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아닌 '법조 지배체제'
[시민정치시평]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이 보여주는 한국 사회
장은주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14.12.24 08:46:52
한국 사회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곧 '능력자 지배체제' 사회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독차지하는 사회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 시험'을 통해 벼슬이 분배되었는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능력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는 학업 성적이나 학력에 따라 부와 권력과 명예가 분배되고 있다. 최소한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그런 사회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런 분배가 정의롭다고 여긴다.
메리토크라시의 정의로움에 대한 이러한 대중들의 믿음은 우리 사회의 삶의 많은 모습들을 이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열쇠다. 무엇보다도 사교육 광풍을 동반한 입시위주의 교육 같은 데서 그러한 생활 이데올로기가 가장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데올로기는 능력에 따라 생겨나는 시민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심지어 정치적 불평등마저 정의롭고 정당하다고 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형해화하기도 한다.
한국 사회의 이 메리토크라시의 한 정점에는 이른바 '법조인'이 있다. 혹독한 경쟁을 통과한 아주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한 사람들만이 이 직업군에 들 수 있다고 여겨진다. 덕분인지 이들은 대개 다른 시민들에 비해 경제적으로도 윤택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막강한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누린다. 우리 사회의 권력 기관들을 실제로 움직이는 현직 판검사들이나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국회의원이나 장차관 등은 물론 대기업의 많은 요직조차 그 법조인 출신들이 장악하고서 위세를 부린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주리스토크라시(juristocracy)', 곧 '법조(인) 지배체제' 사회다.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이 체제에서 시민들 사이의 민주적 평등은 한낱 교과서 속 이야기일 뿐이다. 스스로를 봉건색 찬란하게도 법조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때로 시민 사회의 건강한 민주적 이성을 조롱하면서 아주 간단하게 민주적 대의 과정이나 절차를 뛰어넘어 지배를 행사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가 사회의 초(超) 엘리트인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인 듯 여긴다.
우리 사회의 이 주리스토크라시는 단순히 근대 사회 일반에서 법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래서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각광을 받기 때문에 생긴 결과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막스 베버는 서구의 근대에서 법률가들이 가장 강력한 직업 정치가 후보군에 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근대 민주주의 정치가 필요로 하는 "말과 글의 효과를 신중히 저울질 하는" 능력을 직업적으로 아주 잘 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치밀하고 정확한 논증 능력 같은 것이 그런 능력일 텐데, 우리 사회의 법조인들이 보인 능력은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수도 이전 문제도 왕조 국가 조선의 '경국대전'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 했던 헌법재판소의 그 유명한 '관습 헌법' 판결을 생각해 보라.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을 '둥근 사각형'이 있을 수 있다는 식의 형용모순적 '사후 매수죄'라는 죄목으로 감옥에 가게 한 대법원의 판결은 또 어떤가. 모두 억지 춘향식 잡설이다. 이번에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키겠다고 나선 공안 세력의 기소나 그를 그대로 인용한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마찬가지다.
이석기 류를 당 전체와 간단히 동일시하고, 이 당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폭력적으로 추구한다며 그 어떤 객관적 증거도 없는 편견으로 가득한 예단을 앞세우는가 하면, 당내에서의 비민주적 폭력 행사 같은 것을 우리나라의 민주적 기본 질서에 대한 폭력적 전복의 시도와 연결시키는 범주 오류도 서슴지 않는다. 아무도 헌법재판관들에게 입법 행위를 하라고 허락해 준 적이 없는데,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의 직을 자기들 마음대로 박탈했다. 이 나라의 주리스토크라시적 본성과 수준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
무려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앞세웠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일정한 절대적 가치를 전제한 위에서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적들로부터 보호하자는 개념이다(지난해 이맘 때 쯤 나는 이 '시민정치시평' 코너에서 이번 사건에 이 개념이 얼마나 도착적으로 동원된 것인지를 논의한 적이 있다. (관련기사 보기 :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신다고요?")
민주주의의 절대적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상과 표현의 자유, 다른 생각에 대한 포용과 관용을 그 핵심으로 한다. 헌법재판소는 바로 그 가치를 조롱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 판결을 통해 지켜졌다고 평가한 정확히 바로 그 '자유 민주주의'를 부정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최소한, 단적으로 파시즘 체제라고는 할 수 없어도 온전한 민주주의 체제라고는 더 더욱 말하기 힘든 저 푸틴의 러시아나 오르반의 헝가리나 에르도얀의 터키 같은,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 국가의 반열에 들어섰다.
통합진보당은 어차피 정치적으로 파산할 것이었다. 그 당의 정치는 다음 선거에서 민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었고, 한국 진보 정치 전체는 통합진보당이라는 부정적인 역사적 유산을 어떤 식으로든 받아 안아 처리해내야 하는 정치적 과제를 수행해 나가야 할 터였다. 그러나 그 당에 대한 이런 식의 사법적 해산은 결국 일정한 정치적 목적에 따른 고도의 정치적 행위일 뿐이다. 그것은 한국 민주 진보 진영 전체를 '종북'의 덫에 빠트린 채 끊임없이 그 종북의 척결을 지금과 같은 과두 특권 독점 체제의 강퍅한 옹호를 위한 명분으로 삼는 비열한 정치만 춤추게 할 것이다. 이제 이 땅에서는 사회적 정의와 사회적 약자의 이해관계에 대한 진보 정치적 대의는 거의 불가능하게 생겼다.
다른 민주 국가들에서도 '정치의 사법화'나 '사법의 정치화'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대 복잡 사회의 모든 발전 과정이 언제나 적절하게 민주적 법치를 통해 통제되고 관리될 수 없어서 생기는 불가피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처럼 툭하면 검찰이 권력의 시녀가 되어 정치를 대신하고 국회는 국회대로 스스로의 일을 법원으로 가져가는가 하면, 민주적으로 선출되지도 위임받지도 않은 판사들이 숱한 '판결 입법'을 제 멋대로 해대면서 민주공화국임을 참칭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그것도 대학생들의 낙제 논술문 정도에서나 볼 법한 엉터리 논변을 제시하면서 말이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법치국가다. 여기서는 법이, 단지 법만이 지배한다(rule of law). 그러나 모든 법치국가가 민주주의 국가인 것은 아니다. 한국식 법치국가, 곧 주리스토크라시는 우리 사회의 과두 특권 세력이 사법부만이 아니라 입법부와 행정부를 포괄하여 넓은 의미의 법률 전문가들을 핵심 에이전트로 삼아 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지배하는(rule by law) 억압체제일 뿐이다. 여기서는 법치를 정당하게 만들 기본적인 소통적 합리성이나 정의는 기껏해야 장식일 뿐이다. 이런 체제는 그냥 '클렙토크라시(kleptocracy)', 곧 '도적(盜賊) 지배체제'라 해야 옳다.
법이 총칼을 대신하여 무도한 억압의 무기로 쓰이는 세상이 되었다.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우리의 클렙토크라시적 주리스토크라시가 군사 독재 체제보다 더 문명적이라고 말할 것인가. 서양어에서 법과 정의는 같은 어근을 가졌다. 동양에서도 법은 정의와 다른 뜻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법은 정의의 가장 타락한 모습, 아니 정의의 안티테제로만 살아 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치가 떨린다. 정말이지 이 나라 국민이라는 게 부끄럽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장은주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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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0093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신다고요?
[시민정치시평]'시민 불복종' 인정하지 않는 한 '제2의 유신 시대' 2013.12.27 10:03:00
지금 대한민국에는 '총성 없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 밀양 송전탑 건설 강행,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화,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혐의 구속,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 종북몰이 공안 드라이브, 철도노동자 중징계와 민주노총 침탈 등 어느 것 하나 마음 편하게 접하기 힘든 살 떨리는 일들이 매일 벌어지고 있다. 한결같이 정부가 조금의 양보도 없이 힘으로 눌러버리겠다고 작정한 일들이다. 한결같이 극한의 적대와 증오에서 비롯하고 또 그것들을 부추기는 일들이다. 언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당분간 이 땅의 시민들이 안녕하게 살기는 틀린 모양이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들을 '자유민주주의'라는 깃발을 높이 든 정부가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자유민주주의라는 게 이처럼 강퍅하고 메마른 정치이념이었던가? 우리 헌법에 명시되어 있고 자유민주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단호히 수호해내겠다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게 지금 같은 체제라는 말인가?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고개를 흔들게 된다.
도대체 이 지구 상의 어느 자유민주주의 국가 정부가 박근혜 정부처럼 정치적 상대자를 절멸해야 할 '악'으로 낙인찍고 배제하려 하나? 사상의 자유도 양심의 자유도 집회의 자유도 쉽게 무시되는 자유민주주의, 노동조합과 같은 결사의 자유도 허락받아야만 행사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파업권과 같은 시민들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기본권마저 밥 먹듯 훼손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방어적 민주주의'(또는 '전투적 민주주의')라는 게 있기는 하다. 이것은 나치 패망 후 새롭게 건설된 독일이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가 히틀러 같은 독재자의 출현을 막지 못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가운데, 민주적 헌정 체제의 일정한 절대적 가치를 강조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적극적 방어의 기제들을 도입하면서 나온 개념이다. 위헌정당 해산청구 조항 같은 우리 헌법의 장치도 사실은 이런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고, 실제로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이 개념을 들이대며 통합진보당 해산청구를 정당화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신임 검찰총장을 임명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엄격한 수호를 주문했던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이리라.
그러나 이는 기막힌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 자유민주주의 체제란 명백하고 현존하는 물리적 위협이 없는 데도 어떤 사람이나 조직을 그 체제의 적이라며 배제하고 벌하는 따위를 금하는 체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이석기 의원이나 그 일파같이 쉽게 동의하기 힘든 정치적 세계관을 가졌더라도 말이다. 이렇게 보면 다름 아닌 그런 일을 일삼고 선동하는 현 정부와 여당 그리고 조선일보 같은 주류 보수언론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가장 앞장서 위협하는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이런 정치적 도착이 또 있을까 싶다.
우리는 여기서 박근혜 대통령이 단지 생물학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독재자 박정희의 DNA를 물려받았음을 새삼 확인할 뿐이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법 이래 우리 헌법에 흔히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등치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은 유신 헌법이 처음이었고,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인 김기춘 같은 유신헌법의 정초자(定礎者)들은 정확히 바로 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수호를 명분으로 유신 독재체제를 정당화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바로 이 유신의 정치적 수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제2의 유신 시대'라 해도 별다른 과장이 아니다.
유신 체제가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을 도용한 것은 너무도 지독한 블랙코미디였다. 독일에서는 애초 민주적 절차에 의한 독재 체제의 등장을 막고 시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두었던 그 개념을 1인 종신 독재 지배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독일 헌법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die freiheitliche demokratische Grundordnung; free and democratic basic order)"라 한 것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고 (엄밀하게 보자면) 엉터리로 번역해놓고는 엉뚱하게도 그것을 수호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이고 또 다름 아닌 유신 같은 체제를 자유민주주의 체제라고 했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그런데도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는 현 정부가 이런 일을 반복하고 있으니 차라리 딱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1987년 6월 항쟁 이후 만들어진 현행 헌법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유신헌법의 표현을 그대로 담고 있기는 하다. 현행 헌법이 지닌 안타까운 한계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유신 독재 체제에 맞섰던 많은 재야운동과 학생운동이 악랄한 유신의 파쇼 체제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쳤던 것을 생각하면, 현행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은 유신 헌법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도 명백하다.
여기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그야말로 제대로 된 의미에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유신 같은 전체주의 체제가 아님은 물론이고 시장을 절대화하고 재산권을 신성화하면서 시민들의 평등한 정치적 자유와 연대의 가치는 무시하는 좁은 의미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질서일 수도 없다. 제대로 이해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곧 '체제로서의 자유민주주의'에서는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누려야 할 보편적인 인권과 기본권의 보호가 그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과정보다도 우선한다. 민주적 자기-지배의 원칙과 사회적 참여의 권리, 곧 복지의 권리도 최대한 보호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 집권세력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념적으로 경직된 특정 정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우익 근본주의적 정치행태는 기껏해야 전형적인 '다수의 전횡'이고, 그래서 민주주의의 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최근 벌어졌던 북한의 장성택 숙청 사건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음을 강조했단다. 맞다. 우리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는 장성택을 숙청하는 방식의 반인권적 사법 절차를 결코 용납하지 않고, 그런 점에서 우리의 체제는 북한의 체제보다 명백하게 우월하다. 그러나 지금 박근혜 정부는 아무런 맥락도 개념도 없이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칼을 휘두르며 이석기 의원을 남한의 장성택으로 만들려 하고, 공공성을 위해 헌신하려는 철도 노조원들을 말 안 들으니 굶어 죽어야 한다며 거리로 내몰고 있다. 서울을 평양으로 만들려는 모양이다.
방어적, 전투적 민주주의 개념의 참된 핵심 중의 하나는 바로 이렇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시도에 대한 시민의 저항, 곧 시민 불복종에 대한 헌법적 정당성의 인정이다. 우리의 우월한 체제, 바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우리의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결국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야 할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모두들 안녕하지 못한 이 세밑, 날씨마저 너무 춥다. 응답하라, 자유민주주의여!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장은주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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