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마을을 생각하다
최근 어린이집 교사의 아동 학대 사건으로 매스컴이 떠들썩하다. 생면부지인 남이 들어도 기막힌 일인데, 피해 아동의 부모는 어떨까. 억장이 무너져도 수백 번은 무너질 것이다. 다른 부모들도 언제 자기 아이가 그런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어 마치 폭행을 당한 것만큼이나 불안하지만, 두렵다고 애를 끼고 살 수도 없다. 맞벌이라 당장 직장을 그만둘 수 없고, 전업주부라 하더라도 고립된 도시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만만치 않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보장하면서 돌봄의 전문성을 갖춘다는 관점에서, '육아'를 우리 사회의 절실한 과제로 삼고 대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를 돌보는 일이 시장 원리에 내맡겨지거나 공공의 행정 관리만으로는 충분히 달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돌봄이란 기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전제로 하며, 생명에 대한 정성으로 이뤄지는 특별한 노동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친밀한 관계란, 단지 서로 친한 사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대가를 조건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지불한 대가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요구하는 소비자 입장을 넘어서는 관계를 말한다. 손주를 맡아주는 할머니, 조카와 놀아주는 삼촌, 친구네 막내 동생을 돌보는 언니처럼 친밀함 속에서 비롯되는 '책임감'이 있는 관계이다. 돈을 매개로 성립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우러나오는 윤리적인 책임감이라서 돌봄의 만족도도 높다. 친밀한 관계가 주는 익숙함과 편안함은 심리적인 안정감과 신뢰감을 준다.
이미 가족의 해체가 일반적인 추세이고, 가족이 있어도 그 생활은 이미 제각각인 오늘날의 세태 속에서 친밀한 관계는 다시 '마을'일 수밖에 없다.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길거리에서 심심찮게 마주치면 차 한 잔, 술 한 잔 할 수 있는 관계…. 불같이 화를 내도 뒤끝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 노엽지 않고, 다 된다고 큰소리치지만 말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관계, 잘 아는 윗집 아이가 내는 층간 소음은 작게 들린다는 그 관계가 바로 마을에서 이뤄진다.
내 아이 내가 책임지고 알아서 길러야 하는 세상이다 보니, 부모는 애가 탄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집이나 그렇지 않는 집이나 애가 타긴 매한가지다. 우리 아이만 뒤처지면 어쩌나 하지만 형편이 안 되는 집은 그만큼 뒷바라지 여력이 달리니, 그나마 애한테 쏟아 붓고 나면 살림살이가 간당간당해 사는 게 늘 불안하다. 남의 집 애들은 잘 크는데 내 새끼만 부실한 것만 같은 게 모든 부모의 똑같은 심정일 거다. '엄친아', '엄친딸'의 위세에 아이나 부모나 주눅이 들긴 마찬가지다.
"그 집 애 명식이, 이제 다 컸더구먼?"
"어? 그래."
우리 아이 뭘 보고 저러나 싶지만, 그래도 툭 던지는 동네 엄마의 한마디는 커다란 위안이고 안심이다. 애 키우는 일이 이웃집 엄마 때문에 더 불안해지는 세상에 이웃집 엄마와 합심해서 애들을 같이 길러보자는 것이다. 마을에서 함께.
'마을 만들기'가 아니라 '마을 살이'
도시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골목 곳곳에서 소소하게 꼬물꼬물 마을이 움터왔다. 어린아이들 공동 육아와 초등학생 방과 후 교실로 엄마가 만나 '이웃'이 만들어지고, 그 이웃이 '동네'로 야금야금 넓어졌다. 시민 단체 사무실 한쪽이 큰 아이들에겐 제집 마냥 들락거리는 작은 도서관이 되고, 아파트 관리실 일부가 마을 사랑방으로 변신했다. 아이들 돌봄으로 시작된 마을 살이가 협동조합으로, 마을 축제로, 다양한 마을 사업으로 번졌다. 이렇게 넓어진 마을의 관계망은 다시 아이들이 안심하고 누비는 안전지대가 된다.
계획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한두 살 커감에 따라, 함께 이룬 협동의 경험도 차곡차곡 쌓여가고 친밀한 이웃들도 늘어간다. 마을은 이렇게 절실하고 시급한 생활의 필요에 따라 하소연하고 궁리해 협동으로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이웃과의 관계망이다. 그래서 마을은 거창한 마스터플랜으로 건물 짓듯 만들어지는 게 결코 아니다. 아이들 돌봄이든, 깨끗한 먹을거리든, 동네 위험한 시설 문제든, 마을버스 노선 문제든, 그저 살면서 필요한 것들을 친밀한 이웃들과 함께 해결하다 보면 마을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만들기'가 아니라 '마을 살이'다.
특히 모든 부모의 공통 과제인 아이를 돌보는 일은 마을살이에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한다. 아이를 돌보면서 마을도 만드는 일거양득의 결실을 거두는 일인 셈이다. 부모들의 형편과 조건에 따라 시도해볼 수 있는, 마을에서 아이 함께 기르는 여러 방법들이 있다.
우선 20여 년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미 성공적인 육아 시스템으로 검증된 공동육아협동조합이 단연 일순위로 꼽힌다. 부모들이 출자하고 운영하는 공동 육아는 친밀한 관계와 협동으로 운영하는 마을 육아의 대표적인 대안 모델이다. 1994년 성미산마을에서 처음 시도된 이래 지금은 전국에 걸쳐 약 80여 개의 어린이집과 방과 후 공동육아협동조합이 설립 되었다.
최근 서울시는 시가 공급하는 임대 아파트(강서구 가양동)에 공동육아협동조합 프로그램을 적용해서, 아파트의 설계에서부터 입주 예정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시공한 바 있다. 대부분의 입주자는 젊은 맞벌이 부부들로, 자기들이 사는 아파트 안에 공동 육아 시설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어 육아 문제와 주거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국공립 어린이집에서 '부모 참여형'으로 운영 시스템을 혁신하는 모델도 적극적으로 시도해볼 만하다. 어린이집을 직접 설립하고 운영하는 공동육아협동조합에 비해 부모들의 부담이 적으면서도, 교육 과정이나 어린이집 운영에 부모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해서 투명성과 신뢰도를 대폭 높이고 결과적으로 부모들의 만족도를 크게 개선할 수 있는 대안적인 모델이다. 현재 (사)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이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 곳은 모두 세 군데인데, 마포구 '성미 어린이집'과 은평구 뉴타운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푸른숲 어린이집', 마포구 아현동 재개발 지구에 있는 '산마루 어린이집'이다.
이보다 좀 더 간편하고 쉽게 시도해볼 수 있는 모델은 품앗이 공동 육아다. 말 그대로 부모들이 품앗이로 돌아가며 아이를 돌보는 모델이다. 각자의 집을 돌거나 마땅한 공간을 정해서 편한 요일을 하루씩 나누어 맡아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아이들을 부모가 직접 돌보기 때문에 운영상의 복잡한 절차나 조직이 필요치 않으니, 마음 맞는 부모들이 모이면 바로 쉽게 시도해볼 수 있다. 제 아이를 여러 부모가 번갈아 살피게 되니 아이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게 되고, 이를 서로 공유하며 토론하다 보면 부모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학습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은평구의 사례를 보면, 꿈나무 도서관에서 열린 '북스타트' 모임을 통해 알게 된 14명의 엄마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품앗이 동화책 읽어주기' 모임에서 시작됐다. 이후 각종 체험 놀이와 학습 프로그램, 그리고 다양한 소모임으로 이어졌고 소식지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응암동에 위치한 신사종합사회복지관과 연이 닿아 품앗이 육아를 위한 전용 공간까지 얻었다. 14명 엄마들의 모임은 이태 만에 100여 명이 넘는 모임으로 훌쩍 자랐다. 그만큼 공동 육아에 대한 엄마들의 필요가 절실했던 것이다.
최근 서울시에서는 여성가족실에서 지원하는 부모 커뮤니티 사업이나 공동 육아 지원 사업을 통해 품앗이 공동 육아의 다양한 사례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시작한 품앗이 공동 육아가 좀 더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공동 육아협동조합으로 발전해가는 경우도 있다.
왜 '마을 돌봄'인가?
가끔 어르신들이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하신다. 사람을 거둔들 그 공은 없다는 얘기인데, 그만큼 어려우니 아예 하지 말라는 건지, 거두더라도 애초에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인지, 아무튼 쉽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제 아이 건사하는 일도 버거운데, 남의 아이를 돌보는 일이 쉬울 리 없다. 하지만 인간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종(種)을 이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육아는 결코 그 부모 개인만의 일일 수 없다. 원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인류학적 고찰까지 하지 않더라도 가까운 과거의 우리 사회만 봐도 그렇다. 마냥 어렵고 미운 시어머니이지만 육아에서만큼은 존재만으로도 안심이 됐고, 집안의 동서들과 친척들, 이웃들이 함께 아이들을 돌보며 키우는 '공동 육아'가 기본이었다.
하지만 급속한 도시화로 그 대가족의 혈연이 잘게 쪼개져 핵가족으로 분화되고, 부모들은 맞벌이에 정신없이 휘둘리면서 육아에 새로운 사회적 대안이 필요해진 것이다.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사회적 대안이란 게 결국 사설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는 것인데, 이는 기본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바탕이 되지 않고 육아서비스의 공급과 수요라는 시장적 관계로 이뤄지다 보니, 아동 학대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경제 형편에 따라 육아 서비스의 질적 수준이 결정돼 차별 현상이 점점 극심해지는 사회 문제를 낳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육아를 부모 당사자의 책임으로 떠맡기지 않고 사회가 책임지면서도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전문적인 보육이 가능한 환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바로 '마을 돌봄'이다. 마을이라는 친밀한 관계가 있고,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이웃들 간의 신뢰 속에서 아이들을 함께 돌보는 것이다. 돌봄이 필요한 주민들이 모여 계획을 짜고, 이웃 중에서 돌봄이 능숙한 주민이 나서서 아이들을 맡는 것이다.
한 아이가 크는 데에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보통은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웃이 궁금해지고 동네가 눈에 들어온다. 아이를 잠시도 품에서 내려놓을 수 없을 때는 지친 육신과 우울한 심정을 하소연할 이웃이, 함께 의논하고 품을 나눌 이웃이 절실하다.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서는 집 앞 골목길이 다시 보이고,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놀 운동장이 걱정되고, 아이가 매일 지나칠 문방구 앞 게임기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제야 비로소 마을이 내 아이가 살아갈 터전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육아라는 절실하고 시급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과 만나고 마을을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렇게 형성된 이웃 관계망이 다시 내 아이가 살아갈 삶의 공간이 된다. '내 새끼'에서 출발했지만, '우리 새끼'로 나아가고, '동네 아이들'로 확장된다. 물론 그 속에서 내 아이도 잘 자랄 것이다. 이렇듯 마을에서 함께 돌보는 공동육아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웃과 마을을 재구성함으로써, 종국에는 "누구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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