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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폭력에 대한 세계적 지성의 성찰..."아직은 과분한 상"
[제55회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작] 번역 부문
'우리 본성의 선한...' 김명남 번역가
1,400쪽이 넘는 압도적인 분량에 ‘인간의 본성’이라는 난해한 주제가 더해졌다. 설상가상 원저자는 세계적인 문장가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번역가도 쉽게 덤비지 못할법한 이 책을 30대의 젊은 번역가가 묵묵히 한국어로 옮겼다.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역자 김명남(39)씨가 주인공이다.
“순전히 원서가 두껍다는 것 때문에 상을 받은 것 같아요.”
23일 한국일보 편집국에서 만난 김씨는 “부끄럽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얼굴을 붉혔다. “하루 종일 번역에 매달릴 수 있는 전문번역가이기 때문에 두꺼운 책을 5개월 안에 번역할 수 있었을 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평소 존경하는 스티븐 핑커의 책을 한국에서 제일 먼저 완독한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상까지 받아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 그가 밝힌 수상소감의 전부였다.
김씨는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카이스트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환경정책을 공부한 후 동아일보 기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돈보다 책이 좋아”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2000년 회사를 나왔고 이후 2006년까지 인터넷 서점 알라딘 편집팀장으로 활동했다. 굽이굽이 돌아온 인생처럼 보이지만 그는 중학생 때부터 한결같이 번역가가 되기를 꿈꿔온 사람이다. “번역가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름길을 몰랐던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꿈을 이루는 단초가 됐다. 알라딘에서 일하던 2005년 대학선배가 뇌과학과 심리학을 접목한 과학서 번역을 의뢰했다. 과학도 출신이니 비전공자보다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그가 번역한 책이 개리 마커스의 ‘마음이 태어나는 곳’이다. 번역가로 첫 걸음을 뗀 그는 “낮에는 회사일, 밤에는 번역일 하는 것이 힘에 부쳐”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번역가의 길로 나섰고 ‘과학서 전문번역가’로 이름을 알렸다.
아무리 과학에 일가견이 있다고 해도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번역하는 것은 녹록하지 않았다. 분량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책은 “오늘날 인간은 역사상 가장 덜 폭력적인 세상에 살고 있고, 그것은 인류가 언제나 당대의 폭력을 줄이려고 노력한 결과”라는 주제를 뇌과학, 진화심리학, 역사적 사건 등을 통해 논증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50%는 과학책이고 나머지 50%는 역사ㆍ정치학 서적이라고 볼 수 있다. 김씨는 “역사ㆍ정치 분야의 지식이 얕아 실수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며 “특히 고문헌만 1,000 가지가 넘게 나오는데 저자가 참고한 서적이나 논문을 일일이 다 읽으려면 10년은 걸릴 것 같아 어느 수준까지 공부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번역을 위해 본문에 언급된 책이나 논문을 발췌독하며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지식을 채웠다.
핑커의 수려한 문장은 부담이 되기보다 큰 도움이 됐다. “워낙 글을 잘 쓰기 때문에 그 정확도를 읽어내기 편했다”는 그는 “저자의 혼이 내 몸에 쓰인 것처럼 술술술 문장이 뽑아져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핑커의 차기작 ‘센스 오브 스타일’ 번역을 준비 중이다. 과학서가 아닌 문장력 강화에 관한 책이라는 점이 의아했다. “이제껏 60여권을 옮기면서 과학이나 환경 관련 서적뿐 아니라 문학서, 어린이서적 등 다양한 책을 번역했어요. 그러고 보니 해마다 평균 9권씩 번역한 ‘생계형’ 번역가가 분에 넘치는 상을 받은 것 같아 더 부끄러워지네요.”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 심사평 - 까다롭고 많은 글 술술 읽히게
번역 부문의 본선 마당은 풍성했다(고전 번역이 하나도 없어 아쉬웠지만). 분야도 다양했고 좋은 책과 좋은 번역이 만난 행운도 적지 않았다(이 행운은 결국 독자의 몫이다). 해외 저작이 그만큼 풍요롭고 그 수확에 대한 우리 출판계의 관심도 신속하고 다양해졌음을 말해준다.
맨눈으로 읽어서 몇 책을 골랐고 그 책들을 확대경을 들이대듯 원문과 대조하면서 거슬리는 실수를 추려냈다. 그 결과 ‘2666’과 ‘우리 본성의 착한 천사’를 최종심에 올려 놓고 검토와 논의를 거쳤다.
‘2666’은 대체로 무난하나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됐다. 소설에서는 괄호도 문체적 기능을 한다. 그것을 종종 풀어버린 것은 온당하지 않다. 첫 문장부터 원문의 맛을 살리지 못한 것도 안타깝다. 그럼에도 올해의 성과로 평가할 만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우리 본성의 착한 천사’를 쓴 스티븐 핑커는 문장가로 이름나 있을 만큼 글이 까다로운 편이다. 번역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책이 술술 읽히는 것은 역자의 내공과 실력 덕분이다. 큰 실수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역자의 다른 책도 읽어보았다. 대체로 괜찮았다. 과학책 전문 번역가로서 자신의 길을 다져온 이 젊은 번역가에게 더욱 격려와 기대를 보내고 싶어졌다.
김석희(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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