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8일, 한국일보, 변태섭 기자
능력중심 사회는 허울 뿐… 고졸자, 양질의 일자리 5% 안 돼
정권 바뀔 때마다 "학벌 사회 극복" MB 야심작 마이스터교 성과 미미
고졸자들 5년간 평균 이직 4차례, 공공기관도 취업자 중 7%에 그쳐
올해 2월 서울의 한 특성화고를 졸업한 박모(19)씨는 아직까지 ‘백수’다. 컴퓨터 학원을 다니며 자바 프로그래밍 등을 배워 전문성도 높였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지난달 원서 넣은 업체만 150여곳. 그 중 6곳에서 연락이 왔지만 모두 면접에서 떨어졌다. ‘고졸이지만 실력은 대졸자들 못지않다’는 박씨의 자부심은 산산조각 났다. “같은 일을 시킬 거라면 대졸자를 놔두고 고졸자를 뽑겠냐”,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대학부터 가라”는 주변의 잔소리가 새롭게 들리기 시작했다. “능력중심사회라는 말, 듣기는 좋죠. 그 말만 믿고 꿈을 품었는데 돌이켜보면 너무 순진했던 것 같아요.”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정부는 ‘학벌사회 극복’을 외치며 다양한 정책을 내놨다. 하지만 그 외침은 대부분 공염불로 끝나거나 교육 현장에 혼란을 발생시켰다.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는 “좋은 학벌을 쟁취하려는 것이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여기면서도 더욱 심각해지는 이유는 험난한 취업시장에서 ‘스펙’이 자신을 입증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라며 “양질의 일자리 창출, 고졸자와 대졸자의 임금 격차 완화가 수반되지 않은 정부 정책은 효과가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고졸 채용 활성화, 선취업ㆍ후진학 정책이 대표적인 예다.
허울 좋은 고졸 채용 활성화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이 올해 8월 발표한 ‘2014년 교육기본통계’에 따르면 올해 고졸자의 취업률은 33.5%였다. 2010년 25.9%, 2012년 29.3%에 비하면 증가추세다. 굴지의 대기업과 은행에 입사한 취업 성공담도 언론에 간간이 소개됐다.
하지만 서울 구로구의 한 특성화고 교사는 “좋은 일자리를 얻는 학생은 5% 미만 정도로 봐야 한다”며 “대다수는 열악한 중소기업에 취업한다”고 말했다. 일선 고교에서는 패스트푸드점ㆍ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졸업생들도 취업자로 산정해 교육청에 보고한다. 취업률이 높아야 특성화고 지원금을 받는데 유리해서다.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고졸자들이 떠밀려 취업하는 열악한 일자리는 잦은 이직으로 이어진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05년 2월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한 고졸자 357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올해 발표한 ‘고졸 청년 취업 실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은 취업 후 5년 동안 평균 3.9차례 회사를 옮겼다. 특히 특성화고 졸업자는 4.1차례 이직해 평균보다 높았다. “고졸 전문인력을 키우겠다”던 정부 목표와는 정반대의 결과다. 연구를 수행한 직업능력개발원의 윤형한 성과관리센터 소장은 “직장을 옮긴 30%는 오히려 임금이 떨어졌다. 좋은 일자리로의 이동이 쉽지 않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통계청의 학력별 임금격차 자료에 따르면 1998년엔 고졸자 평균 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대졸자 임금은 147이었으나 2011년에는 164로 격차가 커졌다.
정권 바뀌자 찬밥 된 고졸 채용 정책
고졸자 취업 강화는 학벌사회의 그늘을 걷어내는 핵심으로 여겨졌다. 고교만 나와도 좋은 직장을 얻고, 직업적인 전문성을 인정받으면 능력중심의 사회로 전환이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는 2012년 “신고졸 시대를 열겠다”고 선포했고, ▦대학의 특성화고졸재직자전형 규모 확대 ▦마이스터고 취업역량 강화 ▦공공기관 고졸 채용 확산 등을 골자로 한 ‘고졸시대 정착을 위한 선취업 후진학 방안’을 내놨다.
하지만 반짝 효과가 있었을 뿐이다. 공공기관의 고졸 취업자는 2013년 2,117명(전체의 13%)까지 늘었다가 올해는 2분기까지 697명(전체의 8%)에 그쳤다. 교육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김혜령 연구원은 “박근혜 정부 들어 경력단절여성 문제가 새롭게 이슈화하면서 정부 정책도 여성 고용에 맞춰져 있다”며 “기업들이 경력단절여성 채용에 신경 쓰다보니 고졸자 채용은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려 감소하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공공기관 303곳 중 234곳(77%)은 올해 상반기까지 고졸 직원을 아예 뽑지 않았다. 정부 정책에 따라 채용 계획이 오락가락하는 실정이니 고졸 취업 강화 정책이 제대로 정착하기 쉽지 않다.
‘취업 명품 학교’로 만들겠다던 마이스터고 역시 기대만큼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올해 마이스터고 졸업생 1,648명을 분석한 결과 57.5%는 적은 임금, 낮은 성장가능성, 적성 불일치 등을 이유로 이직을 계획 중이었다.
대학의 특성화고졸재직자전형은 고졸자들의 외면으로 사실상 껍데기만 남았다. 졸업 후 3년 이상 취업 경력이 필요하고, 재학하는 동안 회사에 재직해야 하는 등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2014학년도에 59개 대학에서 이 전형으로 3,788명을 모집했으나 대규모 미달사태가 났다. 정시모집 때 중앙대만 1.27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을 뿐 광운대, 건국대, 동국대, 홍익대 등 서울 소재 다른 대학은 모두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선취업ㆍ후진학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던 정부 외침이 무색해진 것이다.
사회안전망 구축ㆍ임금격차 해소 선행돼야
이명박 정부의 바통을 이어받아 ‘능력중심사회 구현’을 국정 목표로 추진 중인 박근혜 정부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학벌사회의 병폐를 해소하겠다며 도입한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이 대표적인 예다. NCS는 직무수행에 필요한 지식ㆍ기술ㆍ태도를 정리한 직무능력 지침서로 대학들이 이를 바탕으로 교육과정을 만들면 기업들이 대학의 간판을 따지지 않고, 현장에서 필요한 인재를 바로 취업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정부는 올해보다 25억원 늘어난 166억원을 내년 예산에 편성, NCS 학습교재 211개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개발한 분야를 보면 청각관리ㆍ토공기계 운전ㆍ용접ㆍ패션제품 생산ㆍ반찬 가공 등 대기업이나 4년제 대졸자가 관심 가질 분야와는 거리가 멀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NCS로는 학벌사회를 극복하기에 부족한 게 사실이다. 변죽만 울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역대 정부는 학력사회 극복을 위해 온갖 정책적인 시도를 벌였지만 임금격차 해소, 사회안전망 구축 등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법 보다는 일시적인 취업 정책에 쏠려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사회안전망이 미비한 상태에서 양질의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임금격차도 심화돼 학벌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대학ㆍ대학원 진학자가 늘고, 취업난으로 이들의 하향취업이 이어지면서 취업기회를 뺏긴 고졸자들이 대학에 등록하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학벌없는사회 김지애 사무처장은 “사회보장제도 같은 대책이 충분하지 않다 보니 개인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빠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경쟁에서 유리한 부유층이 좋은 일자리를 독식하는 구조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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