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월호 참사’와 ‘세월호 정국’
2014년 4월 16일 제주도로 수학여행 떠난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실은 ‘세월호’가 전남 진도 인근에서 침몰해 어린 학생들을 비롯해 304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300여명의 인명을 앗아간 이 대참사는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한국사회와 국민을 충격과 패닉에 빠뜨렸다. 안전을 무시한 선박연령 연장과 불법적인 선박 증개축, 화물 과적을 위해 배의 균형을 맞추는 평형수까지 빼는 몰상식, 승객 안전을 도외시하고 자신들만 탈출한 선장과 승무원들의 모습에서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더 큰 충격은 정부의 무능이었다. 해경은 사고 접수시점부터 배가 뒤집힐 때까지 탈출지시는 않은 채 귀중한 ‘골든타임’을 허비했다. 정부는 배가 뒤집힌 후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재난대응본부를 통해 구조에 나섰으나 조직간 손발이 맞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모습만 보이다가 침몰 후 3일 간의 막바지 ‘골든타임’조차도 날렸다.
국민들은 정부의 무능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면서 구조할 수 있는 생명 중 단 1명도 구하지 못한 데 대한 비난을 쏟아냈고 그 책임을 국정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에 물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4월 23일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고 책임을 회피했고 이에 여론의 반발이 걷잡을 수없이 커졌다.
이에 박 대통령이 나서 대국민담화를 통해 국정책임자로서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청해진해운 오너인 유병언씨와 ‘해경’에 모든 책임을 지우는 쪽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책임 회피에 세월호 유가족을 중심으로 한 ‘세월호 민심’은 들끓었고 ‘진상규명 요구’의 타깃이 박 대통령과 청와대로 향했다.
이러한 민심의 흐름이 정권의 위기로 이어지자 보수진영도 이에 맞서 정치적으로 동원되면서 장기간의 ‘세월호 대치정국’이 조성됐다. 이 과정에서 사고 당일 발생 10시 무렵부터 오후 5시까지 ‘박 대통령의 7시간’이 집중적인 논란 대상이 됐다. 이러한 대치정국은 8월 14~18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과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장기간의 단식을 기점으로 절정으로 치달았다.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두고 장기간 여야대치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섣부르게 새누리당과 특별법 합의를 한 박영선 전 비대위원장이 유가족의 반발로 정치적 상처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재협상과 재재협상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지난 9월 30일에야 합의에 도달해 간신히 ‘세월호 정국’이 마무리됐다.
그러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대참사’가 ‘세월호정국’이란 진영의 틀에 갇히면서 대한민국은 ‘국가 대혁신’이란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동력을 상실했다. 이는 비극이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으로 남겨졌음을 의미한다. 비극을 극복해야할 과제는 내년도에 활동에 들어갈 진상조사위에게로 넘겨졌다.
[2]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헌법재판소가 12월 19일 재판관 8대1의 의결로 통합진보당 해산 선고를 내렸다. 또 헌재는 통진당 소속의원 5명에 대한 의원직도 상실시켰다. 헌재의 해산 명령으로 통진당은 창당 1109일, 법무부가 위헌정당 해산심판을 청구한지 409일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헌재는 통진당 노선인 진보적 민주주의를 북한식 사회주의 추종이라며 이는 북한의 대남혁명전략과 같다는 이유로 해산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는 통진당의 강령과 규약을 근거로 판단했다기보다는 법무부의 해산청구서를 그대로 인용하는 무리수라는 지적이 우세하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된 이석기 전 의원의 혁명조직(RO) 회합 발언을 주근거로 삼아 심증 위주로 당 해산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헌재는 이 전 의원 등 당내 일부의 친북적 언행을 통합진보당 전체 당원의 뜻을 담은 노선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헌재의 결정은 헌법기준이나 법적인 타당성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보수성향의 8명 헌재 재판관이 집권세력의 정치적 요구를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법적 타당성을 갖추지 않은 헌재의 정당해산 조치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라는 민주주의 근본가치를 훼손한 것이란 비판과 함께 사법권력이 정당해산을 감행함으로써 정당의 해산은 선거를 통한 국민의 선택권에 따라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마저 무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진보진영은 1987년 민주항쟁의 결과물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헌재가 6월 민주화운동의 산물로 탄생한 자신의 출범배경을 스스로 허물었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보다 더 큰 문제점은 헌재가 집권세력의 뜻이 따라 움직이는 ‘정략’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지적이다. 헌재의 이번 결정이 박근혜 정권의 ‘정략’에게 복무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헌재가 독립적인 헌법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져버렸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있다.
통진당 해산은 지난 2012년 5월, 19대 총선 비례대표 후보 경선부정과 ‘경기동부연합 종북논란’이 단초로 작용했다. 이 과정에서 통진당은 자신의 오류를 시정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한 것이 이번 사태의 빌미가 됐다. 그러나 이는 통진당 해산의 지엽적 원인에 불과하다.
근본적이고 직접적 원인은 박근혜 정부의 진영정치 추구와 ‘정략’에 있었다. 2013년 ‘대선개입 정국’의 탈출구가 이 전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이었고 이번 헌재의 결정도 박 대통령의 비선실세 논란이 한창인 때 전격적으로 나왔다. 이 전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이 나오기도 전에 헌재가 먼저 정당해산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때문에 헌재가 정권의 도구가 돼 통진당 해산 결정을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헌재가 이러한 의심의 한 가운데에 놓은 자체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조종(弔鐘)을 울린 것이다.
[3]‘대북전단’에 막힌 남북관계
정부의 2014년 대북정책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월 6일 가진 신년 기자회견에서 밝힌 ‘통일 대박론’에서 출발했다.
박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은 2013년 정부출범 첫 해의 신중하고 원칙적인 대북정책에서 벗어나 보다 유연하고 공세적인 대북정책을 예고한 것으로 풀이됐다. 박 대통령의 이러한 공격적 발언 속에는 불과 한 달 전 북한 권력 2인자 장성택의 공개처형 등으로 국제적인 궁지에 몰린 북한 정권을 ‘요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묻어났다.
앞서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또한 신년사를 통해 비방·중상 금지와 남북관계 개선을 남한 당국에 촉구했다. 양쪽 지도자 모두가 남북한 관계 진전에 큰 관심을 표명한 만큼 2014년 남북관계 기상도는 밝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올 2월 1차 남북고위급 접촉을 통해 이산가족상봉 행사를 3년3개월 만에 재개했다.
그러나 3월말 ‘통일 대박론’의 총아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박 대통령은 3월 28일 독일 드레스덴 선언을 통해 북한의 핵포기를 전제로 한 ▲남북한 주민 인도적 문제 해결 ▲공동 번영을 위한 인프라 구축 ▲남북 주민 간 동질성 회복 등의 3대 제안을 했지만 정치군사적인 문제해결과 5.24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재개에 기대를 걸었던 북한은 이를 ‘흡수통일론’이라며 걷어차면서 ‘대박’의 기대감도 걷혔다.
이후 남북관계는 공전의 공전을 거듭하면서 오히려 긴장과 대치관계의 연속이었다. 인천 아시안게임을 매개로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의 참가문제가 남북한 간 대화가 오갔지만 실질적인 남북관계 진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9월 24일 박 대통령의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북한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인권’을 거론하면서 남북관계는 새로운 먹구름이 조성됐다.
10월 4일 북한 권력서열 2위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등 북한 고위대표단이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해 남북대화 개선을 위한 남북고위급 대화를 10월말이나 11월초에 갖자고 제안하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될 듯 했지만 곧 이어진 서해 북방한계선에서의 남북한 간의 군사적 충돌과 탈북자단체들의 북한인권법 제정과 연계된 ‘대북전단 살포’로 무산됐다.
박 대통령은 NLL 충돌과 대북전단 총격 직후 개최된 통일준비위원회 2차 회의에서 “5·24 문제를 대화를 통해 해결하자”며 다소 전향적인 입장을 내놓았지만 북한과의 대화의 물꼬를 터는 데까지 나아지 못했다. 이는 박 대통령이 ‘북한 인권’이란 새로운 대북압박카드를 들고 나오면서 남북관계가 더 악화된 탓이다.
12월 18일 유엔 본회의에서의 북한인권결의안 채택은 북한의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선언적인 성격을 넘어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한 책임규명을 위한 ‘ICC 회부 권고’의 구체적인 조치를 담아 북한을 더욱 자극했다. ‘인권문제’가 새로운 대북압박요인이 되면서 2014년 말 남북관계는 더욱 얼어붙게 하고 있다.
[4]한미동맹 위해 군사주권 포기
2014년은 미국과 중국 간의 아시아-태평양을 둘러싼 대립구도가 확산된 한 해였다. 중국의 성장과 대외영향력 확대에 제동을 거는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재균형정책’이 전방위적으로 확대되면서 동북아시아에 ‘신냉전구도’의 도래를 알렸다.
미중 경쟁구도는 7월 1일 일본이 자위대 창설 60주년을 맞아 집단자위권 행사를 허용하는 새로운 헌법 해석을 채택하면서 정치군사적 대립구도로 발전했다. 일본을 앞세워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의도가 일본 집단자위권 행사 허용에서 가시화됐고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는 미국의 아시아재균형 전략의 핵심으로 인식됐다.
중국은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미국의 대중국 포위전략으로 보고 강하게 반발했다. 중국은 미국이 일본 집단자위권 행사로 ‘미국의 아시아로의 귀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실제 미국은 일본의 합법적인 해외파병을 가능케 함으로써 필리핀 등 동남아 등지에서 중국을 견제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미국의 아시아재균형정책은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로 이어지면서 더욱더 중국을 자극했다.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 시도가 대표적이다. 특히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반도 배치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신경전이 치열하다. 미국은 사드 한국배치를 계속 언급하면서 한국을 압박했고 중국은 이를 강력하게 경계했다. 두 나라의 눈치를 봐야할 한국정부는 이를 공식화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며 결정을 미루고 있다.
이러한 미중과의 갈등 속에서 한국정부는 10월 24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한보협의회(SCM)에서 2015년으로 예정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시점을 한국군이 북한 핵억제력을 갖출 때까지 연기하는데 합의했다. 또 전작권 환수 시점 또한 2020년 중반으로 막연하게 정해 사실상 무기한 연기했다.
미국은 한국군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면서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의 길로 나섰다. 이명박 정부시절 추진하다 중단됐던 한일 군사정보협정은 12월 29일 한미일 군사정보공유 양해각서(MOU)란 편법으로 체결한다. 이는 미일의 집단자위권 행사 체제에 한국의 편입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미 군사동맹의 강화는 중국 경제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정치군사적으로 중국과 불편한 관계에 빠질 위험성을 안는 선택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11월 10일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정상회담에서 한중 FTA가 실질적으로 타결을 선언하는 등 경제적 관계는 계속 강화해나가고 있다.
군사동맹은 미국에 의지하고 중국과의 ‘경제협력’ 강화가 박근혜 정부 외교전략의 골격이다. 그러나 경제보다 군사적 동맹관계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국제관계에서 ‘군사주권’을 미국에 양도해 동북아에서의 발언권을 스스로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5]6.4지방선거와 7.30재보선
‘세월호 정국’의 한 복판에서 치른 6.4지방선거와 7.30재보궐선거는 2014년 3월 통합신당으로 출범한 새정치민주연합의 지도자로 부상한 안철수 전 대표의 시험대였지만 안 전 대표는 이 관문을 뚫지 못했다.
17개 시도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새누리당은 자신의 텃밭은 대구/경북/부산/경남/울산과 함께 중요 승부처인 수도권 경기/인천, 그리고 제주 등 8곳에서 승리했다. 새정치연합은 승패의 가늠자인 서울에서 압승했고 광주/전남/전북과 대전/충남/충북/세종 등 호남과 충청권을 석권한데 이어 여권의 텃밭으로 분류되던 강원 등 총 9곳에서 이겼다.
표면적으로는 ‘여야 무승부’란 평가지만 속살을 뜯어보면 ‘세월호 정국’이란 절대적으로 유리한 선거환경 속에서도 야당이 민심을 획득하지 못한 선거였다. 이에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선거결과를 두고 ‘패배는 아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준 것’이라고 고무된 입장을 나타냈다. 전국교육감 선거에서 17곳 중 서울/부산 등 13곳을 진보교육감이 석권한 것에 비춰볼 때, 여당은 안도한 선거였고 야당은 아쉬움이 남는 선거였다.
6.4선거에 이은 7.30재보선에서는 새정치연합이 완패했다. 15곳의 선거구 중 새누리당이 수도권 6곳 중 5곳, 충청권 3곳, 영남 2곳에다 적진(敵陣)인 전남 순천-곡성에서까지 모두 11곳에서 승리해 여야 서로 ‘무승부’로 평가한 6.4지방선거의 연장전에서 완승했다. 세월호 정국으로 궁지에 몰렸던 박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세력에게는 ‘세월호 탈출’의 계기가 된 소중한 승리였다.
새정치연합은 광주 광산을 등 호남 3곳과 수원정(영통) 4곳에서 승리했지만 수도권에선 거의 전패하고 호남 텃밭에서도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에게 뼈아픈 패배를 맛보았다. 새정치연합은 집권세력에 반대하는 야권을 결집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호남 지지층의 이탈이란 충격을 상황을 맞이했다.
이에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 당 지도부는 선거패배의 책임을 지고 7월 31일 총사퇴했다. 지난 3월 새정치연합 통합과 함께 출범한 안철수 체제가 불과 4개월 만에 무너졌다. 아울러 수원팔달에 출마했던 손학규 상임고문은 패배의 충격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해야 했다.
‘세월호 정국’으로 박근혜 정부에 대한 민심의 이반과 이어진 안대희-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 낙마 등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참사’에 대한 비판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에서 치른 선거임에도 참패했다는 것에 야당은 충격을 받았고 나아가 호남 근거지마저 무너질 수 있다는 현실에 새정치연합은 위기에 휩싸였다.
광주 광산과 서울 동작을에서의 전략공천 후유증이 안 전 대표와 새정치연합에 대한 호남민심을 자극한 것이 선거 패배의 원인이 됐다. 7.30재보선 참배는 야권 내부에선 ‘호남 정치 복원론’이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6]연말정국 뒤흔든 비선실세 논란
박근혜 대통령 비선실세로 시중에 회자되던 정윤회씨 국정개입을 다룬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의 문건이 11월 28일 <세계일보>에 의해 보도되면서 2014년 연말정국을 달구었다.
정씨와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 등 ‘문고리 3인방’과 또 다른 청와대 비서관들이 정기적으로 ‘십상시(十常侍)’ 회동을 갖고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몰아내려 했을 뿐 아니라 각종 인사에 개입했다는 청와대 문건의 내용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또 이들에 의해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 등 박 대통령의 친동생 박지만 EG 회장 쪽 인사들이 물러났다는 주장들이 설득력을 가지면서 ‘청와대 내부의 권력암투’에 대한 국민적 관심까지 증폭시켰다. 여기에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나서 정윤회씨 딸과 관련해 문체부 국장과 과장에 대한 인사를 박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다는 폭로까지 나왔다.
대통령선거를 통해 박 대통령에게 권력을 위임한 국민들로선 당혹감에 휩싸인 것은 당연했다. 박 대통령은 비선실세 논란이 불거지자 문건의 내용 등에 대해선 “찌라시”라면서도 이를 ‘청와대 공식문건’이고 대통령기록물이기에 ‘문건 유출은 국기문란 사건’으로 규정, 문건 내용은 덮고 문건 유출에 초점을 맞췃다. 이는 검찰에 수사의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비선실세 논란이 확산되자 박 대통령은 12월 7일 김무성 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와의 청와대 오찬회동에서 자신의 정치적 ‘순결성’과 ‘결백’을 강조하며 “저에게 겁나는 일이 뭐가 있겠나? 솔직히 말해서. 아무것도 겁날 일도 없다...흔들릴 이유도 없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결기를 보이며 비선실세 국정개입의혹을 일축했다.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검찰은 비선실세 의혹에 대한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했다. 그러나 문건 내용에 대해선 ‘찌라시’라고 결론낸 채 수사의 초점을 문건 유출사건에 맞췄다. 그러면서 청와대에서 근무하다 원대복귀한 박관천 경정이 문건을 청와대에서 빼왔고 서울시경 정보1분실 한모 경위가 이를 복사하고 최모 경위가 이를 언론 등에다 유포했다는 쪽으로 빠르게 결론을 내 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최모 경위는 자살을 통해 ‘청와대 회유’가 있었다고 밝혔고 한모 경위 또한 청와대 회유를 언급하면서 파문은 확대됐다.
비선실세 파문으로 박 대통령 지지율은 취임 후 처음으로 30%대 지지율을 기록하는 등 곤두박질 쳤다. 박 대통령의 국정수행 능력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이 증폭된 탓이다. 이에 박 대통령은 ‘신은미 토크콘서트’를 ‘종북’으로 규정하고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등으로 ‘진영정치’를 통한 반전을 도모하고 있지만 그 효과는 과거보다 크게 떨어졌다. 이에 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비선실세 논란’으로 시작됐다는 평가마저 나오고 있다.
[7]박대통령 인사 참사
세월호 참사가 민심의 동요를 야기하고 정국을 요동치게 하자 박근혜 대통령은 민심 수습책으로 정부와 청와대 비서진에 대한 인적쇄신에 들어갔지만 ‘인사 참사’란 더 큰 정치적 상처를 입었다. 정부 출범초의 ‘수첩인사’, ‘불통인사’의 논란이 재연되면서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능력에 대한 불신도 깊어졌다.
‘인사 참사’의 백미는 국무총리 인선에 있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국민적 분노가 거세진 4월 27일 정홍원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면서 청와대는 후임 총리후보자 인선에 들어갔고 박 대통령은 5월 22일 후임 총리로 안대희 전 대법관을 내정했다. 개혁을 상징하는 안 전 대법관의 총리후보자로 발탁은 박 대통령에겐 민심을 진정시키는 회심의 카드로 해석됐다.
그러나 안 후보자는 곧바로 고액의 수임료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해 7월부터 이후 5개월 동안 무려 16억원이란 고액의 수입을 거둬 ‘전관예우’ 논란을 야기했다. ‘관피아’를 척결해야 할 당사자가 ‘법피아’였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게다가 총리후보군으로 검증에 동의한 뒤 3억원을 기부하고 고액 수임료가 논란이 되자 변호사로서 번 11억원을 내 놓겠다고 한 것도 동기의 불순함을 의심받으면서 5월 28일 스스로 사퇴했다.
이어 청와대는 6월 10일 중앙일보 주필 출신의 보수논객 문창극 후보자를 지명했다. 그러나 문 후보자 지명 이튿날 2011년 온누리교회에서 했던 특별강연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그가 친일 역사관을 지녔다는 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강연에서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를 두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했다.
이 뿐만 아니라 한국인을 비하하고 독재를 미화하는 등의 부적절한 발언들도 밝혀졌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문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여기에 김명수 교육부장관 후보자의 ‘제자 논문 대필’ 사건까지 불거지면서 박 대통령에 대한 ‘불통인사’ 비판은 최고조에 달했다.
버티는 문 후보자는 연일 뉴스의 메인을 장식했다. 결국 새누리당 친박계 좌장인 서청원 의원이 나서 그의 사퇴를 요구하는 상황으로까지 가면서 문 후보자는 지명 14일 만인 6월 24일 자진사퇴했다. 이로 인해 여론은 청와대 인사검증시스템에 비판으로 옮겨갔고 인사검증위원장인 김기춘 비서실장 책임론으로 확산됐다.
궁지에 몰린 청와대는 6월 26일 지난 4월 사표를 낸 정홍원 국무총리를 60일 만에 반려, 유임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는 새로운 총리 후보자 인선 풀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으로 박 대통령의 ‘수첩인사’에 대한 국민적 우려감을 증폭시켰다.
이에 ‘정홍원 사임 -> 안대희 지명과 낙마 -> 문창극 지명과 낙마 -> 정홍원 유임’의 일련의 과정에 대해 언론들은 ‘돌고 돌아 정홍원’이라는 말로 청와대의 ‘인사 무능’을 비판했고 야권은 ‘인사 참사’에 대한 박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8]미국 양적완화 종료 등 외부변수 요동
2104년 한 해 한국경제에 영향을 미친 것은 미국의 양적완화 종료와 일본의 엔저, 그리고 국제유가 하락 등 외부 변수였다. 한국경제는 이에 의해 부침을 거듭했고 2015년에는 보다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 전망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는 10월 29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양적완화(QE) 프로그램의 종료를 선언했다. 2013년 12월 850억 달러였던 3차 양적 완화 규모를 100억 달러 줄인데 이어 2014년 첫 여섯 차례 회의에서 채권 매입액을 매번 100억 달러씩 줄이다 10월 회의에서 남은 150억 달러의 채권 매입을 중단하기로 했다.
미국의 양적완화를 종료는 세계에 달러의 추가적인 공급의 중단을 의미하며 이는 곧 달러가치를 상승시키는 요인이 된다. 이로 인해 한국경제도 양적완화 시기에 유입된 달러가 다시 유출되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원화 환율이 상승하는 등 영향을 받고 있다.
한국경제가 미국의 양적완화 종료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다른 신흥국처럼 자본유출에 따른 리스크 증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2015년 봄에 이어질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에 있다. 미국의 금리 인상은 곧바로 한국에서의 기준금리 인상을 뒤따르게 한다. 이는 지난 2009년부터 시작된 저금리시대가 비로소 막을 내린다는 의미이다.
이로 인해 변동금리 대출 중심의 가계부채로 인해 가계는 막대한 추가적인 이자부담을 감당해야 하고 현금을 많이 대기업을 제한 대다수 기업들 또한 금융비용의 증대에 따른 경영리스크를 지게 된다. 이는 소비 위축과 경기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예고한다.
일본의 엔저도 한국경제에 위협이 되고 있다. 2012년 말 아베 정권 출범과 함께 시작한 ‘엔저 공세’는 지난 10얼 말 일본은행이 시중자금 공급량을 연간 약 60조∼70조 엔에서 80조 엔으로 늘리는 추가 금융완화를 결정함으로써 엔화 약세를 한층 가속화했다.
엔저 현상은 국제시장에서 경쟁하는 한국의 수출기업에 타격을 주면서 수출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의 하방리스크를 가중시키면서 내수부진에 수출부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불안을 증대시켰다. 일본의 엔저 공세는 중국 위안화 평가절하 흐름과 유럽의 양적완화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조선과 전자, 기계 등 우리 수출산업의 경쟁력을 위협했다.
올 하반기 국제유가 하락 또한 한국경제에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연초 두바이산 기준으로 배럴당 100달러가 넘던 유가는 12월 들어 60달러 밑으로 떨어졌다. 에너지를 수입하는 한국경제에 청신호로 작용할 것이란 예상도 있지만 러시아 금융불안 및 자원수출국의 경제악화가 악재로 작용할 것이란 전망 때문에 이를 반길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유가 등 자원가격 하락이 세계경제의 침체를 가져올 경우 한국의 수출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9]가계부채 1천조 시대, 리스크 커진 한국경제
가계부채는 2012년 말 963조8000억원에서 2013년 말 1058조1000억원으로 1년 만에 57조6000억원(6.0%)이나 늘어났고 2014년 가계부채는 11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2012년부터 국내외 전문가들이 가계부채가 한국경제의 뇌관이 될 것이란 경고를 꾸준히 했지만 오히려 부채증가는 가속화됐다.
가계부채는 장기적인 저금리기조를 바탕으로 주택을 담보로 한 대출수요가 늘면서 계속 증가해왔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부동산경기를 떠받히기 위해 추진한 주택담보대출비율(LTV)와 총부채상환비율(DTI) 대출 규제 완화가 큰 몫을 했다.
문제는 가계부채의 진 가계들의 부채상환능력이 갈수록 악화되는데 있다. 소득증가가 받혀주지 않는 상황에서 부채가 증가해 가계파산의 리스크를 높이고 있다. 소득증가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장기 저성장 국면으로 개별 가계의 소득증대는 요원한 실정이다.
외국과 비교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중은 높음에도 정부의 가계부채 통제력은 취약하다. 이는 부동산을 고리로 하는 모순된 한국적 상황에 기인한다. 가계부채를 지탱하는 것이 부동산이고 부동산이 무너지면 가계부채 리스크가 증대된다. 이를 막기 위해 부동산가격을 안정시키려면 주택담보 대출이 느는 악순환 고리가 형성돼 있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2014년 3분기말 가계의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이 163.1%를 기록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주택담보대출로 몸살을 앓던 미국은 140%였던 것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수준이다. 가계의 소득증가가 부채증가 속도에 한참 못 미치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5년 봄으로 예상되는 미국의 금리인상은 ‘시한폭탄’이라는 게 전문가의 진단이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한국의 시중금리를 올리면서 가계의 이자부담이 크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가계가 상당수 발생하면서 한국경제에 ‘가계부채 리스크’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가계부채 뿐 아니라 국가부채와 기업부채 문제도 심각하다. 기획재정부 자료에 따르면 2013년 말 국가부채(국가채무+공공기관부채+지방공기업부채)는 1058조원에 달하며 기업부채도 2212조2000억원을 기록했다. 이중 자영업자 부채규모는 215조5000억원이다
2011년말과 비교하면 2년만에 국가부채와 가계부채는 각각 13.9%, 115% 늘었고, 자영업자 부채도 23.6%나 증가했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장기간 이어져온 확장적 재정정책과 금융완화에 따른 것이다. 2008년 이후 약 7년간 정부와 가계, 기업의 부채 확장을 통한 경기관리가 빚은 산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채증가는 미국의 금리인상을 눈앞에 둔 지금 한국경제의 ‘화약고’이다.
[10]MB 조준한 여야 자원외교 국조 합의
새정치민주연합은 세월호특별법으로 지연되다 10월에서야 열린 2014년 국정감사에서 ‘사자방(4대강사업-자원외교-방산비리) 국조’에 타깃을 맞춰 강력한 공세를 펼쳤다.
4대강사업 비리의혹은 정치이슈로 여러 번 제기됐던 사안이지만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와 방산비리의혹들이 연이어 폭로되면서 야권의 ‘사자방 국조’공세는 시간이 갈수록 민심의 지지를 얻어갔다.
정국의 쟁점으로 부상한 11월에 여러 기관들의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의 70% 가량이 ‘사자방 국조’에 찬성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 증인으로 출석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다. 새정치연합이 제기한 이명박 정부의 해외자원 개발의 결과 수십조의 국부가 사라졌다는 주장이 국민들의 경각심을 자극한 데 있다.
새정치연합의 주장에 따르면 해외자원 개발에 투자된 금액은 지금까지 41조원이고 향후 2018년까지 31조원이 더 투입돼 70조원 이상의 천문학적인 돈이 투자됐거나 투자될 예정이지만 이중 30조원 정도를 회수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캐나다 하베스트사 정유부문 투자금액 2조원의 거의 전부가 허공으로 날아간 실례까지 제시됐다.
이러한 여론의 추이 속에서 여야는 사자방 국조를 둘러싼 협상을 시작했고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이완구 원내대표, 새정치연합의 문희상 비대위원장과 우윤근 원내대표가 12월 10일 ‘2+2 회동’에서 ‘해외자원개발 국정조사 특위’를 연내에 구성하기로 합의하고 다음날은 11일 4대강 사업이 빠진 자원외교와 방산비리 의혹에 대한 국정조사에 합의했다.
이러한 여야 합의는 ‘국조’에 찬성하는 다수 국민여론의 압력이 근본배경이지만 박근혜 대통령 비선실세 논란이 연말정국을 강타한 것 또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쪽은 “어처구니 없다”면서 친박계와 집권세력이 정윤회씨 비선실세 논란을 타고 넘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물’로 삼는 국조에 합의했다고 반발했다.
이 전 대통령 쪽은 국조 수용에 대한 집권세력의 정치적 의도와 함께 여권의 분열을 거듭 경고하면서 이 전 대통령의 국회 증인 채택을 막겠다는 속뜻을 보이고 있다. 이 전 대통령 쪽은 지난 12월 18일 회동을 통해 집단적으로 대응하며 증인 출석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야당은 이 전 대통령을 청문회장에 세우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상황이다.
여야는 12월 26일 국조특위 위원 인선을 마무리했다. 새누리당은 이 전 대통령의 법무비서관 출신인 권성동 의원을 특위 간사에, 조해진 의원을 비롯한 친이계 의원을 위원으로 대거 포진시켰다. 이 전 대통령 보호를 위한 진용으로 증인 출석만은 막겠다는 의도이다.
그러나 야당은 MB를 정조준하고 있다. 특위 위원장은 노영민 의원이, 간사는 홍영표 의원이 맡았다. 여기에 부좌현, 홍익표, 김현, 최민희 의원 친노 공격수 등이 가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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