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70134.html
등록 : 2014.12.21 21:40수정 : 2014.12.22 10:41
[한홍구 교수 특별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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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4월15일 청와대에서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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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 결정을 내렸다. 10여일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은 비행기가 아직 이륙하기 전에 활주로에 나갔다가 돌아온 것이라면, 통합진보당의 해산은 성숙한 민주사회를 향하여 한참을 날아가고 있던 한국 민주주의가 회항을 한 것이다. 그것도 박정희의 유신시대를 넘어 1958년 2월25일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던 때로 가버린 느낌이다. 2012년 12월4일 대통령 후보 텔레비전(TV) 토론회에서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후보가 충성 혈서를 써가며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기 마사오를 들먹이며 친일과 독재의 후예인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려 나왔다고 했을 때 통합진보당의 해산은 이미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유신정권 7년 중 4년 반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있으며, 숱한 조작간첩 사건을 만들어낸 김기춘을 일찌감치 비서실장으로 등용하면서 통합진보당의 슬픈 운명이 앞당겨졌다.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위헌정당 심판에 대한 판결을 연내에 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통합진보당 해산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긴 했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헌법재판소는 민주시민들의 예측을 뛰어넘었다. 우선 택일의 정치학이다. 우리는 예로부터 이사는 언제 하고 장은 어느 날 담그고 하는 식으로 날짜를 민감하게 따졌다. 하고많은 날 중에서 왜 하필 12월19일이었을까? 바로 2년 전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날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위헌정당 해산 심판을 청구한 것은 이른바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8월11일 서울고등법원은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서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이른바 아르오(RO)에 대해서도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의 핵심적인 두 가지 쟁점에서 모두 통합진보당 쪽에 유리한 판결이 나온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2015년 1월 중에 있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헌법재판소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기 전에 부랴부랴 서둘러 박근혜의 당선 2주년에 이 놀라운 선물을 바친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의견이 인용 8, 기각 1로 갈렸다는 점이다. 보수적인 법조계에서조차 결과에 대해 놀랐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헌법재판관들의 통합진보당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한 것이라면 8:1이 아니라 9:0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엄격한 증거에 의거하여 ‘법률가의 양심’에 따라 원내 제3당의 해산 문제를 다루는 판결이라면, 정부가 무리하게 해산심판을 청구하고 수구언론이 아무리 떠들어댄다 한들 8:1이나 9:0으로 기각 결정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이번 헌재의 결정은 1987년 6월항쟁으로 탄생한, 다시 말해 민주화운동의 산물인 헌법재판소가 민주주의를 목 졸라 죽인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만든 헌법재판소가 민주주의의 본질적 가치를 짓밟아 버렸다. 좀도둑이 들끓어 불안해서 야구방망이 하나 장만했더니 강도가 들어 그 야구방망이로 우리 식구를 쳐 죽인 꼴이다. 게다가 정당을 보호해야 할 경비원이 강도와 합세했으니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독재정권때 대법원 망가져
헌법재판소가 탄생
토지공개념 무력화 등
결정으로 비난 자초
민주주의 발전·기본권 보호
애초 기대에서 벗어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른 데 대해서는 박근혜 정권이나 헌법재판소, 그리고 수구언론만을 탓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가 치명상을 입었는데 대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지 않는 것이 꼭 추운 날씨 탓일까?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처음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터졌을 때 손 놓고 보고만 있었던 것은 그동안 통합진보당이 보인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보정치를 향한 대중들의 꿈을 더 이상 담을 수 없게 된 데 대하여 통합진보당 자신이 가장 통렬하고 엄중한 자기비판을 해야 하겠지만, 비단 통합진보당만이 아니다. 좁게는 민주노동당 이후 진보정당운동에 참여했던 정치세력, 크게는 진보진영이라 부르든, 민주개혁진영이라 부르든 진영 차원에서 심각한 반성을 하지 않는다면 진보정치의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10석의 의석을 얻은 작은 승리에 대해 진보진영은 너무 교만했다. 2007년 대선 패배 후 ‘종북’이란 써서는 안 될 흉한 말을 만들어 내며 갈가리 찢어져 버린 것은 민주노동당 자신이었다. 간신히 2012년 통합진보당으로 다시 모였지만, 몇 달 못 가 부정선거 논란으로 당은 또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당이 분열에 빠질 때마다 당 밖의 관심 있는 대중들은 환멸을 더해갈 뿐이었다. 옛 민주당 계열조차 지리멸렬한 상황이니 정말 바닥까지 내려가 처절한 자기반성을 통해 진보의 재구성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지만 집안 단속, 문단속 안 한 우리 자신의 잘못이 살인강도의 범죄행위에 면죄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역사의 이름으로 헌법재판소와 현 정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헌법에 위헌정당 해산심판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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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19일 오전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 사건 선고를 위해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입장해 자리에 앉아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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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언론들이 지적했듯이 통합진보당에 앞서 진보당이 1958년 ‘헌정사상 처음’으로 해산당했다. 제헌헌법에 정당해산에 대한 규정이 따로 없어서였을까, 대한민국 정부의 전복을 획책했다는 남로당은 해산당하지 않았다. 북으로 간 남로당원들은 북로당과 남로당이 합당했다고 하지만, 남쪽에서 남로당은 그냥 사라졌을 뿐이다. 진보당은 탄생도 죽음도 모두 기구했다. 이런 운명을 예견해서였을까, 조봉암이 처음부터 독자적인 진보정당을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보수 야당인 민주당이 조봉암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진보당을 만들었다. 조봉암은 1920년대 조선공산당의 주역이었으나 해방 후 전향하여 이승만 밑에서 초대 농림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이끌었다. 1956년 대통령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은 보수 야당 민주당의 후보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돌풍을 일으키던 신익희가 선거가 한창 진행 중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이승만의 대항마로 급부상했다. 민주당은 조봉암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반공투사 이승만을 지지한다고 했지만,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마음의 대중들 다수는 자연스럽게 조봉암을 지지했다.
1956년 대통령선거는 “조봉암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유명한 말이 나온 선거였다. 자유당 정권은 대대적인 부정을 자행하여 이승만을 당선시켰다. ‘평화통일’과 ‘피해 대중을 위한 정치’를 내세운 조봉암의 폭발적인 인기에 놀란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이 다시는 선거에 나올 수 없도록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1958년 1월11일 오후부터 진보당 간부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한 이승만 정권의 공보실은 1월13일 조봉암을 체포했고, 진보당 사건 첫 공판(3월13일)이 열리기도 전인 2월25일 진보당의 등록을 ‘군정법령 제55호’에 의거하여 취소하고 앞으로 “진보당의 이름으로 행하는 여하한 활동도 불법으로 인정하며 의법처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미군정 당시에 제정된 ‘군정법령 제55호’에는 정당의 등록에 관한 규정만 있을 뿐, 정당의 해산이나 등록 취소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즉 이승만 정권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행정처분’으로 진보당을 해산한 것이다.
4월 혁명 후 제2공화국 헌법을 만들면서 정당해산에 관한 규정이 처음으로 들어간 것은 수구세력이나 헌법재판관 나으리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방어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정당을 함부로 해산할 수 없도록 하는 보호장치로서 마련된 것이다. 당시 헌법개정안 기초위원장 정헌주는 국회에서 개헌안 표결을 앞두고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크레인으로 끌고 간 만행을 상기하면서 “이 자리는 아무런 총검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크레인’을 몰고 오는 군대의 발자취 소리도 들리지를 않습니다. (…) 이러한 자유로운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우리의 젊은 학도들이 많은 피를 흘렸던 것입니다”라고 감격해했다. 제2공화국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내각책임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정당의 역할이 각별히 중요했다. 정헌주에 따르면 “내각책임제 정치라는 것은 정당에 의한 정당의 정치를 의미하기 때문에 관용으로서 서로 타협할 수 있는 정당이 존립”해야만 했기에 정당에 대한 보호는 일반적인 집회 결사의 자유를 넘어 “정당의 자유를 좀 더 효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제2공화국에서는 정당이 헌법기구로 격상되어 헌법 제13조에 “정당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을 먼저 선언한 뒤, “단,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정부가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소추하고 헌법재판소가 판결로써 그 정당의 해산을 명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정헌주는 이를 “우리가 경험한 바와 같이 진보당 사건에 있어서와 같이 정부의 일방적인 해산 처분에 의해 가지고 이것을 해산”할 수 있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제2공화국에서는 법관들뿐 아니라 재야 변호사들의 대다수가 포함된 서울변호사회도 헌법재판소의 설치를 반대했기 때문에 헌법재판소가 실제로 구성되지는 못했다.
유신 이전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위헌법률 심판권이 대법원에 귀속되었다. 당시 사법부는 정의와 인권의 최후의 보루라는 위상을 구현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71년 6월22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국가배상법 제2조가 군인이나 군속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제한한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동아일보>가 우리 헌정사상 획기적인 판결이라 찬양했고, <조선일보>도 사법부의 독립성을 대외적으로 표방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한 이 판결은 불행하게도 ‘사법파동’을 불러왔다. 박정희가 사법부에 대해 길길이 화를 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공안검사들은 현직 법관 2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증인심문을 위해 제주도에 가면서, 피고인의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혐의로 1971년 7월28일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 탓만 할 순 없어
통합진보당과 진보진영이
통렬하게 반성하지 않으면
미래는 참담할 뿐
1972년 유신쿠데타로 사법부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만들면서 국가배상법에 대해 위헌 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 9명을 모두 재임용에서 탈락시켜 버렸고, 이들 외에 일반 법관 41명도 옷을 벗겨 버렸다. 박정희는 위헌 판결이 난 국가배상법의 군인이나 군속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제한하는 조항을 아예 유신헌법에 넣어 버렸다. 이 찬란한 조항은 1987년의 개헌에도 살아남아 ‘군대 가서 죽으면 개 값만도 못하다’라는 속설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박정희는 대법원의 위헌법률심판권을 빼앗아 헌법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그곳에 넘겨버렸다. 헌법위원회는 위헌법률심사권, 고위공무원 탄핵심판권, 위헌정당해산결정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가졌지만, 유신정권 때도, 전두환 정권 때도 단 한번도 그 권한을 써본 적이 없다. 유신 때는 헌법위원회의 구성을 언론이 제법 크게 보도했지만, 1981년에는 사진도 없이 단신으로 보도했을 뿐이다.
군사정권 시기는 참으로 헌법이 죽어 있던 시기였다. 그나마 위안은 당시의 대법원에는 지금 헌법재판소에는 딱 한명밖에 없는 올곧은 법관이 그래도 이일규와 이회창 두 명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의 소수의견은 어둠 속의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이일규는 1985년 5월 박세경 변호사의 계엄포고령 위반사건 상고심에서 구 계엄법 제23조 2항은 위헌이라는 소수의견을 내면서 “다수의견(합헌론)이 헌법정신에 눈뜨지 못하고 헌법적 감각이 무딘 점을 통탄할 따름이다”라고 동료 대법원 판사들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민주화의 자식에서 기득권 수호의 첨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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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한국진보연대 주최로 열린 ‘민주수호 국민대회’에서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결정으로 공중분해된 통합진보당 이정희 전 대표 등의 참가자들이 ‘근조 민주주의’가 적힌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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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탄생한 것은 어쩌면 유신과 전두환 정권 시기에 대법원이 너무나 망가진 탓인지 모른다. 위헌법률 심판이나 위헌정당 해산심판의 권한을 사법부에 두느냐, 별도의 헌법재판소를 만드느냐에 관한 깊이 있는 논의는 별로 이뤄지지 않았다. 김철수나 허영같이 독일에서 공부한 헌법학자들이 독일식 연방헌법재판소를 모델로 한 헌법재판소 설치를 강력히 주장했고,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탓에 대법원에 위헌법률심판권이 귀속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김철수가 헌법재판소를 과거 박정희에 의해 대법원 판사 임용에서 탈락한 분들 중심으로 하자는 제안을 내놓았을 뿐이다.
1988년 9월 설립된 헌법재판소에는 첫해 39건의 사건이 접수된 데 그쳤지만, 시간이 흐르며 접수되는 사건이 많아져 현재는 연간 약 1500건 이상의 사건이 접수되는 등 20년간 약 2만6000건의 사건이 접수되었다. 모든 것이 헌법으로 통하는 세상이 온 것이다. 헌법재판소에 접수된 약 2만6000건의 사건 가운데 위헌 결정이 난 것만 해도 760건이 넘는다. 헌법재판소가 위헌법률 심판 등의 권한을 행사하면서 소수자 보호 등 긍정적인 역할을 일정하게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과연 ‘민주화의 자식’으로, ‘법치국가의 꽃’으로 기능하고 있을까?
1998년 김대중 정권이 출범하고 2003년 노무현 정권이 연이어 탄생하자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서의 사법부와 헌법재판소가 정치권력을 잃어버린 기득권 세력이 기댈 언덕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히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역풍으로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의회의 단독 과반수를 획득하고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어, 입법·사법·행정 등 국가의 3부에서 입법부와 행정부 등 선출되는 권력이 모두 민주개혁 진영에 넘어가게 되자 사법권력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대통령 자리도 빼앗겨, 의회에 대한 지배권도 상실해, 방송도 빼앗긴데다가, 종이 신문의 영향력도 급격히 떨어진 상황에서 믿을 것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 사법부와 헌법재판소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법부의 사정도 변화하였다. 민주화와 더불어 사법개혁의 소리도 높아졌고 과거 독재정권 시절의 용공조작 사건이나 유신시대의 긴급조치 사건에 대한 과거청산의 요구도 거세졌다. 지난 수십년간 굳어져온 법관 서열 대신 여성이나 지방대 출신을 우대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명문고-서울법대 출신의 엘리트 법관들의 박탈감은 높아져 갔다. 노동운동 했던 사람들이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 방향을 전환하여 늦깎이로 고시에 합격하거나, 노동자로 위장취업까지는 안 했더라도 학생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사법부의 분위기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도 사법 엘리트 상층부의 보수화를 부추겼다. 지난 수십년간 1만명이 넘게 감옥에 보내도 아무 말 없이 조용하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문제가 하루아침에 엄청난 인권 문제로 대두하지 않나, 자신들이 보기에 틀림없는 거물 간첩 송두율이 핵심적인 혐의에 대해 무죄를 받고 풀려나지 않나, 기존의 관습을 깬 새로운 판결들이 속속 나오면서 엘리트 법관들의 보수화는 심화되어 갔다. 학생운동권 출신 젊은 법관들의 진출과 진보적 판결의 빈번한 출현에 따른 불안감이 증대한 것이다. 이는 1987년 6월항쟁에 이은 노동자 대투쟁이 한때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던 영남권 와이에스(YS) 세력의 보수화를 가져와 3당 합당의 보수 대연합으로 이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98년 김대중정권
2003년 노무현정권 탄생하자
사법부와 헌재는
기득권 세력이 기댈 언덕으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토지공개념이 무력화된 것이라든가 2004년 노무현 정권이 추진한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을 위헌이라 결정한 것 등은 헌법재판소가 기득권 수호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자초했다. 특히 2004년을 보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국가보안법,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등과 같은 민감한 문제에서 서로 보수적 가치의 최후의 옹호자임을 경쟁적으로 과시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혹자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관계를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한다. 헌법재판관의 위상이 매우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엘리트 법관들 사이에서 여전히 대법관이 헌법재판관에 비해 훨씬 높다고 할 수 있다. 일부 바이올린 주자들은 바이올린이 비올라와 비교되는 것 자체를 모욕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데 2004년 수구세력의 총아 경쟁에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국가보안법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서 각각 안타를 쳤지만 그 경쟁의 최후 승자는 <경국대전>을 끌어다가 ‘관습헌법’이라는 해괴한 이유로 위헌 결정이라는 만루 홈런을 친 헌법재판소였다.
민주화의 산물인 헌법재판소가 민주주의 발전, 소수파 보호, 기본권의 신장을 위해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헌법재판소는 기득권의 옹호, 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해 기능하고 있다. 국민 전체의 의견이 팽팽하게 갈린 사안에서 예단과 편견으로 가득 찬 채 8:1이라는 압도적 편향 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는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적 억압 기능을 대행하는 국가기구라는 벌거벗은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국순옥 교수가 일찍이 지적한 것처럼 헌법재판소가 떠맡은 이데올로기적 억압 기능은 “지배체제를 부정하거나 지배체제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반체제 이단자가 생길 경우 헌법의 적인 그에게 사회적 파문을 선고함으로써 지배체제의 안정을 확보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번에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관들은 방어적 민주주의를 얘기하지만, 사실 이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에 대한 자기방어가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정당 그 자체에 대한 선제공격이었다.
특히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소속 의원들의 의원직을 박탈한 것은 헌법을 스스로 짓밟은 폭거라 아니할 수 없다. 헌법 제111조는 헌법재판소의 권한을 위헌법률심판, 탄핵심판, 정당의 해산심판, 권한쟁의심판, 헌법소원심판 등 5가지로 못박고 있다. 또한 헌법 64조는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제명에 관한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헌법 수호의 책임이 있는 헌법재판소가 헌법이 부여하지도 않은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여 헌법기관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형법 제87조는 내란을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91조 2항에서 국헌 문란을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딱 헌법재판소가 한 짓이다.
통합진보당 강령과 제헌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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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을 한 다음날인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한국진보연대 주최로 ‘민주수호 국민대회’가 열려 한 집회 참가자가 민주주의의 사망을 알리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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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이 해산당한 주된 이유는 통합진보당이 표방한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종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관습헌법을 찾던 헌법재판관 나으리들은 <경국대전>에는 정통한지 몰라도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재건할 때 국민과 맺은 약속인 제헌헌법은 읽어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현행 헌법은 전문에서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담보하고 있는 중요한 문건이다. 그러나 제헌헌법에 관한 문제가 수능시험에 나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입만 열면 국가정체성을 들먹이는 보수세력이 왜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담보하고 있는 제헌헌법은 애써 외면하는 것일까?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재건될 때 좌파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중간파도 백범을 따라 남북협상에 참가했지 정부나 제헌의원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제헌헌법은 우파들만 모여서 만든 것이다. 제헌헌법을 한번 읽어보기만 하면 왜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만들자고 떠들어대는 수구세력들이 제헌헌법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중요산업 국유화같이 골수 운동권 ‘종북’세력이 모여서 만들었다는 통합진보당 강령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내용이 제헌헌법에는 가득 차 있다. 파업을 했던 노동자들이 손배가압류에 몰려 굴뚝으로 전광판으로 첨탑으로 올라가야 하는 현재의 처지에서 노동3권이 아니라 노동4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제헌헌법은 순 빨갱이 헌법이다. 기업에 이익이 발생하면 노동자에게 나눠먹을 권리가 있다는 이익분배균점권을 부여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재건한 보수세력들이었다.
제헌헌법의 기본정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
조화 이루자는 것
제헌헌법을 기초했고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법제처장을 지낸 현민 유진오는 제헌헌법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해설서인 <헌법해의>에서 제헌헌법의 경제조항에 대해 “우리나라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제헌헌법의 기본정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조화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정치적 민주주의란 좁은 의미의 자유민주주의이다. 대한민국을 재건할 때 국민에게 한 약속은 분명히 자유민주주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더하는 것이었다.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쟁점이 된 경제민주화는 사실 아주 오래된, 너무 오래되어서 우리가 맺었던지도 잊어버린 오랜 약속이었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가 조화된 것이 바로 진보적 민주주의였다. 박근혜 정권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김일성이 처음 쓴 것처럼 주장하지만, 대한민국 제헌헌법이 바로 진보적 민주주의 헌법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올라가면 이 점이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1945년 4월 임시의정원 38차 회의 의사록을 보면 김규광(김산의 <아리랑>에 나오는 금강산의 붉은 승려로 소개된 김충창=김성숙) 의원은 임시정부의 오랜 운동이 진보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것이고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모두 진보적 민주주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임시의정원이 임시헌장을 반포하면서 채택한 성명서를 보면 임시정부는 “가장 진보된 민주주의집권 제 원칙의 채용”을 주안점으로 삼아 헌법을 개정했다고 했다. 백범도 3·1운동 이후 가장 진보적인 민주주의 이상을 가지고 혁명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한 것이 바로 현재의 임시정부라고 주장하면서, 독립이 되면 가장 진보적인 민주주의 지배를 수립할 것이라고 확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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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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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역사가 있는데 진보적 민주주의를 계승한 것이 어떻게 내란이고 종북일 수 있을까? 진보적 민주주의의 역사를 지우는 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사이의 역사적 계승성을 말살하는 자들이고, 이들이 대한민국의 헌정사적 정통성을 왜곡하는 자들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임시정부와 제헌헌법과 독립운동세력에서 찾아야 할까, 아니면 친일파와 국가보안법과 김창룡, 노덕술, 서북청년단 따위에서 찾아야 할까. 통합진보당의 강령이나 정책은 오히려 대한민국임시정부나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비해 우경화되어 있다. 유럽에 갖다 놓으면 중도우파 정도밖에는 안 될 통합진보당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한다고 하니 부끄러운 일이다. 갓난아기로부터 살해 위협을 당했다는 중무장한 군인들의 내란이 계속되고 있다. 내란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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