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등장과 퇴장이었다. 지난 2004년, 박용성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서울대 강연에서 “대학이 교육의 장, 학문의 장이라는 헛소리는 이미 옛이야기다. 이제는 ‘직업교육소’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해 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후 그는 두산이 인수한 중앙대의 이사장이 되어 학교를 직접 운영했다. 그리고 최근 그 정점에서 한편의 시를 연상케 하는 말을 남기며 일선에서 퇴장했다. 학제개편에 반대하는 교수들을 가리켜 “그들이 제 목을 쳐달라고 목을 길게 뺐는데 안 쳐주면 예의가 아니다. 가장 피가 많이 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내가 쳐줄 것”이라고 표현했다. 섬뜩하다.
중앙대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다
‘두산대’라 불리는 중앙대는 그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빠르고 반대의견을 처리(?)하는 방식도 과격하다. 그런데 이것은 ‘한 개인’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 아니다. 중앙대 내부게시판에는 ‘이사장님 다시 돌아오세요’, ‘학교개혁 반대하는 교수들에게 책임을 묻자!’라는 학생들의 글이 수두룩하고 추천수도 상당하다. 황우여 교육부장관이 “학사운영, 교원연구, 산학협력 등 모든 분야에서 혁신을 꾸준히 추구해온 대학구조개혁의 모범”이라면서 취임 후 첫 행선지로 선택한 대학이 바로 중앙대였다.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중앙대의 사례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달라진 시대의 공기를 정확히 대변하고 있다.
‘대학이 직업교육소임을 인정하라’는 십여년 전의 말은 시대착오적 발언이 아니었다. 그 이후, 모든 대학이 기업이 시키는 대로 환골탈태했다[이때가 ‘취업3종세트’(학벌 학점 토익)가 등장할 때였다. 그런데 지금은 ‘9종세트’(3종+어학연수 자격증 공모전 인턴 사회봉사 성형수술)니 대학은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취업률에 따라 학문의 생사가 결정되었고 기업이 싫어할 강좌는 ‘리더십’, ‘면접연습’ 등의 강좌로 대체되었다. ‘경영’은 대학의 최고가치가 되었고 ‘경영학’은 기하급수로 그 크기가 부풀었다. 2014년 기준으로 전국 4년제 대학(교육대, 산업대 제외) 189개의 경영학 계열 학과가 무려 686개다. 학교당 서너개의 경영학 관련 전공이 개설되어 있는데 이는 인문·사회계열 전체인원 중 21%에 해당한다.
경영학이 학교 안에서 독점적 권력을 갖게 되면서 학교행정도 그에 걸맞게 이루어졌다. 수익성이 좋다는 이유로 캠퍼스 곳곳에 상업시절이 즐비해지면서 대학구성원들은 자본의 편리함에 길들여졌고 그만큼 지출비용은 많아졌다. 최근 청소·경비노동자의 열악한 처우 및 고용승계 문제를 놓고 대학들이 시끄러워진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2014년, 고용부에서 전국 160개 대학의 청소노동자 근로조건을 조사했는데 정부가 정한 해당직종 노임단가(6945원)를 준수한 곳은 단 한곳도 없었다. ‘모든’ 대학이 그런(?)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2014년 기준 5210원) 이상을 지출하는 걸 ‘낭비’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무엇을 토론한들 결론은 하나다
대학 내 학과들이 특정한 잣대로 정리(?)되면서 대학 안에는 과거와는 다른 가치관이 자리잡는다. 경영학이 대세가 된 곳에서의 토론은 ‘인간의 노동을 철저하게 비용, 숫자로 계산할 수 있음’을 더 자주 확인하고 그 정당성을 듣는 자리에 불과하다. 여기서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할수록 사회적 약자를 더 외면하게 된다. 효율성의 저울 위에서 ‘자본의 가치에 억압받는 경우들’은 단지 ‘부수적 피해’에 그치고 만다. 나아가 비상식도 정당화된다. ‘교수의 횡령을 고발한 동료교수를 학교가 징계’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지만, 이런 공간에서 토론을 하게 되면 ‘이 사실을 외부로 알리면서 학교 이미지에 엄청난 손상을 입었고 이에 대학서열이 하락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내부고발자 색출은 정당하다’는 결론이 도출되고 지지를 얻는다.
나는 얼마 전 『진격의 대학교: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문학동네 2015)이란 책을 출간했는데, 여기에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처음에 나는 책 제목을 ‘대학살’로 정했다. 말 그대로 대학(大學)이 죽었다(殺)는 뜻이었다. 접하는 사례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내가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학은 죽은 게 아니었다. 너무나도 생생하게, ‘자본’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속도를 문제 삼는 학과들이 사라지는 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일부였다. 이것은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행보’로 인정받았다. 모든 대학이 이런 가치를 지향했고 그중 중앙대가 으뜸이었을 뿐이다.
어떤 미래가 등장할까?
대학이 한 방향으로만 진격하는 것은 과연 당신과 무관한 일일까? ‘모두를’ 하나의 가치관에 묶어버리는 곳에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사회를 기대할 수 없다. 사고방식이 획일화되어 있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피해를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라고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이웃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다닐 회사의 동료들,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공무원들, 내 자녀가 거쳐가는 공간에 있을 교사들, 경비원이 된 내 아버지가 상대할 아파트 입주민들, 대중의 여가를 책임질 영화기획자, 그리고 청와대에 앉아 있을 사람 등이 모두 ‘자본의 수익모델’에 입각해 세상만사를 판단한다고 상상해보라. 이야말로 섬뜩하지 아니한가.
오찬호 /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2015.5.6 ⓒ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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