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이광석 교수는 IT와 인문학, 더 나아가 디지털과 미디어, 예술과 사회를 결합해 사유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상당히 귀한 저자라고 생각한다. 그가 귀하다는 건 흔치 않기 때문이고, 흔치 않다는 말은 한마디로 튄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생각은 2010년에 펴낸 <사이방가르드:개입의 예술, 저항의 미디어>를 읽은 뒤부터 계속 품어온 생각이다. ‘사이방가르드’란 ‘사이버’와 ‘아방가르드’를 합한 조어로 이것을 풀어보면 디지털 뉴미디어 시대의 아방가르드란 의미다. <뉴아트행동주의>를 접하기 전부터 이 책이 전작 <사이방가르드>의 국내 실천 사례 중심의 책이 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마침 책을 펼쳐드니 ‘들어가는 글’부터 그 지점을 따로 밝혀두고 있었다.
“<사이방가르드>가 문화 실천과 현실 개입에 있어서 주로 해외 예술·미디어 행동의 구체적 사례에 천착했다면, <뉴아트행동주의>는 국내에서 주목할 만한 미디어 저항과 비판적 예술·문화적 사례를 살피는 데 그 의의를 두고 있다. (중략) 이 책에서 언급하는 전술미디어란 특정한 정치 이슈와 관련해 예술행동, 문화간섭, 대안미디어운동, 전자저항을 가로지르며 미디어 수용 주체들이 현대 자본주의에 따른 ‘삶권력’의 파동으로부터 자신의 주권 공간을 만들어나가는 문화 실천과 현실 개입의 운동을 지칭한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든 ‘예술(Art)’이라 부를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처럼 무엇이든 예술이 되는 현상이 빚어지게 된 것은 예술계가 스스로 오래된 전통(‘예술’과 ‘생활’의 합치)으로 회귀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순수예술이라는 개념과 제도가 어디로부터 언제 왔는지를 살펴야 한다. 오늘날 일부에서는 진지한 순수예술의 종말을 점치곤 하지만, 사실 순수예술의 개념 자체가 길어야 200~300년 전 서구 근대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관념이다. 래리 쉬너의 <예술의 탄생>(들녘, 2007)에 따르면, 예술을 생활과 분리된 개념으로 바라보는 근대 예술의 관점, 그 이전에는 훨씬 광범위하고 실용적인 예술 체계가 2000년이 넘게 지속되었으며, ‘무엇이든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세상’의 도래는 오래된 전통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자 18세기에 확립된 특정 사회제도가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정치 풍자와 패러디로 널리 알려진 조습 작가의 작품 ‘5·16’. |
<뉴아트행동주의>는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고, 예술이 되는 세상에서 엘리트 작가주의가 아닌 자발적 선택과 의지로 ‘아마추어리즘’을 실천하는 아티스트 18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가 문화실천가라고 부르는 이들은 예술 교육의 정통 코스를 밟았지만, 스스로 아티스트라는 호명 속에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촛불소녀’ 캐릭터를 디자인했던 박활민을 비롯해 정치 풍자와 패러디로 널리 알려진 조습, 박정희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풍자 퍼포먼스로 일베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강영민, 온갖 장르의 미디어를 종횡으로 넘나드는 미디어아트의 양아치, 일상생활과 예술 그리고 문화를 결합시킨 문화기획자 유알아트 김영현 등등의 문화실천 행위는 ‘뉴아트’이자 동시에 체제에 흠집을 내는 미디어 저항, 비판적 문화간섭(Cultural Jamming) 행위이다.
‘문제아’ ‘꼴통들’의 다른 이름, 문화실천가
저자는 이들을 가리켜 ‘뉴아트 행동주의’라 쓰지만, 누군가에게는 문제아, 꼴통들이다. 사실 긍정의 의미이든 부정의 의미이든, 이들을 문제아나 꼴통이라 부르든 그러지 않든 간에 이들이 문화실천가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사회란 인위적으로 조성된 거대한 사람의 호수다. 자연은 인간이 간섭하지 않을수록 안정적 생태계로 순환하지만, 인간이 만든 것은 무엇이나 지속적인 관심과 개입이 요구된다. 흐름이 멈춘 호수는 결국 썩듯이 흐름이 막힌 사회도 병들기 마련인데,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정치체제일수록 균열과 열림을 통한 흐름 대신 멸균포장을 통한 해법을 선호해 증세를 악화시킨다. 과연 이들의 재기 발랄한 실험 활극은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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