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간색 비니에 파티 로고가 새겨진 점프 슈트 차림의 안상수 파티 교장. 무권위라는 파티의 지향점대로 그는 위계에서 자유로워 보였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담쟁이넝쿨이 예쁜 단층 건물 안에선 빨간색 비니에 점프슈트 차림의 안상수(63) 파주타이포그래피학교(PaTI·파티) 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년 전 만났을 때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교수 신분이던 그가 이제는 작은 현대식 도제학교의 설립자 겸 교장이 돼 파주출판도시로 출근하고 있었다. 안상수체를 개발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각디자이너 겸 타이포그래퍼가 정년퇴임을 몇 년 남겨두고 새길을 낸 마음이 궁금했다. 그가 끓여 낸 맛깔스런 무차를 마시며 우리는 그때 이야기부터 나눴다.
“1982년에 홍대에서 시간강사를 시작해 91년에 전임이 됐으니 강단에 선 것만 30년이 넘었죠. 모교 입학 때로 거슬러 가면 홍대 앞에서만 40년을 보낸 것이고…. 60세 환갑이 분기점이었어요. 내가 진짜 꿈꿔왔던 일을 해야 남은 삶에 생기를 얻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직장생활 잘하다 배낭여행 떠난 것과 같아요. 지금은 보너스 라이프입니다. 하하.”
“일이 놀이” 파티, 바우하우스와 통하다
기존 대학 시스템을 철로나 열차에 빗댄 그의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학점이나 학칙, 교수 승진 등 치밀하게 짜여온 제도는 50년이든 100년이든 시간이 흐를수록 공고해진다. 그 제도 안에선 4호 차에서 5호 차로 바꿔 탈 수는 있어도 선로에서 내려오기란 불가능하다. 새로운 학교가 필요하다, 완전히 새판을 짜야 한다는 열망이 오랫동안 내면에서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런 학교라면 스스로 대장이 돼야겠다는 결론을 얻었다.
파티에 대한 해외 예술계의 관심은 뜨겁다. 독일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연 ‘바우하우스의 무대 실험-인간, 공간, 기계’전에도 초대받아 파티 교실을 그대로 옮겨 워크숍 갤러리를 꾸몄다. 인터뷰를 한 날개집(교장실) 벽에는 바우하우스 포스터가 걸려 있었는데, 포스터에 파티 학생들이 바우하우스 전시 때 선보인 퍼포먼스 사진이 담겨 있었다. 그는 “바우하우스는 국립이고, 우린 아닌데…”라며 웃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바이마르에 개교해 1933년 나치에 의해 강제 폐교된 독일의 예술·디자인학교다. 새로운 형태의 예술가를 길러내며 20세기 예술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놀이가 일이 되고 일이 파티가 되고 파티가 놀이가 된다”는 바우하우스 교육철학이 파티와 통했다는 얘기다. 파티는 바우하우스 초청을 받아 오는 12월 독일에서 ‘파티 플레이스 바우하우스(PaTI plays Bauhaus)’ 공연을 연다. 2020년 재개교하는 바우하우스와 양해각서(MOU)를 맺으며 긴밀하게 협력하기로 했다.
-2013년 2월 개교해 올해 첫 대학원생이 배출됐으니 파티의 실험은 일단 성공인가요.
“2년제 대학원 격의 배곳은 더 배우는 학교라는 뜻으로 ‘더배곳’, 4년제 배곳은 큰학교라는 뜻으로 ‘한배곳’이라 합니다. 주시경 선생님이 운영한 한글 강습소인 ‘한글배곧’을 되살린 말이죠. 한배곳은 2년 후 첫 졸업생이 나와요. 여긴 학위가 없는 배곳입니다. 10년이나 20년 후, 50년 후 역사가 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를 평가하리라고 믿어요. 바우하우스 역시 학위가 있었던 대학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20세기는 바우하우스가 다 영향을 미쳤지요.”
-가르치던 분이 운영자가 됐으니 힘든 점이 많았을 것 같아요.
“빈손으로 출발해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어려운 만큼 즐겁고 짜릿해요. 파티는 디자인 프로젝트입니다. 한글을 디자인하듯 학교를 새롭고 멋지게,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방법으로 멋짓는 것이지요.”
▲ 파티에서 선생은 스승이고, 학생은 배움이다. 교장의 역할은 배움이나 스승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다. 그래서 안상수는 파티의 날개이며, 교장실은 날개집이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파티는 파티다
그는 파티를 디자인대안학교가 아니라 독립디자인학교라고 지칭했다. 대안은 제3의 길인데 이를 체제에 반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참 고를 말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파티는 파티다’라고 말합니다.
파티는 삶에 밀착된 디자인 교육을 지향한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최고의 디자이너를 배출하려는 우수 학교들과 달리 파티는 학생들에게 계속 ‘눈높이를 낮추어 삶에 밀착하라’고 권한다. 일반적으로 학교들이 상위 4% 이내 진입을 위한 경쟁 교육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두 발로 딛고 선 땅에 밀착된 디자이너를 기르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파티의 모토 중 하나가 바로 ‘생각하는 손’이다.
그는 인터뷰 도중 신영복의 최근작 『담론』을 꺼내더니 자신이 녹색 펜으로 밑줄 친 한 대목을 읽어줬다. “노동은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그는 “몸으로 체험할 때 상상력은 더 극대화된다”며 “머리가 대접받는 시대지만 파티는 손과 몸을 중시하는 실기학교”라고 말했다.
돈과 명예에 묶이지 않는 눈높이가 낮은 곳에서 창의력이 발현된다는 그의 말은 무재산, 무경쟁, 무권위라는 파티의 ‘3무’가 나온 배경이다. 파티는 ‘0에서 0으로’라는 모토 아래 건물이나 땅을 갖지 않는다. 또 성적표도 없다. 패스(Pass)냐, 페일(Fail)이냐가 있을 뿐이다. 파티에서 선생은 스승이고, 학생은 배움이다. 교장의 역할은 배움이나 스승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다. 그래서 안상수는 파티의 날개이며, 교장실은 날개집이다. 말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라는 신념을 반영한 것이다. 무권위는 한글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한글은 태생부터 백성들을 위한 글자였어요. 민중을 위한 글자였지요. 한글 자체가 타이포그래피의 뼈대입니다. 한국에서 타이포그래피학교를 운영한다는 것은 한글 정신이 바탕이 되고, 한글을 써야 한다는 걸 뜻하지요.” 큰 디자이너 세종 이도의 멋진 디자인 정신을 섬긴다는 점이 이채롭다. 파티를 이끌어가는 스승들은 국제적이다. 타이포그래피 워크숍을 여는 헬무트 슈미트를 비롯해 조각가 금누리, 건축가 승효상, 국악피아니스트 임동창 등 국내외의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스승으로 합류했다.
그가 ‘60세 이후의 삶’을 파티로 디자인하고 있다면 안상수체는 디자이너로서 분기점을 가져다줬다. 비유학파로 디자인의 변방 국가에서 디자인을 한다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심어준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일하던 잡지사가 부도 난 후 직장 생활을 끝내고 스튜디오를 차려 프리랜스 일을 시작한 해에 안체를 개발했어요. 지금 상황과도 비슷한데 어렵지만 조직에서 벗어나 에너지가 넘쳐날 때였지요. 스프링처럼 조여 있다가 툭 튀어나가는 것 같은.”
▲ 파티 한배곳에서 최문경 스승의 지도로 기초 타이포그래피 워크숍이 열리고 있다. ©파주타이포그래피학교
디자인 말고 ‘멋지음’ 어때요
당시 서른셋의 젊은 디자이너 안상수는 한 글꼴 회사의 부탁으로 안체를 개발해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이 회사는 “우리가 원하는 글자가 아니다”라며 퇴짜를 놓았다. “안체가 당시로선 굉장히 이상한 글자였거든요. 담당자가 엉뚱한 글자를 보고 난감해하던 표정이 지금도 생각나요.”
안상수체는 이듬해 1월 『과학동아』 창간호에 처음 쓰였다. 당시 이 잡지에 실린 제작노트에서 그는 “울퉁불퉁한 ‘과학동아’ 로고 타입은 시간과 노력이 덜 들고 제작이 수월하니 얼마나 과학적인가? 싼 글자란 곧 민주적인 글자가 아닐까”라고 썼다. 안체는 한글의 네모틀 글자에서 벗어나 만들기 쉽고, 곡선이 꺼끌꺼끌한 디지털 글자로 현대적 느낌을 준다. 그는 이 작업을 16비트짜리 컴퓨터로 해냈다.
그는 안상수체 개발과 함께 사이버 잡지 ‘보고서/보고서’를 내고, ‘생명평화무늬’ 디자인을 한 것을 가장 뿌듯한 일로 꼽았다. 세월호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남원 실상사에 생명평화무늬가 새겨진 생명평화깃대를 세우기도 했다. 생명평화무늬는 온 우주 삼라만상이 하나로 연결돼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 존재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한글 글꼴 디자인의 역사는 길지 않은데요.
“우리가 글꼴을 개발한 역사는 사실 한국전쟁 이후예요. 본격적인 시작은 최정호 선생님 이후였고, 그의 원도(原圖)도 모두 일본으로 가져가서 사진식자기에 탑재해 역수입한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하드웨어까지 만들어낸 것은 PC가 확산·보급된 1990년대 이후예요. 20여 년 만에 이만큼 한글꼴 환경이 발전한 것은 한글 스스로의 태생적 창의 구조나 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글은 온누리에 하나뿐인 디자인된 글자입니다.”
그는 한글 전도사다. 외래어인 디자인이 그를 통해 ‘멋지음’이란 우리말로 태어나 많은 공감을 얻기도 했다. “카메라를 멋있게 만들어 내고, 옷을 멋있게 하는 게 디자인입니다. 그냥 멋있게 만드는 게 아니라 지어내는 것이더라고요. ‘짓다’라는 말이 사람한테는 가장 중요한 동사입니다. 의식주가 모두 ‘짓다’예요. 먹는 밥을 짓고, 사는 집을 짓고, 입는 옷을 짓잖아요. 디자인을 우리말로 한다면 그것은 ‘멋지음’이다, 디자인을 하는 행위는 ‘멋짓’이라는 생각이 든 거죠.”
-우리나라 도시 풍경은 정돈이 안 된 느낌입니다.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으로 계신 데다 도로 표지판, 고궁 표지판 같은 공공 디자인 작업도 많이 해왔기 때문에 할 말이 많으실 텐데요.
“간판은 난립해 있고 버스 번호판 크기는 제각각이죠. 어떤 번호판은 조도가 너무 밝고요. 주유소는 왜 그렇게 화려해야 하는지? 온 나라가 브랜드화돼 갑니다. 물론 카오스적 매력도 있어요.(웃음) 하지만 삶 자체가 잔치판처럼 매일 취한 듯 살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시각 질서와 자유로움의 어울림이 가장 이상적이에요. 결국 민도가 올라가야 해결될 문제죠.”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정의한다면.
“어울림의 멋짓, 삶의 멋짓입니다. 평화를 순우리말로 번역할 때 가장 가까운 말이 어울림이지요. 어울림은 아름다움의 본질이자 삶의 본질입니다. 또 삶을 배제한 어울림은 없어요. 디자인이란 제 삶 그 자체입니다. 디자인이란 제 멋을 지어내는 것이듯 나중에 숨을 거둘 때 ‘내 삶은 멋스러웠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제 삶을 스스로 멋지어가는 상태. 이게 디자인 아닐까요? 그러니까 디자인을 통해 제 삶을 완성해나가는 것이지요.”
안상수는….
시각디자이너, 타이포그래퍼. 홍익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후 대기업 디자인실을 다녔으며 월간 『마당』, 월간 『멋』의 아트디렉터로 활약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한글 글꼴 디자인과 한글 타이포그래픽 디자인을 이끌어왔다. 안상수체, 이상체, 미르체, 마노체 등 다양한 한글 글꼴을 만들었다. “우리 디자인계의 정말 희귀한 모더니스트”(디자인평론가 최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7년 구텐베르크상을 수상했다. 2012년 8월 말 홍익대 디자인학부 교수직을 그만두고 파주타이포그래피학교를 세웠다. 예비학교를 거쳐 이듬해 2월 정식 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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