 "2016년 박근혜 촛불 참가자의 압도적 다수는 조직에 의해서 동원되지 않은 자발적 참가자였다"고 설명했다.

촛불집회는 진보성향 시민모임?

일부 보수진영에서는 촛불집회가 진보진영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진보진영이 최순실 국정농단을 빌미 삼아 박근혜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촛불집회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촛불을 국민적 분노가 아닌, 특정세력의 정치 행동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촛불집회 참석자와 2012년 대선 지지후보를 교차분석하자 촛불 참석자 가운데 문재인 지지자가 61.7%였다. 박근혜 지지자는 18.1%였다. 촛불 참석자 중 박근혜 지지자가 적잖은 것이다. 특히 촛불에 불참한 박근혜 지지자에게 불참 이유를 묻자 '시간이나 여건이 안돼서'가 46.8%였다. 집회에 참가할 의사는 있지만 개인적 여건 때문에 불참한 사람이 절반에 가까운 것이다. '관심이 없어서' 14.8%, '목적에 찬성하지 않아서' 24.3%로 나타났다.

집회 참가와 정치이념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진보층의 39.1%가 촛불에 참가해봤다고 답했다. 중도층은 19.4%, 보수층은 17.3%로 나타났다. 중도와 보수층이 비슷한 비율을 보인 것이다. 이번 집회가 박근혜 반대시위의 성격이 강했다면 중도에 비해 보수층의 참여율이 확연히 낮았겠지만 비슷하게 나타난 것은 집회가 정치적 의미 이상이었다는 걸 뜻한다.

저자들은 앞선 사례를 들어 "촛불집회가 박근혜정부에 대한 정치적 비판의 성격을 넘어 도덕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임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민주주의 가치를 위한 저항이었나

촛불집회는 '좌파가 조직적으로 만든 사태'가 아니라 전 국민의 민주주의 의식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계기였다는 분석이다. 참가자들이 국정농단과 촛불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를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촛불집회 전인 2016년 6월과 촛불 뒤인 2016년 12월에 실시한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 조사를 비교했다. '민주주의는 다른 어떤 제도보다 낫다'는 견해를 6월 조사에서는 52.7%가 선택했지만 12월에는 75.5%로 급등했다. '상황에 따라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낫다'는 견해는 28.6%에서 15.2%로 급락했다. '민주주의나 독재나 상관없다'도 12.9%에서 7.6%로 낮아졌다. 한국당 지지층에서도 '민주주의는 다른 어떤 제도보다 낫다'는 견해가 38.9%에서 57.9%로 뛰었다.

저자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국민에게 권위주의로의 퇴행 혹은 민주주의 가치의 훼손으로 다가왔고, 촛불 국면에서 보수정당의 지지층까지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인식이 크게 고양됐다"고 설명했다.

인원수로 보는 촛불

촛불은 2016년 10월 29일 1차를 시작으로 2017년 3월 11일까지 20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주최측 추산에 따르면 20차례 가운데 100만명 이상이 참가한 집회는 7차례였다. 평균 83만명이 참가했고 최대는 2016년 12월 3일 232만명이었다. 20차례 집회에 참가한 누적인원은 1656만명에 달한다.

출처 http://www.naeil.com/news_view/?id_art=245301

고령층을 위한 도서관 서비스 표준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김병욱 의원

도서관 찾는 고령층 크게 늘었으나 관련 서비스 미미
"도서관 서비스 표준 가이드라인과 메뉴얼 제작 시급해"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도서관을 찾는 고령층이 크게 늘었지만 관련 서비스는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파악됐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김병욱 의원이 27일 공개한 '최근 5년간 연령별 국립중앙도서관 이용자 현황'에 따르면, 올해(이하 9월 기준) 국립중앙도서관 본관을 찾은 국민의 53.2%는 50대 이상이다. 60대 이상이 28.2%, 50대가 25.0%다. 30대(13.8%)와 20대(10.5%), 10대(1.0%)보다 월등히 많았다. 


2013년 대비 지난해 연령별 이용자 증감률에서도 10대와 20대가 감소한 반면 50대(41.3%)와 60대 이상(38.9%)은 큰 폭으로 증가했다. 국회도서관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50대 이상의 비중이 2013년 32.6%에서 올해 45.4%로 늘었다. 특히 60대 이상은 이 기간 이용자가 43.3% 급증, 도서관의 고령화 추세를 주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령층이 도서관을 찾는 이유는 여가와 자기계발을 위해서다. 지난 6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낸 '고령자 여가활용 실태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65세 이상 도서관 이용자 427명에서 50.4%는 도서관을 찾는 이유로 여가시간을 꼽았다. 자기계발은 24.4%. 대부분 혼자 도보나 버스를 통해 월 평균 4~5회 방문했다. 조사대상자의 99.3%는 다시 찾겠다고 답했다.

고령화 추세에도 도서관의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자료실에 돋보기를 비치하고, 정보화 기초 교육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는 정도다. 대활자본 책이나 오디오 같은 대체자료가 사실상 전무하고, 전담 사서나 보조 인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고령자 서비스 관련 예산을 편성하지 않은 곳도 허다하다. 정부 차원에서 고령자를 위한 도서관 표준 서비스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는 이유다.

국내에서 고령자 서비스는 '도서관 이용에 장애가 있는 지식정보취약계층'이나 '생애주기별 평생학습 지원'의 한 영역으로 다뤄지고 있다. 대통령직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의 '제1차 도서관 발전 종합계획(2009년~2013년)'에서 노인 서비스는 장애인, 수용자, 장병, 다문화가정 등과 함께 지식정보 취약계층을 위한 도서관서비스 확대 사업의 하나로 설계됐다. 한국도서관협회의 한국도서관 기준 또한 노인서비스를 '노인 및 장애인 등 특수 이용자 집단에 대한 서비스 기준'의 일부로만 다뤘다.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선진국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도서관의 고령자 서비스에 많은 공을 들였다. 미국도서관협회(ALA)가 대표적이다. 1970년대부터 일곱 가지 고령자서비스 가이드라인을 기초로 세부 매뉴얼을 작성해 공공도서관들이 준용하도록 했다. 2008년에는 서비스의 대상 연령을 60세에서 55세로 확대하기도 했다. 문체부도 매년 공공도서관 통계 자료를 모은다. 그러나 이용자를 어린이, 청소년, 성인으로만 구분해 고령층의 이용 실태를 파악하는데 있어 한계를 드러낸다. 사서, 시설, 자료, 프로그램 등에 대한 효과적인 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다. 

김병욱 의원은 "여가와 자기계발을 위해 도서관을 찾는 고령층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 분명해 보인다"며 "문체부와 국립중앙도서관이 고령층을 위한 도서관 서비스 표준 가이드라인과 메뉴얼을 만들고 각 도서관의 성격에 맞게 응용하는 방안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출처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7102708423984525

2017년 10월 30일 월요일

민음사, 박맹호 이야기/ 김동훈

민음사


브랜드는 백성의 소리(Vox Populi)다. 백성의 소리를 듣되 설움을 삭이고 시와 같이 우아하고 품위 있는 ‘민음(民音)’을 표현하는 것. 민음사는 한국에 단행본 출판문화를 선도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 권력에 의해 묻혀 버릴 많은 문인들을 발굴해 냈다. 브랜드는 시민의 또 다른 항거, 개혁을 꿈꾼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가즈오 이시구로, 일본계 영국 소설가로 국내에서 유명한 작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민음사는 <남아 있는 나날>(2009), <나를 보내지 마>(2009), <녹턴>(2010),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2011) 등 이시구로의 전체 여덟 작품 중 일곱 권을 국내에 소개해 왔다. 이번 노벨 문학상 선정으로 민음사는 ‘이시구로 특수’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그동안 민음사가 꿋꿋하게 지켜온 출판 철학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 권력은 누가 만드는가 
민음사를 창립한 고 박맹호 회장은 원래 문학청년이었다. 1955년 서울대 불문학과 재학 시절인 스물두 살에 1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자유 풍속’을 응모했다. 이 단편으로 등단이 확실시됐지만 당시 정권을 잡았던 자유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심사위원들은 그의 당선을 취소한다. 풍자로 이루어진 그의 소설 일부를 보자. 
그럼으로써 경애하는 수상의 민주적 권력은 시민들의 자유를 보다 더 신속히 보장하기 위하여 철저히 강화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자유’를 불필요하게 구속하는 법률을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폐지하여 버리고 영특하신 수상의 자유재량에 우리의 조국을 마음 든든히 맡기고자 했습니다.(박맹호, ‘자유 풍속’에서) 
이 대목은 정부의 선전 연설 중 한 부분이다. 여기서 ‘수상’은 자유당 정권 시절 최고 권력에 대한 풍자다. 또한 이 소설의 주인공 ‘맥파로’는 자유(당)를 지키기 위해 투쟁을 불사하는 시민으로 풍자된다. 맥파로(麥波路)는 한자의 의미대로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 물결의 길’인데, 바람 따라가는 떠돌이라고 할까, 돈 한 푼 없는 백수 처지에 길을 걷다 우연히 선전을 듣게 된다. 왠지 모를 뜨거움을 느끼며 주인공은 ‘관제 데모’에 휩쓸려 갔다 결국 죽고 자유(당)는 수호되었다. 그렇다면 이 풍자소설은 어떤 문제의식을 갖는가? 
우선 이상한 어구들이 등장한다. 수상이 권력을 갖되 그냥 권력이 아니라 ‘민주적 권력’이라든지, “자유를 보다 더 신속히 보장하기 위하여” 수상의 권력을 강화하고 “수상의 자유재량”에 “조국을 마음 든든히 맡긴다”와 같은 표현. 이쯤에서 그의 풍자는 기막힌 역설로 우리의 머리를 때린다. 독재 권력을 양산하는 것은 다른 아닌 시민이라는 점, “수상의 자유재량”은 주인공 맥파로로 대표되는 시민이 위임한 것. 혹자는 주장할 것이다.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절대권력은 단기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고. 
■ 예외상태를 창출하는 절대권력 
그 당시 ‘관제 데모’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시민 집회는 예외상태를 야기했다. 그 내면에는 자유당 정권의 교묘한 술책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 이후 국내에서 간혹 있었던 비상사태는 카를 슈미트의 ‘예외상태론’으로 분석할 때 한 가지 확실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정상이 아닌 비정상의 예외상태로 누군가 한 사람이 절대권력을 획득한다는 것. 카를 슈미트의 저 유명한 테제, “예외상태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자를 주권자로 일컫는다”가 유독 한국에서 여러 차례 목도되었다.
슈미트의 주권론에 의하면, 국가가 비상사태에 직면했을 때 기존 법의 틀 바깥에서 신속하게 결정하는 주권이 필요하다. 그때 결정을 내리는 자가 바로 주권자다. 평상시에는 모든 결정이 절차를 따라 대화와 타협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다가도 예외상태가 될 때 결정권이 소수에게 부여된다면 주권은 국민이 아닌 최고 권력에 있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의 저자 조르조 아감벤도 주권의 근본 구조가 예외상태임을 밝히고 있다. 
절대권력을 꿈꾸는 사특한 자들은 자신이 ‘지존’으로 등극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만들거나 방조할 것이고, 그런 전형적인 예가 자유당 시절의 ‘관제 데모’였다(최근 2016년에 있었던 터키 정부의 비상계엄령도 일부러 그런 사태를 방조하거나 조장한 것이 아닌지 의심받기도 한다).
그 시대를 몸소 겪었던 감수성 강한 문학청년의 눈에 떠오른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백성이 진정한 소리를 듣는다면, ‘관제 데모’와 같은 불행은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백성이 깨어 있으면 지식을 독점하여 온갖 선전문구로 ‘예외상태’를 만들어 내는 권력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권력자를 만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외상태를 만들도록 현혹되지 않을 가능성은 오로지 깨어 있는 시민에게 있다. 갓 스물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등단의 기회를 놓친 박맹호는 이후 뭇 백성에게 참된 소리를 펼치기로 결심한 채 문학청년에서 출판청년으로 거듭난다.
■ 승화된 ‘백성의 소리(Vox Populi)’를 위해 
박맹호는 소수 권력자를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백성의 소리’가 울려 퍼져 모든 권력에 항거하기를 원했다. 1966년 박맹호는 서른세 살이 되자, ‘백성의 소리’라는 뜻의 ‘민음사’란 이름으로 출판사를 창립한다. 회사명은 탐독했던 <수호지>의 영향을 받은 것. 그는 “<수호지>가 세상에 대해 항거하는 내용이 재미있어서 몰입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문 문법에 맞춘다면 ‘민성사’이겠지만 ‘민음사’로 한 이유가 있었다. 음(音)은 “동양에서 악부(樂府)가 백성들의 다양한 노래를 채록하면서 그대로 하지 않고 고급한 시의 양식으로 승화했다는 것”. 백성의 소리를 듣되 시와 같이 “우아하고 품위 있게 해보자”는 뜻이었다. 초창기 찍었던 건강 관련 도서나 전집이 비록 매출에 큰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지만 아무 ‘소리’나 출판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그 이면에는 ‘민음, 그러니까 승화된 백성의 소리’를 찾고자 하는 결단이 있었다. 
‘세계시인선’ ‘오늘의시인총서’ ‘이데아총서’ ‘대우학술총서’ ‘오늘의작가총서’ ‘김수영문학상’ ‘오늘의작가상’에는 묻혀 있는 ‘민음’에 대한 박맹호의 철학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박맹호 회장이 발굴해 낸 시인으로는 김수영, 김춘수, 김종삼, 최승호, 장정일 등과, 작가로는 이제하, 이문열, 한수산, 박영한, 전상국, 강석경, 조성기, 하일지 등. 심지어 학자로는 최창조, 김용옥 등이 있다. 박맹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내가 출판에 관심을 품은 건 대학 시절부터였다. 소설에 인생의 무게중심이 쏠리기는 했지만, 출판은 은밀하면서도 확연하게 내 안에 자리 잡은 또 다른 꿈이었다. 비록 내가 직접 쓴 작품은 아니더라도 남들보다 먼저 훌륭한 작품을 만나고 나면 그 쾌감이 강렬했다.(박맹호, <책>에서)
소설로 밤을 지새웠던 문학청년의 감수성이 각 시대의 ‘민음’을 찾았던 이유는 거기에 어떤 ‘쾌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민음사는 본격적으로 단행본 시대의 서막을 열게 된다. 당시는 출판사들이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같은 전문 도서는 거의 만들지 않았고 교과서나 전집류를 펴내는 시대였다. 하지만 박맹호는 “나는 민음사를 종합대학 하나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아카데미즘의 센터로 만들고 싶다”는 일념으로 단행본 출판을 고집해 나간다. 드디어 민음사는 한국 단행본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자 출판문화의 전차가 정상 궤도에 진입하게 된다. 아울러 한국에 명실상부하게 ‘교양’이 가능하게 되었다. 
■ ‘황금가지’와 권력의 목 베기 
‘우물 안의 개구리’는 무식할 뿐만 아니라 용감하다. 하지만 우물 밖의 세상을 알 수만 있다면 그 개구리는 우물 안의 권력에 대항하고 그 권력은 곧 무너진다. 분명 권력에 대한 항거는 ‘앎’으로부터 시작된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프로테스탄트, 즉 ‘항거자’란 이름을 가진 이유는 밖의 앎을 가능케 한 출판 덕분이다. 만약 인쇄술이라는 매스미디어가 없었다면 프로테스탄트, 그러니까 종교와 정치 권력에 대한 ‘항거’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 종교개혁의 도화선이었던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1517년 10월31일 비텐베르크대학교 교회 정문에 게시된 지 일주일 만에 독일 전역으로, 그리고 한 달 만에는 유럽 전역으로 급속하게 퍼졌다. 
출판을 통해 확산된 다량의 새로운 지식은 이전 시대의 지식 독점을 불가능하게 했다. 중세의 교회와 대학을 중심으로 버티고 있었던 지식 권력과는 전혀 다른 ‘민음’이 전파됐고, 새로운 지식들이 모이고 대치되면서 창의적인 지적 활동이 장려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출판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출판이라는 기술 혁명은 손으로 일일이 베끼던 필사본에서 인쇄본으로 바뀜으로 각종 사상의 네트워킹을 가능하게 했고, 보다 폭넓은 지식이 유통될 수 있었다. 출판업의 발달은 이후에 나타나는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그리고 계몽주의의 탄생을 위한 인큐베이터였던 셈이다. 이 인큐베이터 속에서 온갖 지식 권력에 대한 ‘항거’가 움튼다. 이것이 바로 출판의 힘이다.
민음사는 창업한 지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한번 출판을 통한 ‘항거’의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황금가지는 1996년 무겁고 진지한 민음사의 이미지를 탈피해서 독서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책을 출판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창립했다. ‘황금가지’라는 이름은 조지프 프레이저의 인류학 명저 <황금가지>에서 따온 것으로 ‘권력의 목 베기’라는 내포가 문화적 엄숙주의를 버리고 생동하는 세계의 새로운 감각을 수용하려는 취지에 맞춤했다.(박맹호, <책>에서)
신화학자 조지프 프레이저에 의하면 ‘황금가지’는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의 이름이다. 북이탈리아의 네미 호수 숲에서는 이전의 사제왕(司祭王)을 살해하는 새로운 사제는 먼저 ‘황금가지’를 꺾어야 했단다. 황금가지 꺾기가 준비되어야 ‘권력의 목 베기’가 가능한 것. 종교 권력의 목, 그리고 지식 권력의 목은 출판이라는 황금가지를 지닐 때만 가능하다. 이것이 권력에 대한 박맹호식 항거요, 동시에 출판이 출판다워질 수 있는 기본 자세다. 
■ 진정한 주권과 사명감 
그렇다면 황금가지를 지니면서 잊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일까? 권력이 만드는 예외상태에 맞서야 한다. 앞에서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했다. 그런데 일찍이 종교개혁운동을 펼친 장 칼뱅은 그 주권자의 자리에 사람이 아닌 신을 올려놓았다. 칼뱅은 카를 슈미트의 주권론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 장 보댕과 동시대 인물이다. 칼뱅의 주권론은 이른바 ‘신의 주권 사상’으로, 예외상태와 관련하여 쉽게 풀자면 이렇다. ‘신만이 예외상태에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이 아닌 권력자가 조장한 그 어떤 예외상태에도 현혹되지 말라.’ 
그뿐만 아니라 현대에 권력자가 창출하는 예외상태에 맞서는 이론을 제시한 사람도 있다. 발터 벤야민. 그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8번 테제에서 “진정한 예외상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선언한다. 이 이론을 발전시킨 아감벤은 ‘진정한 예외상태’를 ‘메시아의 도래’로 국한시켰다. 진정한 예외상태는 권력자가 아닌 메시아와 더불어 온다는 것. 메시아는 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기 때문에, 주권자가 법을 폐지(중지)하는 예외상태는 메시아가 완성하는 법과 충돌된다. 메시아만이 예외상태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데, 그 예외상태도 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법을 완성하는 길, 즉 모든 법의 완성인 사랑이다. 
어디 한번 보자.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둥 여러분이 주인이라는 둥의 빤한 거짓말은 금방 탄로 난다. 당신이 소속된 조직에서 누가 예외상황을 만들거나 누리고 있는 초법적 존재인지 살펴보면 그렇다. 근무시간이 누군가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다른 구성원이 다 지키고 있는 원칙과 규정이 누군가에겐 저촉되지 않는다면, 그 특정인이 ‘지존’이다. 그런 사람은 더욱 허울 좋은 복지 운운하며 현대의 ‘맥파로’들을 선동하겠지만, 그가 교묘하게 자신의 특혜, 그러니까 예외상태의 권력을 절대 양보하지 않고 누리고 있다면,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절대권력을 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쯤 되면 용기 있는 시민은 그 권력에 눈이 먼 독재자를 증오하고 비난하고 급기야 복수심에 가득한 채 그 조직을 뛰쳐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될 때 그 조직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개혁은 그 자리를 지킬 때, 함께 있는 구성원들을 사랑할 때 일어난다. 그 자리가 광장이며, 직장이며, 당신의 조국이다. 
자유당 정권을 풍자한 작품을 써 신춘문예 당선이 취소될 정도로 권력에 항거했던 박맹호. 그는 군사정권 시절 ‘수요회’를 결성해 출판문화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외쳤고, 전두환 정권을 향해 출판의 자유를 요구하는 ‘17인 선언’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거기엔 어떤 예외상태도 권력자들이 조장할 수 없도록 시민을 무장시키기 위한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줄기차게 ‘백성의 소리, 민음’을 찾고 새로운 작가와 문인들을 사랑하였다. 직장의 동료와 가족을 끔찍이 사랑했다.
이 광장에서 우리는 우리 삶이 우리 이웃의 이해와 관용, 또 우리 이웃과 우리의 공동 운명, 공동 목표의 확인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배우고 이 의지를 높은 삶의 행복에 연결시켜야 할 것을 깨닫는다.(박맹호, <책>에서) 
다시 그의 사명감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 “나는 민음사를 종합대학 하나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아카데미즘의 센터로 만들고 싶다.” 브랜드는 백성의 소리, 설움을 삭이고 시로 울려 퍼질 때 그 사회는 계속 개혁된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0272051005&code=960205

2017년 10월 29일 일요일

‘2017 서울국제교육포럼(SIEF, Seoul Internation Education Forum)’

▢ 서울시교육청(교육감 조희연) 소속 교육연구정보원(원장 이재근)은 10월 28일(토) 13시부터 18시까지 서울시교육청교육연수원에서 국내‧외 수업 및 평가의 전문가‧연구자, 교육정책담당자, 학부모, 교직원, 일반인이 참여하는 ‘2017 서울국제교육포럼(SIEF, Seoul Internation Education Forum)’을 개최한다.

▢‘미래교육, 수업 및 평가 혁신으로’란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행사에서는 국내․외 수업 및 평가의 이론가와 실천가들을 초청하여 우리나라의 수업과 평가를 성찰하고 △미국 △핀란드 △덴마크 등의 수업 및 평가 혁신 사례를 공유함으로써 미래교육을 위한 수업과 평가 혁신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 이번 포럼은 3개 세션으로 구성되는데 △교원워크숍으로 진행되는 사전세션(pre-session) △강연과 토론으로 진행되는 본세션(main session) △세계 여러 나라의 평가기록(성적통지표, 성적증명서, 생활기록부 등)을 전시하는 포스터세션(poster session)이 마련된다. 

   ◌ 사전세션(pre-session)은 교원워크숍 형태로 진행되는데, 초청교원들이 공모를 통해 선정된 프로젝트 수업 실천사례(유치원 2, 초등학교 2, 중학교 2, 고등학교 2)를 라운드테이블 토론으로 진행한다. 토론과정에서 도출된 우리나라 프로젝트 수업의 현황과 문제를 초청연사이자 컨설턴트인 수지 보스와 토론하고 컨설팅의 기회를 갖는다. 
   
   ◌ 본 세션(main session)은 조희연 교육감의 환영개막연설을 시작으로 기조강연자(keynote speaker, 2명)와 초청연사(invited speaker, 3명)의 강연 및 토론으로 진행된다. 
     - 기조강연은 우리나라 대입수학능력시험을 도입하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과 한국교육학회장을 역임한 박도순 명예교수(한국, 고려대)가 “미래교육을 위한 평가의 혁신: 평가의 철학과 방향을 중심으로”를 발표하고, PISA전문가이자 핀란드 초중등 교육의 교육평가 전문가인 요우니 밸리애르비 교수(핀란드, Jyväskylä대학교)가 “PISA를 통해 본 핀란드 평가혁신”을 발표한다.
    - 초청연사(invited speaker)는 실천사례를 중심으로 강연한다.   미래교육에 대비한 수업혁신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는 프로젝트수업의 전문가이자 컨설턴트인 수지 보스(미국, 벅교육협회)가 “프로젝트 중심 학습: 학습 향상을 위한 우수사례 적용”을 발표하고, 상암고등학교 등 전 세계 13개교와 파트너십을 형성하고 다양한 국제교육프로그램 교류 활동을 하는 교사 앤더스 슐츠(덴마크, Rysensteen Gymnasium)가 “덴마크 학교의 시험, 교육과정, 피드백 전략”을 발표한다.

    - 또한, 제주 한국국제학교와 우리나라 학교 현장에서 평가에 관심을 기울이며 학생평가혁신을 실천하고 있는 이지선 교사(제주, 서광초등학교)가 “한국국제학교(KIS)의 학생평가와 우리나라 평가혁신 과제”를 실천경험에 근거하여 제안한다.  
  
   ◌ 행사장 입구에 마련된 포스터 세션(poster session)에서는 우리나라 국제교육포럼 최초로 세계 여러 나라의 성적표를 전시한다. △미국 △독일 △베트남 △싱가폴 △아르헨티나 △영국 △오스트리아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캄보디아 △캐나다 △필리핀 △호주 △홍콩 등의 현지학교나 국제학교 성적표를 전시하여, 우리나라의 평가기록과 통지의 문화를 점검하고 미래사회에 적합한 평가방식을 상상할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교육연구정보원 관계자는 “이번 서울국제교육포럼을 통해 수업과 평가의 본질을 성찰하고, 수업과 평가 혁신의 방향 및 내용‧방법 등을 변화시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여는 미래교육의 토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 교육연구정보원은 이번 포럼 이후에 서울교육정책에 대한 시사점및 주요 초청연사들의 주제 발표 원고를 정리하여 교육연구정보원 홈페이지와 인터넷 등을 통해 공개할 계획이다.

출처 http://enews.sen.go.kr/news/view.do?bbsSn=148778&step1=3&step2=4

공화/ 공화주의/ 共和/ res publ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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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2000년 동안 매달려 온 학술 현안을 한국의 학자가 해결했다. 갑골문자의 왕국 은나라를 멸망시킨 서주(西周)의 12왕 연대의 수수께끼에 정답을 제시했다. 

상주사(商周史)·고문자 전문가인 박대종 소장(대종언어연구소)이 중문 간자체본 ‘서주사의 절대기년(西周史之绝对纪年)’을 통해 서주사의 비밀을 밝혔다.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천자국 은나라를 밀어내고 제후의 나라를 천자국으로 승격시킨 서주의 시조는 무왕(武王)이다. 중국의 제1 출국금지 국보급 문물인 ‘대우정(大盂鼎)’ 명문은 ‘무왕은 문왕의 뒤를 이어 나라를 세웠다(武王嗣文王乍邦)’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역사는 서주의 1대 왕을 무왕, 마지막 12대 왕을 유왕(幽王)으로 본다. 

문제는, 서주사의 11대 선왕(宣王)과 12대 유왕을 제외한 이전 1대 무왕부터 10대 려왕(厲王)까지 정확한 재위연대가 오리무중이라는 사실이다. 사마천이 중국 제1위 정사서 ‘사기(史記)’에서 11대 선왕 이전 ‘공화(共和)’의 섭정원년인 BC841까지만 구체적으로 명기했기 때문이다. 국제학술계가 중국사 연대를 BC841 이후부터 공인하고 있는 이유다. 

서주사는 가공이 아니다. 실재한 역사인데 1~10대 왕년을 모른다. 중국은 답답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사적 난제에 처음 도전한 이는 중국 한나라의 역법학자 류흠(劉歆·?~23)이다. 

서주 왕실은 은나라에서는 쓰지 않는 독특한 날짜 용어들을 사용했다. ‘생백(生霸)’, ‘사백(死霸)’ 따위다. 후한의 허신(許愼·58~149)이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들 용어의 개념을 180도 바꿔 설명해 놓는 바람에 일이 크게 꼬였다. 2000년 전 류흠은 ‘사백은 朔(초하루 삭)이고 생백은 望(보름 망·15일)’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후대에 허신이 ‘생백은 월 중에서 2일 혹은 3일(霸·月始生魄然也 承大月二日 承小月三日)’이라고 잘못 해석한 탓에 숱한 학자들이 미로를 헤매게 됐다. 

당나라로 접어들어 학승 일행(一行·683~727)은 ‘대연력(大衍曆)’을 지어 류흠 저 ‘삼통력(三統曆)’의 일부 오류를 규명했다. 그 뒤 송나라를 거치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보급 서주 왕실 청동기가 대거 발굴됐다. 이 청동기들에는 ‘생백’과 ‘사백’이 포함된 서주 당시 날짜를 나타내는 독특한 월상 용어 4개가 새겨져 있어 서주사를 밝히려는 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청나라 말기 1899년 갑골문이 발견된 후 라진옥(羅振玉), 동작빈(董作賓), 곽말약(郭沫若)과 함께 ‘갑골 4당’으로 불리는 중국학자 왕국유(王國維·1877~1927)는 사서삼경과 같은 여러 고문서에 등장하는 ‘방사백(旁死霸)’, ‘방생백(旁生霸)’, ‘기방사백(既旁死霸)’ 등의 용어가 청동기 상에 나오지 않는다며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무시했다. 오직 4단어만 서주 때 월상용어로 쓰였다면서 한 달을 넷으로 나눈 ‘4분1월(四分一月)’설을 주장했다. 

①초길(初吉·1~7·8일) ②기생백(既生霸·8·9~14·15일) ③기망(既望·15·16~23일) ④기사백(既死霸·23~그믐날)

동작빈이 잘못을 통렬히 비판했지만, 왕국유의 학설은 오랫동안 중국학계의 주류이론으로 인식돼 왔다. 미국의 중국학술계는 이를 표준으로 받아들여 서주사의 왕년을 연구했다. 데이비드 S 니비슨, 데이비드 W 판케니어, 에드워드 L 쇼네시가 대표적 학자들이다.

중국 정부는 수천년에 걸친 이 학술난제를 해결하고자 1996~2000년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했다. 이 과정에서 리학근(李學勤)을 필두로 한 중국학자 수백명이 왕국유의 4분1월설로는 답이 나오지 않자 고민 끝에 서주 청동기들에 나오는 4개 음력 월상용어의 정의를 바꿔버렸다.

①초길 1~10일 ②기생백 1~15일 ③기망 16~23일 ④기사백 16~그믐

네 용어는 본래 한 달 중 각각 어느 하루를 지칭한다. 그럼에도 범위를 크게 늘이고 용어는 잘못 해석한 셈이다. 2000년 리학근 등은 임의의 기준으로 대표 청동기 명문 60여개의 날짜를 나름대로 해석한 것을 바탕으로 서주 12왕의 왕년에 대해 발표했다.

1대 무왕(武王) BC1046~1043, 2대 성왕(成王) BC1042~1021, 3대 강왕(康王) BC1020~996, 4대 소왕(昭王) BC995~977, 5대 목왕(穆王) BC976~922, 6대 공왕(共王) BC922~900, 7대 의왕(懿王) BC899~892, 8대 효왕(孝王) BC892~886, 9대 이왕(夷王) BC885~878, 10대 려왕(厲王) BC877~841, 공화(共和) BC841~828, 11대 선왕(宣王) BC827~782, 12대 유왕(幽王) BC781~771

그러자 니비슨 교수와 쇼네시 교수는 물론, 중국에서도 학자들이 반발했다. 세계적으로 부정적 여론이 들끓었다. 이후 하상주단대공정에 참여한 학자들을 숙연케 만든 주공묘 서주갑골문, 제신홍도관(帝辛紅陶罐), 준궤(畯簋) 명문 같은 새로운 증거유물이 속속 발견됐다.

2009년 3월14일, 주무왕의 동생 주공(周公)의 묘에서 발굴된 서주갑골문 관련 좌담회가 베이징대학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풍시(馮時)는 “이번에 ‘방생백(旁生霸)’이 새로 발견됐다. 이것은 출토문헌 중 새로 보이는 월상명이다”, 리령(李零)은 “주공묘 갑골을 통해 역사문헌들에서 말하는 월상기일법이 실증됐다”고 했다. 하상주단대공정의 수석과학자이자 최고책임자인 리학근은 “여기에서 출토된 월상 단어는 기타 출토문헌과 마찬가지로 어느 고정된 하루를 나타낸다”고 운을 뗀 다음 “다만 서주 후기로 오면서 고정되지 않은 날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변형됐는데 이는 연구할 필요가 있는 문제”라고 짚었다. 

하상주단대공정 책임자들의 공개발언은 결국 서주에서 사용된 월상 단어들이 ‘초길, 기생백, 기망, 기사백’ 넷만이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잘못된 판단과 기준으로 결론 지어진 하상주단대공정 중의 서주 연대는 오류여서 전면 재검토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중국 정부 차원의 고백이다. 

잘못된 것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건만, 중국정부 차원의 수정된 결론은 현재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소장의 ‘오성취방과 제신점성도문에 의거한 무왕극상일(从五星聚房與帝辛占星陶文看武王克商日, 公元前1018年2月22日)’ 논문이 2014년 국제학술지 ‘은도학간(殷都學刊)’에 수위로 게재되며 주목받았다. 천문학과 출토문헌 등을 통해 서주사의 시작점, 곧 무왕의 건국원년이 BC1028임을 밝혀 천년의 학술현안에 기준점을 제시했다는데 의미가 있는 논문이다. 중국고교계열(中国高校系列) 전문학술지 ‘구역문화연구’ 2014년 3기에도 실렸다. 중국학계가 공식 인정한 것이다. 

‘서주사의 절대기년’은 ‘오성취방과 제신점성도문에 의거한 무왕극상일’의 후속편이다. 박 소장은 서주의 월상 명사 가운데 핵심어인 ‘霸(백)’에서 月(달 월)을 뺀 䨣(격)자를 “雨(비 우)와 革(가죽 혁)자로 이뤄져 ‘변형’을 뜻한다. 비에 가죽제품이 젖으면 가죽은 쉽게 변형되기 때문이다”로 최초로 정해했다. 이를 근간으로 서주의 여러 월상 명사의 고정 날짜를 복원했다. 나아가 고서들에 기록된 천문현상과 청동기들에 기록된 날짜들을 재해석, 서주 12왕년의 정확한 절대연대를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 

1대 무왕(武王) BC1028~1012, 2대 성왕(成王) BC1011~985, 3대 강왕(康王) BC984~971, 4대 소왕(昭王) BC970~951, 5대 목왕(穆王) BC950~926, 6대 공왕(共王) BC925~903, 7대 의왕(懿王) BC902~893, 8대 효왕(孝王) BC892~887, 9대 이왕(夷王) BC886~879, 10대 려왕(厲王) BC878~842, 공화(共和) BC841~828, 11대 선왕(宣王) BC827~782, 12대 유왕(幽王) BC781~771

천자국 서주의 기점은 무왕 원년인 BC1028, 종점은 유왕 말년인 BC771으로 간격은 257년이 된다. 제2대 성왕 원년 BC1011과 제3대 강왕 말년 BC971의 간격은 40년, 제1대 무왕 원년 BC1028과 제5대 목왕 말년 BC926의 사이는 102년이다. 이 연대는 중국 서주사와 관련해 가장 신뢰받는 고서인 고본 ‘죽서기년(竹書紀年)’의 기록 “自武王至幽王二百五十七年”, “成 康之際 天下安寧 刑措四十年不用”, “自周受命至穆王百年 非穆王壽百歲也”와 서로 일치한다. 제10대 려왕 재위 37년(BC878~842)은 사기 주본기의 기록 “三十四年 王益嚴…三年 厲王出奔於彘”와 서로 완전 일치한다.

박 소장은 또 주나라의 제후국인 노나라 1대왕 백금(伯禽)의 원년은 주나라 성왕 원년과 같은 BC1011년, ‘대우정’은 즉위년을 기준으로 목왕 23년(BC929)에 제작된 것 등을 밝혔다. 하상주단대공정에서 다룬 서주금문역보(西周金文曆譜)의 66개 문헌 혹은 기명 전체에 대한 날짜는 물론, 그 후 발굴된 신자료들의 정확한 연월일을 완벽하게 입증했다. 

박대종 소장은 “서주사 연대가 정확히 밝혀져야 그와 연관된 기자조선 연대도 정확히 드러나게 된다. 나아가 단군조선의 개국연도 또한 모호함을 벗고 밝혀지게 될 것이니 이 연구결과는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reap@newsis.com

출처 http://news.joins.com/article/21693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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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西周)의 10대 왕이었던 려왕(厲王·재위 기원전 877~841 / 생몰 기원전 ?~828)은 부패하고 사치를 일삼는 왕이었다. 그의 성은 희(姬)였고, 이름은 호(胡)였으며, 아버지인 이왕(夷王)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약 170년 전 건국된 주나라는 초기의 무왕과 성왕의 강력하고도 건전한 통치로 중국 대륙의 제후국들을 거느리면서 천하의 중심이 된 나라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전제왕정이 계속되다 보니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 진 상태였다.

◆ 주나라 10대 려왕, 일하기 싫어하고 주색잡기에만 골몰

려왕의 아버지였던 이왕만 하더라도 제(齊)나라의 애공(哀公)이 그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제후를 끓는 솥에 넣어 삶아 죽여 버릴 만큼 포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려왕은 이런 포악성은 없었지만 일하기를 싫어하는 군주였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그는 국인(國人·주나라의 제후)에게 나눠주어야 할 토지와 산림, 소택지 등의 관리권을 빼앗아 그 이익을 독점하여 자신의 사치생활에 탕진했다. 또한 그는 일체의 언로(言路)를 막고 전제정치를 일삼았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길에서도 눈짓만으로 생각을 나눌 만큼 숨 막히는 사회가 됐다. 누구라도 자기가 듣기 싫은 말을 하면 극형에 처했기에 제후들도 왕을 알현(謁見)하러 오지 않아 려왕은 점점 궁궐 속에서 혼자 지내며 술과 여색만을 가까이 했다. 뿐만 아니라 위(韋)나라의 무당을 궁중에까지 끌어들여 백성들을 감시하고 반대세력은 모두 잡아 죽이기까지 했다.

보다 못한 소목공(召穆公)이 직언을 했지만 려왕은 이를 가벼이 흘려들었다. 소목공은 “백성의 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강물을 막는 것만큼이나 위험합니다. 물을 다스리려면 필히 소통하는 물길이 있어야 물이 바다로 흘러갑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것도 이와 같아 백성들이 마음껏 말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라고 간언했지만 려왕은 귀담아 듣기는커녕 오히려 소목공을 축출해 버렸다.

◆ 민심 폭발, 폭동에 왕위에서 쫓겨나 평생 숨어 살아

민심은 부글부글 끓었고 마침내 폭동이 일어나서 려왕은 쫓겨나 도읍인 호경(鎬京·지금의 산시(陝西) 성 시안(西安) 부근)에서 도망쳐 체(彘·지금의 산시(山西) 성 곽주(霍州) 부근)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상 여왕은 자신이 직접 폭정을 휘둘렀다기보다는 영(榮)나라의 이공 (夷公)을 측근에 두어 경사(卿士) 벼슬을 주고 그에게 국정의 전반을 맡겨 버리고 자기는 그저 주색잡기에만 열중한 것이었다.

◆ 주 왕실 후손, 제상 협치, 꽃 피운 14년 공화정치

려왕이 도망친 직후 사람들이 왕궁에 갔지만 국왕을 찾을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사람들이 후환을 없애려 왕자를 찾고 있을 때 소목공이 나타나서 대신들과 상의한 후 잠정적으로 천자를 대신할 권한을 직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 때가 기원전 841년이었는데 소목공은 왕이 없는 상태에서 주(周)나라의 정공(定公) 및 여러 재상들과 공동으로 화합해서 국가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중국 역사는 이 시기를 공화(共和) 또는 주소공화(周召共和)라 부른다. 핵심이 되었던 두 사람 중 정공은 주나라 왕실의 일원으로 상징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소목공은 개혁세력의 대표로 인식되었다. 두 사람의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었지만 혼란에 빠진 국가의 안정과 사태수습을 위해 언제나 협의하면서 정사를 이끌어 나갔다.

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지만 죽서기년(竹書紀年·하은주부터 위나라 양왕까지의 편년체 중국 역사서)과 여씨춘추(呂氏春秋·진나라 재상 여불위가 편찬한 역사서)에는 이 내용이 약간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공(共)나라의 제후였던 화(和)가 천자를 대신해서 정치를 하였으므로 공화라는 말이 생겼다’라고 하고 있기도 하다.

◆ 최고 권력자 없었지만 협치로 정국 수습

아무튼 이 시기 원톱 시스템으로서의 천자는 사라지고 여러 세력들이 힘을 합하여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서로 견제하면서 국가를 함께 경영해 나갔다. 이 시기는 기원전 841년부터 기원전 828년까지 14년 동안 지속되다가 려왕이 유폐지에서 죽자 려왕의 아들인 정(靜)이 선왕(宣王)으로 즉위하면서 막을 내리고 주나라의 왕실은 겨우 회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주나라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후였고, 그 이후 주나라의 국세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양에서 공화제(republic)가 도입된 뒤 일본의 란가쿠(蘭學)시대에 이 단어의 번역에 골몰하던 일본학자들은 중국고전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내어 이를 ‘공화제’라고 번역해서 지금까지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 전역에서 쓰는 단어가 됐다. ,republic은 개인적인 것에 대비해 공공의 사물이라는 res publica에서 나온 말이다.

◆ 왕의 무능, 측근의 국정농간 3000년 전의 역사 데자뷰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말은 자주 하고 있지만 지금부터 무려 3000년 전 중국에서 있었던 일과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은 단순히 데자뷰(deja vu)라는 말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유사한 점이 많다. 왕의 정치적 무능과 외부로부터 굴러들어온 1인에 의한 국정농간, 그리고 소통의 부재와 직언을 할 수 있는 신하의 부재 등이 그렇다. 데자뷰란 최초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이미 보았다’는 의미다. 영어로는 ‘already seen’에 해당한다.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이제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어떤 식으로 결정될지는 결론이 나야 알 수 있다. 하지만 당분간 우리는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된 상황을 맞이해야 한다.

◆ 협치, 공화 잘 하면 ‘최고지도자 부재 시기’ 더 평가할 수도
이럴 때일수록 기원전 9세기 주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면서, 서로가 힘을 합쳐(共) 어우러지는(和) 결론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뒤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얘기하면서 공화(共和)의 의미를 다시 되새길 수 있길 기대한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보다 역사는 협치를 더 가치 있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치권이 깨닫기 바란다.

출처 http://china.donga.com/List/3/all/43/8005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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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주나라 여왕 때 왕을 쫓아내고, 소공과 주공 두 재상이 협의해서 정사를 봤다. 쫓겨난 왕이 죽을 때까지 14년간 이어진 이 시기의 정치를 ‘공화’(共和)라 했다고 사마천은 <사기>에 기록했다. 물론 이와 달리 ‘공백화’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쓴 사서도 여럿 있다.이 공화라는 단어를 Republic의 번역어로 처음 쓴 것은 일본인들이다. 19세기 지리학자인 미쓰쿠리 쇼고가 ‘Republic=군주가 없는 나라’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유학자 오쓰키 반케이한테 사기에 기록된 이야기를 설명 듣고 ‘공화정치’라고 번역했다고 한다.대만 독립운동세력은 1895년 독립 대만의 국호를 대만민주국이라 하고, 영문으로 ‘Republic of Taiwan’이라고 썼다. 우리도 제헌헌법 때부터 나라의 정체를 ‘민주공화국’이라 하고, 국호에 리퍼블릭을 쓴다. 하지만 헌법학자들은 공화국을 ‘왕정이 아니다’라는 의미 정도로만 해석한다. 진보정치세력도 ‘공화주의’에 큰 의미를 둔 적이 없다.유승민 의원이 지난해 7월8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사퇴하면서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하더니, 지난달 31일 성균관대 강연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화주의 실현’을 강조했다. 그의 설명대로 공화주의는 “공공선을 담보하는 법의 지배 안에서, 시민들이 다른 시민들에게 예속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며, 시민적 덕성을 실천하는 정치 질서”다.서양 정치사에서 공화제는 군주제에 대한 저항의 논리였다. 유 의원이 이 나라를 ‘선거로 왕을 뽑는 체제’라고 보고 있다면 의미심장하다. 새누리당에 복당한 그가 단지 박근혜 대통령과 차별화를 위해 공화주의를 수사로만 사용하고 말 것인지, ‘공화주의 운동’을 벌일지 궁금하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48965.html#csidxe6db1ae0d78b5c4ac8e7b2b2ca1c7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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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체(國體)이면서도 그 말뜻을 두고 각각의 해석이 다른 게 '공화'다.

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공화주의를 지향해야 할 이념으로 규정했지만 공화주의의 의미는 여전히 다양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공화를 표방하고 유신독재를 낳은 과거 민주공화당도 공화를 내세웠지만, 공화주의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아 이를 논외로 함에도 말이다.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공화가 뭔데? 

우리나라에 공화주의를 진지하게 소개한 이는 홍세화 현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인 듯하다. 
프랑스 거주 뒤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나눈다' 책을 썼던 그는 공화주의의 나라, 공화국을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익을 목표로 하는 사회로서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국가"로 정의한 바 있다. 

공화주의의 연관 개념으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있는데,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라는 두 가치의 결합"이라고 밝혔다. 민주주의를 이루는 한 구성 요소가 공화주의라는 설명이다. 

반면 프랑스의 석학 레지스 드브레는 "모든 공화정은 민주주의적이지만 모든 민주주의가 반드시 공화주의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공화주의의 한 구성 요소라는 것이다.

◇ 분분한 '공화주의', 유승민에겐 '혁명'의 이념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공동의 법과 이익에 의해 결속된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공화국"이라고 정의하면서도 "공화주의는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되어 왔다"고 말했다.  

이런 다양한 해석들 속에 현실 정치인 유승민 의원이 나름의 정의를 추가했다. 유 의원은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화주의 철학에 기초한 보수혁명을 해야 희망을 만들 수 있다"고 쓰며 전날 성균관대에서 했던 강의 영상을 첨부했다. 강의에서 그는 공화주의에 대해 "공공선을 담보하는 법의 지배 안에서 시민들이 다른 시민들에게 예속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며 시민적 덕성을 실천하는 정치 질서"라고 정의했다.  또 "투표에서 이기면 멋대로 다 하는 민주주의를 벗어나 공화주의로 가야 한다"면서 두 이념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기도 했다. 



◇ 왕 축출 뒤 찾아온 '공화', 유승민의 공화는?

이렇듯 의미가 혼돈되면 그 연원을 떠올리는 법이다. 공화주의나 공화국은 라틴어 'res publica'에서 유래했는데 '공적인 일', '여럿의 화합'을 뜻한다.  이를 동양에서 '공화'로 번역한 건 근대 일본학자들로, 이들은 중국 주나라 여왕(厲王)이 쫓겨난 뒤 찾아온 제후들의 공동집권 시기 연호를 따왔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여왕은 포악하고 교만했으며 자신을 비판하는 백성들을 탄압하고 목숨을 빼앗았다. 강요된 침묵에 참다못한 제후와 백성들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여왕을 축출했고 주정공(周定公)과 소목공(召穆公)이 천자(天子)를 대신해 정치를 함께 했다. 그때의 연호 '공화'가 바로 현대의 공화주의로 이어진 것이다.

집권여당으로부터 탄압받은 유승민 의원이 이러한 유래를 떠올렸는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공화주의에 보수혁명을 연관한 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원문보기: 
http://www.nocutnews.co.kr/news/4602146#csidx8dd9255a0000735928e31d8bf2fd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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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재해와 가렴주구가 들끓으면 여지 없이 민초들은 지도자를 찾고 깃발을 들어 항거했다. 비록 실패할지언정 비굴하게 살지 않았던 민란의 역사, 파란만장했던 이야기를 담아보려 한다. 비록 중국 민란이지만 우리의 현실이, 미래가 암울하니 혹시나 '성공하는 민란'의 힌트 하나라도 된다면 기쁘겠다. 타임머신을 타고 갈 수 없는 역사라 당시 '인민'의 고통과 함께 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세월호'와 '메르스'로 상징된 나라의 국민과 '대동소이'라는 심정이다. '민란'의 깃발을 높이 들면 '인민은 춤추게 된다'는 역사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전달하고 싶다. - 기자 말

200년 도읍지 호경(鎬京)의 새벽이 갑자기 수상하다. 남정네들의 실루엣이 햇살을 머금자 점점 정체가 확연해지고 적막하던 거리는 순간 거친 호흡으로 뒤범벅이다. 제각각 몽둥이와 농기구, 삽이나 식칼을 들고 나선 이들은 별다른 신호도 없고 따로 명령을 내리는 사람도 없지만 일사불란, 모두 목숨을 건 모습이다. 

돼지 잡듯 개 패듯왕성으로 돌진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사면의 열기는 하늘을 찌르고 팔방마다 칼날이 춤추는 가운데 처절한 고함은 끊임없이 웅장하게 하늘을 향해 울려퍼지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기원전 841년.


"희호를 죽이자! 놈을죽여라!" 

희호(姬胡)는 누군가? 기원전 1046년 주무왕(周武王)이 강태공과 함께 군사를일으켜 상주왕(商紂王)을 토벌한 후 중원의 패자로 자리를 잡고, 소위 역사에서 '잘 나가던' 주나라의 10번째 군주 주려왕(周厲王)의 성과 이름이다. 그의 조상은 상나라 서쪽 2천 리나 떨어진 주원(周原, 섬서 기산岐山 현)에서 농업으로 생산성을 끊임없이 혁신하며 힘을 기른 부족으로 성(姓)을 희라 했다. 

중국 고대 신화에 출몰하는 삼황오제 중 황제(黄帝)의 성이며 그의 후손이 주나라를 창건했다. 황제는 지금의 서안 서쪽 4백 리 부근의 희수(姬水)에서 오래 거주했다고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는 기록한다. 호경은 주나라의 도읍으로지금의 서안(西安) 서쪽 일대이다.

주나라는 패권을 잡자고심 끝에 중원 천하를 분봉(分封)했다. 공전(公田)을 중심에 둔 정전제(井田制)를 전격 채용했으며 토지와 경작할 인민들을 통치하도록 예약(禮樂)을 통일하고 왕족, 공신, 귀족에게 크고 작은 작위(爵位)를 내렸다. 고대에 다리가 셋 달린 술잔으로 다양한 문양을 새겨 신분을 나타내던 작(爵)은 통치계급 내부의 등급 서열을 나누는 법률제도의 규정을 상징하듯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으로 하사됐다. 장자인 대종의 세습과 소종의 분화로상징되는 종법(宗法)제도도 왕을 본받아 세습했다.

<사기> '주본기(周本紀)'에 따르면 불멸의 '씨족국가'를 염원한 주공(周公)의 창조적이며 주도 면밀한 설계를 칭찬하고 있다. 주공은 강태공, 소공과 함께 주 건국의 일등공신으로 형인 무왕이 일찍 죽자 어린 성왕을 섭정하며 천 년 왕업의 기틀을 쌓았다. 주공이 하사 받은 봉토인 노(鲁)나라 출신 공자(孔子)는 평생 우상이자 이상적인 정치인으로 숭배했다.


진나라의 뛰어난 상인이자 정치가인 여불위(呂不韋)가 자본의 힘으로 편찬한 <여씨춘추呂氏春秋>를 봐도 "주나라 봉토는 4백여 곳이고 아래 복종하는 나라는 8백여 곳에 이른다"고 했고 춘추시대 8개 나라의 역사를 모아놓은 역사 서적인 <국어國語> '주어(周語)' 편에 "(주나라) 선왕에게 천하가 있었는데 사방천 리 이내에 전복(甸服, 직접 왕이 관리하는 영토)을 세우고 그바깥 지역은 나누어 작위를 주고 각각 녕우(寧宇, 안정적인 구역이자 지정된 영토)를 세웠다"고 했다.

공자의 이상 국가 주나라도 세월이 흘렀던가? 2백여 년이 흘러 중원의 패자, 대왕을 죽이자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 것은 아무리 봐도 좀 심한 과장이 아닐까? 농기구 등으로 맨손으로 폭동을 일으킨사람들은 결국 왕을 몰아냈다. 역사에서는 이를 '국인(國人)의 반란'이라 부른다. 

나라 국(國)은 허신(許愼)의 한자 사전 <설문說文>에 따르면 곧 방(邦)이라 주석하는데 고대에는 봉국(封國) 또는 영역(领域)을 말했다. 성역은 흙으로 쌓아 만들었으며 사방을 꽉 둘러싼 담장인 성城과 담장 안의 공간인 역域으로 나눈다. 역(域)은 <설문>에 곧 역(或)이라 했으며, 영토의 경계를 의미하는 방형으로 둘러싸인 곳이 나라 국國이다. 그래서 성곽 안에 사는 사람을 국인, 성곽밖에 사는 사람은 야인(野人)이라 구분해 불렀다. 

'창소욕언' VS '치약망문' 

주나라는 점차 사회모순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국고는 공전과 제후국의 공물이 원천이었으나 점점 사전 개발이 늘면서 공전의 수익도 줄고 제후의 수입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봉록이 줄자 관리들도 갈수록 부익부 빈익빈에 시달리며 하향 계급화했고 농업이나 수공업, 상업으로 연명하던 국인들은 성 안과 밖의 산림이나 강가, 연못을 찾아 새로운 생산물을 수확해 경제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려왕은 제후국 영나라 군주인 영이공(榮夷公)을 등용해 국인들의 소득원천이던 산림천택(山林川澤)을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일종의 국유화 정책인 '전리(專利)' 제도를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서민들의 경제기반을 강탈하기 위한 술수이자 상위 고관의 봉록과뇌물을 늘리기 위한 '영공노믹스(榮公)nomics'인 셈이다.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긴 국인들은 사방에서 항의하고 원성이 잦았으며 갈수록 사회적 불만이 팽배해졌다. 양심적인 관리들도 '전리' 제도를비판했으나 주려왕은 나랏일에 대한 토론금지, 위반하는 자는 살육하는 더욱 고압적인 정책으로 밀어붙였다. 

땔감 마련이나 수렵은 물론 강이나 연못에서 물고기를 잡는 행위를 전면 금지했으며 자원이 되는 모든 자연을 봉쇄했다. 주나라 개국공신으로 세습해 온 대신 가문의 소공은 참다못해 "백성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죽을 지경입니다"고 간언했지만 주려왕은 오히려 불만의 소리를 감시하기위해 첩자를 거리 곳곳에 배치해 말을 섞거나 심지어 눈빛만 교환해도 연행해 혹독한 고문과 구금, 사형으로 다스렸다. 나중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일벌백계 한답시고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신하들 앞에서 모든 비방을 잠재웠다고 자랑하고 다녔으니 독재치고는 야비했다. 


이렇듯 강압적인 방법으로 서민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입을 막는 것은 흐르는 강을 틀어막는 것과 같습니다. 강을 막던 제방이 일단 터지면 멸정지재滅顶之災의 엄청난재난이 생길 것은 자명합니다. 사람의 입을 막으면 다가올 위험은 강물보다 더 치명적입니다. 치수治水는 채용소도采用疏導이니 막힌 수로를 통하게 하는 것이고, 치민治民은 창소욕언暢所欲言이니 천하의 모든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누구나 하게 하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모두 나타나게 되니 좋은 일은 격려하고 나쁜 일은 대비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걱정하는 바를 입 밖으로낼 때는 여러 번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어렵게 하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입을 막는다면 나라가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소공 소백호召伯虎는 군림하지 않으며 물 흐르듯 민심이 소통하는 나라의 지도자를 갈구했으나 주려왕은 '치약망문置若罔聞'했다. 쉽게 보면 '못 들은 체하다' 정도일지 모르나 그보다는 훨씬 강렬하다. 직언이나 비평, 하소연, 권고나항의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망국의 독재자에게 흔한 증상일지도 모르겠다. 

주나라 수도 호경의 국인들이 들고 일어나 왕성을 쳐부수고 돌파해 나갔다. 주려왕은 폭도들을 진압하라 명령했으나 성을 지키던 관리들은 함성에 놀라 이미 도망갔다. 결국, 왕은 황하를 넘어 대부(大夫)가 다스리는 작은 영지인 체읍彘邑(산서 곽주霍州)으로 도망갔다. '체'는 돼지라는 뜻으로 '국인의 민란'을 다르게 부르면, 체 나라로 왕을 쫓아냈다고 '체지란彘之乱'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화 원년은 역사의 실마리

왕을 몰아낸 반란 주동자들은 서둘러 주려왕의 아들 태자 정静을 죽여 근원의 싹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소공의 집을 포위했다. 소공은 왕에게 간언했던 사실을 알리면서도 군주의 신하로서 해야 할 도리를 읍소했다. 소공은 자기 아들을 태자를 대신해 내주었고 태자는 어렵사리 도망해 목숨을 부지했다.

왕과 태자가 사라지자 소공과 주 나라를 설계한 주공의 후예인 주정공(周定公)과 함께 두 사람이 주 나라의 정무와 행정을 주재하는 공화정을 펼치는데 이를 '주소공화周召共和'라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재상두 사람이 왕을 대신해 국가를 경영한 기간은 14년이었다. 공화 14년, 주려왕이 14년만에 죽자 도망갔던 태자를 불러 주선왕(宣王)에 옹립했다. 재상의 정치를 편 두 제후는 나름대로 내치와 외교국방에 힘 썼으나 북방민족 견융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한 여름의 멍멍이 신세로 전락한다. 

기원전 841년, 공화 원년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연도이다. 이때부터 역사서의 편년체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130편에 이르는 <사기>의 '본기(本紀)' 및 '세가(世家)' 편 곳곳에 연대의 표시와 함께 '주려왕이 체로 도망(周厲王奔于彘)'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사마천은 '공화' 원년을기준으로 역사의 흐트러진 시간대를 맞춘 것이다. 
주선왕은 재위 39년 견융정벌에 나섰으나 대패했으며 재위 46년 만에 사망하고 문제의 인물인 주유왕幽王이 승계했다. 나라가 망하는 징조는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지만 가장 불명예는여자 때문에 망했다는 홍안화수(紅颜祸水)의 오명이 아닐까? 경국지색과 놀다가 망했다는 치욕은 망국의 군주가 각오해야 할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후대의 왕조는 멸망 주체로서의 명분을 잘 포장하기 위해 이 잡듯 패악을찾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매희(妹喜), 상나라 주왕과 달기(妲己)에 이어 불쌍한 '마지막' 군주, 서주 시대를 마감한 주유왕과 포사(褒姒)다. 


포사는 유왕의 총애를 받자 태자를 폐하고 자신이 낳은 아들을 태자로삼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황후였던 신후(申后)는 태자를 데리고 급히 외가로 떠났다. 신후의 아버지는 주변국과 연합하고멀리 견융족(犬戎族)을 끌어들여 수도 호경을 침공했다. 웃지 않는 전술로 유왕을 꼬드기던 포사로 인해 실제로 적이 침공해 왔을 때 봉화가 올라도 지원군이 오지 않았다는 '봉화희제후(烽火戲諸侯)'는 '정치적 교훈'으로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서주가 멸망하자 후대의 사가들은 포사에게 100% 책임을 묻기 위한공작에 들어간 듯 보인다. 거의 7백 년이나 지난 후 기록된 <사기>에 갑자기 신화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나라의 마지막 군주 걸왕 말년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두 마리 용은 포사의 고향 '포나라의 두 왕'이라고 선언하고 타액을 뱉어놓고 사라지자 궤 속에 밀봉해 마치 국새처럼 왕조를 이어 승계한다.

상나라도 지나고 주나라까지 보관됐던 궤 속에서 한줄기 빛이나와 천년 만에 빛을 발한다. 국인민란으로 쫓겨간 군주 주려왕 앞에 갑자기 등장하더니 실수로 용의 타액이 쏟아지고 어느새 뱀으로 변해 도망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소녀의 은밀한 몸 속으로 사라졌는데 태기가 생기고 40년만에 여자 아이가 태어났고 강물에 버린다. 

스토리라인이 어딘가 익숙해 보이지 않는가? 천년 전 하나라 망국의 교훈, 백성에서 쫓겨간 군주가 등장하고 용의 정기를 받았으나 징그럽고 교활한 뱀의 상징처럼 이상한 결말이 날 아이가 태어난다. 이 아이를 포나라 출신의 포사와 연결하면 작가적 상상력은 앞뒤 아귀가 맞는다. 이제 포사와 유왕을 연결해 줄 실마리만 찾으면 된다.

'염호기복檿弧箕服'이란 참어讖語가 노래로 유행하기 시작한다.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화살을 등에 지는 통이란 말인데 활과 화살이 잘 맞지 않고 반만 들어차는 모양새를 뜻하는것으로 주나라의 멸망을 예언한다. 어느 시골 활 장수 부부가 사정도 모른 채 도성에 들어왔다가 체포돼 부인은 사형 당하고 남편은 가까스로 도망친 후 강 가에서 비관 자살하려다가 강물에 버려진 '문제의 아이'와 조우한다. 

갓난 애를 기를 엄두가 나지 않자 포나라로 도주해 낯선 사람에게 맡긴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용모가 아주 예쁜 아가씨 포사로 성장한다. 마침 포나라는 주 왕실에 죄를 짓게 되고 면죄부로 포사를 바치게 된다. 주유왕과 포사의 극적 상봉이다. 

참어의 등장과 망국의 논리는 평범한 작가의 일반적 시나리오다. 만화 같은 신화를 기술하는 방식으로 후세의 정치인들은 작가들을 고용해 '공자님말씀'같은 교훈을 남기고 싶었다. 포사는 억울할지 몰라도'용의 딸'이 될 정도로 미모는 남았으니 서운할 일은 아니다.

국인을 현대 세계로 치환하면 시민이자 국민이다. 28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사회 모순의 심화, 부의 불균등 분배에 따른 불만으로 사회적 갈등과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이 낯설지 않다. <사기>가 축약과 상징으로 기록한 기원전 민란은 장편소설 같은 진면목을 파악하는 데 미흡하지만 대다수 국민의 꿈과 희망을 열어주지 못하고 억압하고 소통을 가로막고 언론조차 통제한다면 결국 민란에 버금가는 돌파구, 그 교훈을 말해주고 있다. 기원전 841년 국인이 보여주고 있고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226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