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김익한 명지대학교 교수는 운전 중이었다. 보수 성향 원로 한분과 함께 차를 탔다. 다들 그랬던 것처럼, 사고 소식을 접하고 얼마 뒤 '전원 구조' 뉴스를 들었다. 잠시 마음을 놓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엄청나게 죽었겠구나.'
"박근혜한테 전화해서 진도에 내려가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동승한 원로에게 말했다. "에이, 박근혜가 내 말을 들어야 말이지."
2014년 4월 16일, 차 안에서 나눈 이 대화를 기억하는 게, 그는 괴롭다. 중앙권력만 바라보는 습관, 엘리트주의. 그가 평소 비판하던 것들이 이 대화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깊이 반성했다. 생각하면 지금도 낯이 뜨겁다. 그날 이후, 그의 행보는 알려진 대로다. 기록학 전문가인 그는 동료들을 모아 진도로 내려갔다. '세월호 시민아카이브 네트워크'를 꾸리고,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모든 기록을 정리했다. 이는 '416기억저장소' 개소로 이어졌다. 세월호에 탔던 아이들이 주로 살았던, 경기도 안산시 고잔동에 있다. 그는 매주 화요일마다 이곳으로 출근한다.
"아이들이 정말 꿈꿨던 게 뭔지 몰랐으면서, 그저 '학원 가라'고만…"
지난 화요일(4월 28일), 기자는 고잔동을 찾았다. 그는 <프레시안>이 최근 진행한 '고잔동에서 온 편지' 기획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엄마아빠가 기억하는 아이들 이야기가 주로 기사에 담겼다. 이걸 보고, '아이들의 삶이 참으로 아름다웠는데,우리가 잘못해서 아이들이 수장됐다'라고 생각하는데 그친다면 잘못이다. 기사를 쓴 취지와도 다르리라고 본다. 아이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잘 곱씹어보면,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고, 어떻게 살고자 했는지가 드러난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걸 몰랐다. 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이들이 정말 꿈꾸는 게 무엇인지 모르면서, '학원 시간 늦지 않았니'라고 할 뿐이었다."
이어 그는 "희생된 아이들이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이날 나눈 대화의 요점이다. 지식인, 엘리트의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방식은 안 된다. 아이들과 유가족의 자리에 서야 한다.
아이들의 가르침을 가장 깊이 받아들인 이들은, 당연히 유가족들이다.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엄마아빠들 이야기 들어보면, 완벽하게 일치한다. 다들 '돈이 별 것 아니다'라고 한다. 먹고살 만큼 돈 있으니까, 돈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한다. 짐승 같은 자들이 유가족들에게 보상금 8억 원을 준다는 둥 떠들어도, 꿋꿋한 이유는 돈 욕심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공통점은 또 있다.
"'경쟁사회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남은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는 유가족을 본 적이 없다. 이건 회한 때문이다. 떠난 아이들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 채, 공부하라고 등 떠밀기만 했다는 회한이다."
유가족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그는 기억의 힘을 곱씹게 된다. 아이들의 기억이 유가족들을 바꿨다. 이른바 진보 진영조차 자유롭지 않은, 공부와 성공의 권위. 그걸 깼다. 하지만 기억의 힘은 한계가 있다. 그 힘으로 사회를 바꾸지 않으면, 기억은 결국 지워진다. 잊지 않기 위한 싸움에서 밀리는 순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참사 이전과 다를 게 없어진다.
"'기억 투쟁'…작고 긴 이야기가 진실로 남는다"
그가 '기억 투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다. 그의 전공이기도 하다. 기억과 기록 사이를 오가는 게 그가 하는 일이다. 기록에 기억을 담고, 기록으로 기억을 불러낸다.
"'기억 투쟁'이라는 말을 쓴다는 건, 반대 측이 있다는 이야기다. 투쟁이란 상대방이 있기 마련이니까. 기억을 왜곡시키거나 지워버리려는 힘이 있다. 지배 권력만 그러려고 하는 게 아니다. 사회 시스템 전체를 통해 이런 힘이 작동한다. 여기에 맞서 싸우는 게 '기억 투쟁'이다. 그 핵심에는 기록을 통해 기억을 불러내는 행위가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벌써 잊었다. 지난 4월 29일 재보선이 여당의 압승으로 끝나자, 정부는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는다.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이 차관회의를 통과했다. 세월호 참사 진상 조사를 위한 필수 요건들이 빠진 시행령이다. 시행령 철회를 위한 싸움이 진행 중이지만, 대다수 언론의 관심은 이미 식었다. 이렇게 잊히는 걸까.
"언론을 통해 많이 소개된 사실이 꼭 기억을 지배하는 건 아니다. 작고 긴 이야기가 진실로 남는다. 그게 씨앗이 돼 기억을 장악한다. 얼마 전에 416기억저장소 2호관이 문을 열었다. 아이들의 사진과 기록이 담겼다. 대단한 홍보를 한 것도 아닌데,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다. 이들이 긴 싸움을 이끌어가는 주역이다. 기억 투쟁은 긴 싸움이다."
'기억을 지배하는 작고 긴 이야기'. 그가 예로 든 건 '밥상 이야기'였다. 언론에 많이 소개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의 기억을 지배한다. 기자도 고잔동 취재를 하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아이가 나이키 신발 사달라고 밥상에서 투정을 부렸다. 결국 '돈 이야기'라고 생각한, 부모는 밥상에서 다투기 시작했다. 돈 이야기가 꼬리를 물면서, 다툼도 커졌다. 아이가 짜증내며 일어섰다. 아빠는 아이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하고, 돈 벌러 나갔다. 나이키 신발 살 돈을 벌려고."
이와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는 유가족이 많다. 이런 기억은 거대한 후회와 반성으로 돌아온다. 돈과 공부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런 유가족들에게 정부는 돈 이야기를 한다. 어찌나 한심한 짓인지.
"세월호 참사의 기억, '사회적 삶'으로 이어져야"
김 교수는 이어 '자기화'라는 말을 꺼냈다.
"기억하는 게 끝이 아니다. 핵심은 '자기화'다. 자기 문제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4월 16일, 아이들이 바다에 잠기고 있었다. 그걸 텔레비전으로 뻔히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손 놓고 있던 나 역시 아이들을 수장시킨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식으로 '자기화'하는 게 일반적인 경우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서, 자기를 매개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소설가 황석영이 그랬다. '길 가던 걸인의 죽음에도 죄의식을 느낀다'라고. '나도 가해자'라는 식의 '자기화'가 자기 부정으로까지 가지는 않을 게다. 사회적 삶을 살지 않았던 데 대한 회한이 든다. 그래서 사회적 삶에 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세월호 참사를 자기화 하는 일반적인 방식일 게다. 기억이란 결국 실천과 짝을 이루는 것이다. 실천할 것이므로 기억한다. 세월호 참사를 자기화하면, 사회적 삶에 대한 실천으로 이어진다."
김 교수는 역사를 공부했다. 역사학계에서 주목받는 논문도 여러 편 썼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기존 역사학의 관성에 불만이 많다. 진보적 관점에서 역사 서술을 해서 주류 역사학에 맞선다. 이런 식의 담론 투쟁이 역사학계의 큰 흐름이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계몽과 훈육이라는 틀에선 진보와 보수가 마찬가지라는 게다. 지식인이 자기 문제의식으로 기록을 정리해서 가르치는 방식은 여전하다는 것. 그는 프랑스 역사가 피에르 노라의 '기억의 장' 프로젝트를 자주 이야기했다. 과학적인 실증을 무기로 삼는 역사가가 보기에, 주관적인 기억이란 그저 의심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결국 역사가의 작업이 쌓이는 데 비례해서 자생적인 기억은 파괴당한다. 그런데 역사가의 이런 태도가 과연 옳은가. 이게 피에르 노라의 문제의식이다.
"괴물은 괴물을 이길 수 없다"
김 교수가 참가한 '416기억저장소'도 이런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역사가, 혹은 다른 전문가가 '세월호 참사'를 자기 방식으로 기록하게끔 하지 않는다. 기록이 스스로 말하게끔 한다. 이곳에서도 많은 글이 생산되지만, 그건 함께 실천하는 이들의 글이다. 현장으로부터 떨어진, 객관적 자리에서 쓴 글이 아니다.
엘리트주의, 계몽주의에 대한 반대. 이런 측면에선 피에르 노라의 작업보다 한 발 더 나간다. 그는 "진보 지식인이 갖고 있는 엘리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주간 프레시안 뷰'에 격주 간으로 글을 쓰는 그는, 이 지면을 통해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전했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들은 '도우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지식인, 엘리트가 사람들을 이끌려 하는 순간, 괴물이 된다. 약자를 짓밟는 나쁜 괴물에 맞서 싸우다, 어느 새 스스로 괴물이 된 지식인이 많다. 그런데 괴물은 괴물을 이길 수 없다.괴물을 이기는 건 난장이다. 이게 그의 생각이다.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고 했다. 이 오랜 화두를 이제 알 것 같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늘 지는 싸움만 했다. 중앙권력에 맞선 싸움은 모두 패했다. 내 궁금증은 이 대목이다. 이렇게 늘 지기만 했는데, 역사는 왜 큰 틀에서 진보해 왔는가. 중앙권력을 바라보는 엘리트의 시선으론 답을 찾을 수 없다. 표면적으론 지는 듯 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감동과 결실들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이런 게 모여서 변화가 생긴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벌어진 싸움 역시 우리가 지기만 했다. 엘리트의 시선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삶의 현장에 뿌리 내린 시각으로 보면 다를 것이다.
416기억저장소에 모인 이들 역시 주말마다 서울 광화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한다. 하지만 그게 우리 활동의 본질적인 영역은 아니다. 우리는 박근혜 정부, 혹은 안산시와 직접 투쟁하지 않는다. 현장에 뿌리박고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 그게 우리의 목적이다."
"유가족을 돕는 게 아니다…'스스로 실천하는 장'을 연다"
밥상 공동체, 교육 공동체. 416기억저장소를 중심으로 싹 트는 모임들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떠난 아이들로부터 깊은 가르침을 받았다. 경쟁에서 이기는 삶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이런 가르침을 잊지 않는다면, 답은 결국 공동체다. 우리 삶은 서로 연결돼 있다. 내 삶이 바뀌면, 다른 이들의 삶도 변한다. 남은 아이들을 함께 가르치고, 밥 먹이면서 꾸려진 공동체는 "우리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터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이미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김 교수는 송전탑 건설을 막기 위해 싸우는 '밀양 할머니들'을 예로 들었다. 삶의 터전에서 부딪힌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공동체, 이들의 싸움은 지역적이면서 동시에 전국적이다.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근본적인 방식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는 까닭이다.
김 교수는 "416기억저장소는 유가족을 돕는 활동을 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인터뷰에선 유창하게 이야기하는 그가 416기억저장소, 그리고 이곳에서 싹 트는 공동체 모임에선 발언을 자제한다. "유가족과 시민이 모여 스스로 실천하는 장"이 돼야 하므로, 그렇다.
"'현장의 울림'에 순종하려 한다"
이렇게 말하는 그 역시 지난해 4월 16일 이후 삶의 방식이 크게 바뀐 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힘든 점은 없을까.
"삼십만 건이나 되는 기록을 놓고 현장에 앉아 있다. 기록 전문가 입장에서 이걸 분류하고 목록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 내가 지닌 지식이 별 볼일 없구나 싶을 때도 많다. 작년에는 작업이 빨리 진행되지 않아서 무척 답답했다. 그리고 이제 5월이다. 떠난 아이들 대부분의 기일이 끝난다. 유가족들은 사회적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기억 투쟁'을 제대로 실천하는 때다. 우리의 활동 사이클이 자연스럽게 그 시점과 겹치게 됐다.
그간 '현장의 울림'이 주는 압박 때문에 힘들 때도 많았다. 하지만 '현장의 울림'이 여기까지 이끌었다. 앞으로도 '현장의 울림'에 순종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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