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1일 월요일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12--사르트르, 개인적 실존을 넘어 역사적 성찰로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45655.html


1960년 사르트르는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121인 선언에 참여하여 드골의 프랑스와 다른 또 하나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출간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에 대한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했다.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4부.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분열과 마르크스주의 개조

12. 장폴 사르트르: 역사의 총체성을 회복하기 13.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로 돌아가는 우회의 길
14. 위르겐 하버마스: 마르크스주의에서 근대성으로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없는 현대 프랑스 철학을 생각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을 넘어, 사르트르 없는 20세기 프랑스를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도 사르트르 없는 프랑스는, 샤를 모라스와 비시 정권, 드골, 니콜라 사르코지, 장마리 르펜으로 이어지는 프랑스, 곧 민족주의와 극우 파시즘으로 점철된 프랑스였을 것이다. 따라서 아마 약간의 과장이 없지는 않겠지만, 사르트르가 있어서 프랑스는, 20세기에도 프랑스 혁명의 후예로 자처할 수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르트르가 생전에, 그리고 사후에도 누리고 있는 이 대단한 영예는 그가 다방면의 천재였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는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될 만큼(하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이를 거부했다) 소설가이자 극작가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존재와 무> <변증법적 이성비판> 같은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걸작을 남긴 철학자였고, 2차 대전 이후 프랑스의 주요 정치 논쟁 및 운동에 관여했던 정치 비평가이자 운동가이기도 했다. 특히 사르트르는 20세기 후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및 좌파 정치의 향방을 규정했던 위대한 국외자(局外者)였다.
정치의 문제에서 본다면 2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의 사르트르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이전의 사르트르는 정치에 거의 관심이 없고, 예술과 문학에 심취해 있었다. 하지만 독일 점령 기간 동안 정치에 눈을 뜨면서 사르트르는 첫번째 ‘개종’을 한다. 전쟁 기간 동안 약간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뛰어든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부터였다. 그는 1945년 모리스 메를로퐁티, 시몬 드 보부아르 등과 더불어 학술지 <현대>(Les Temps modernes)를 창간하고 1948년에는 ‘민주혁명연합’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사회주의 유럽을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1952년 사르트르는 다시 한번 ‘개종’을 한다. 그때부터 사르트르는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련 사회주의 및 프랑스 공산당을 옹호하는 지적·정치적 활동을 수행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도 냉전이 전개되면서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을 나치스와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전체주의 국가로 고발하는 우파의 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이 소련의 지원 아래 북한의 침략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라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면서 소련에 대한 프랑스의 여론이 극히 악화되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난 것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르트르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수행하지 않고서는 반동 세력과 맞설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52년 발표된 ‘공산주의자들과 평화’라는 글에서 사르트르는 “이 글의 목적은 분명히 한정된 주제들에 관하여 내가 공산주의자들에 찬동한다는 점을 선언하기 위한 것이다. 단 이는 내 원칙에 입각한 추론에 기반을 둔 것이지 그들의 원칙에 따른 것이 아니다”라고 쓴다. 사르트르의 원칙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미 메를로퐁티가 <휴머니즘과 폭력>(1947)에서 천명했던 원칙과 거의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곧 사르트르는 역사의 객관적 방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소련 사회주의는 진보의 편에 서 있으며, 따라서 역사가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길 위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폭력이나 부조리함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른바 ‘진보적 폭력’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소련 사회주의를 옹호한 것이다.(에릭 베르네르 <폭력에서 전체주의로>)
사르트르는 공산당과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도 제기한다. 그는 당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당의 존재와 의지가 없이는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단순한 개인들의 모임으로서의 대중(masse)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는 통일성과 동일성에 대한 사르트르의 구별에 따른 것이다.
1972년 구트도르(무슬림 이주민 거주 지역)에서 벌어진 이주민 차별 반대 시위에서 미셸 푸코와 함께 있는 사르트르.
문제는 어떻게 개인적 총체성들이
역사 전체의 거대한 총체성으로
포괄될 수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보편적 총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어떤 정치적 실천이 올바른 것인지
판단이 불가능하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동일성은 삶의 조건의 동일성을 뜻한다. 곧 노동자라는 동일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해서, 그들이 동일한 경제적·객관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해서 모든 노동자들이 능동적인 정치적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가 프롤레타리아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바깥에 있는 어떤 매개가 필요하며, 이것이 곧 당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당에 대한 충성과 복종은 혁명적인 정치를 수행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해도 당이 옳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당은 정말 역사의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조직인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사르트르의 정교한 답변이 담겨 있는 책이 1960년에 출간된 <변증법적 이성비판>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인식 능력의 근거 및 한계를 설정하려고 했던 것처럼, 이 책은 역사의 인식 가능성의 근거와 한계를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칸트에게 자연에 대한 객관적 학문으로서 뉴턴 물리학이 존재했던 것처럼 사르트르에게는 역사에 대한 객관적 학문으로서 마르크스주의, 곧 역사유물론이 존재했다. 문제는 이처럼 역사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제시하는 학문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명제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마음대로, 곧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한 상황 아래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이미 주어지고 전승된 상황에서 만든다.”(<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이 명제에 입각하면 인간은 교조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간주한 것처럼 경제적 상황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수동적 산물이 아니라 역사를 창조하는 실천적 주체다. 하지만 실천적 주체, 행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 자신이 주장했던 것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이 주어진 사물성으로서의 즉자와 대립해 있는 대자가 아니며, 그 자신의 고유한 의미와 규정성을 지니고 있는 상황의 필연성에 입각하여 실천하고 행동하는 주체다. 따라서 인간이 수행하는 역사적 실천은 “자유와 필연성의 항구적이고 변증법적인 통일성”이다. 이로써 사르트르는 개인적 실존주의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역사적 차원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전통적인 역사유물론이 간과한 개인적 주체에 입각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하려는 사르트르의 노력은 여러 가지 심각한 난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 스스로 문제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만약 역사가 총체화라면, 마르크스주의는 엄밀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인간 역사가 다양한 개별 역사들로 해체된다면, 혹은 만약 투쟁을 규정하는 내재성의 관계 안에서 다른 쪽에 의한 한쪽의 부정이 원칙적으로 탈총체적이라면,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진리라고 할 수 없다.”(<변증법적 이성비판>)
역사의 총체성은 각각의 개인들이 개인적 실천을 통해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가는 개별적 총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개인적 총체성들이 더 커다란 총체성들 속으로 수렴되고, 다시 그 총체성들이 역사 전체의 거대한 총체성으로 포괄될 수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에게 이러한 보편적 총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역사에 의미가 없다면, 어떤 정치적 실천이 올바른 것인지 판단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미완성 대작인 이 책에서 이를 결코 입증할 수 없었다.
사르트르의 절정의 시기는 언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1960년이었을 것이다. 그해에 사르트르는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121인 선언에 참여하여 드골의 프랑스와 다른 또 하나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출간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에 대한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로 사르트르는 절정의 영예를 누리던 바로 그때 이미, 당시의 어떤 논평자가 표현하듯 “과거의 인물”(has-been)이 되어 있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사진 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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