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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1886~1964)의 유령이 맴돌고 있었다. 유령의 출몰 장소는 2012년 세계 각국의 총리, 장관,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이 세계경제를 걱정하며 머리를 맞대는 다보스포럼. 이게 다 2008년 불어닥친 세계 금융위기 탓이었다. 경제학자들은 1944년 쓰인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 새삼 주목했다. 몇 년 새 한국어·중국어·아랍어 등 1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다. 딸은 아버지의 유령을 반겼다. “세계경제가 위기에 빠져들면서, 내 아버지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인 ‘사회 안에서 경제가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서양의 거듭남을 위하여: 에세이 1919~1958> 캐리 폴라니 레빗이 쓴 이탈리아어판 ‘서문에서)
저작 <거대한 전환>으로 유명한 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의 딸인 캐리 폴라니 레빗 캐나다 맥길대 교수(경제)가 방한했다. 93살의 나이에도 레빗 교수는 4월24일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개소식과 22일 ‘기본소득 한국네트워크’와의 좌담회 등에서 열정적으로 아버지의 사상을 전했다. 정용일 기자
한국에 상륙한 칼 폴라니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5년, 다시 칼 폴라니의 유령이 맴돈다. 이번엔 한국에서다. 지난 4월24일 칼 폴라니의 학문적 성과를 이어받아 한국형 사회적 경제 발전모델을 만들겠다는 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칼 폴라니 정치경제연구소’의 아시아지부 격인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소장 정태인)다. 때맞춰 칼 폴라니의 저작도 잇따라 번역돼 출간됐다.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원제 ‘서양의 거듭남을 위하여’)와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이다. 홍기빈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이 2권 모두 번역했다.
칼 폴라니는 정치경제학자이자, 언론인, 교육자였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체제를 역사적으로 분석해, 자유시장경제 옹호론자들을 논박한다. 수요와 공급이 스스로 균형에 이른다는 이론은 머릿속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는 ‘시장’에 복속되지 않으며, 자유시장경제에 맞서 사회가 ‘이중 운동’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 ‘이중 운동’이란,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처럼 저항이 되기도 하지만 나치즘이나 파시즘처럼 반동이 되기도 한다.
“나의 아버지는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지식인들이 사회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유령은 그렇게 살아 있는 영혼과 만난다. 칼 폴라니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고 기억하는 딸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캐리 폴라니 레빗 캐나다 맥길대 교수(경제학)다.
레빗 교수는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는 아버지만큼이나 열정적인 사람이다. 방한 이후 4월17일 전라남도 구례 ‘구례자연드림파크’ 개장 1주년 기념 포럼, 22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와의 좌담회, 23일 기자간담회, 24일 연구소 개소식 기조연설 등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냈다. 93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 강행군이다. 레빗 교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걷고, 몇 시간의 대화에도 막힘이 없었다. 숫자나 역사에 대한 기억력도 정확했다. 다만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글씨는 물론 사람의 얼굴도 흐릿하게 형체만 보일 뿐이다.
4월22~23일 만난 레빗 교수의 이야기를 묶어서 전한다. 레빗 교수는 기본소득운동의 열렬한 지지자다.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정기적으로 일정액의 수당을 지급하자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폭주를 막을 대안을 찾는 흐름은 여러 갈래로 나타나고 있다.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가 한 갈래라면, 기본소득운동은 또 다른 흐름이다.
조절 가능 상태 벗어난 불평등
레빗 교수는 격년으로 열리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정기총회에 거의 매번 참석한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4월22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8층 회의실에서 ‘칼 폴라니에서 기본소득까지’라는 주제로 레빗 교수와의 좌담회를 열었다. 강남훈(한신대)·곽노완(서울시립대)·권정임(서울시립대) 교수, 윤자영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 등이 참석했다.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를 출간한 노동자협동조합 출판사 ‘착한책가게’ 전광철 이사장과 기본소득에 관심 있는 시민 등도 함께했다. 4월23일 기자간담회는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주최로 서울 정동 성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1시간30분가량 진행됐다.
왜 새삼스럽게 칼 폴라니가 다시 주목받고 있을까?
70년 전 쓰인 책이 의미 있게 읽히는 이유가 뭘까? 21세기, 지독한 시장 지배의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시장이 우리의 사회적 삶을 지배한다. 사회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만 복무하게 돼버렸다. 19세기 중반까지는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다. 그런데도 21세기 불평등이 19세기 중반보다 훨씬 심각하다. 경제 전체가 상위 소수의 부를 축적하는 메커니즘으로 전락했다. 금융자본이 암세포처럼 불어나서, 실제 생산이 일어나는 산업경제를 좀먹어들어가는 상황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우리는 이를 확인했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과 유럽에서의 불평등 심화는 놀라울 정도였다. 더 이상 시장 조절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다. 기술혁신을 통한 자본주의 체제의 생산성 향상은 상위 10% 내지는 1%의 극소수에게만 부를 안겨준다. 더불어 기계가 노동을 대체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실업 상태가 되는데도, 생산성 향상의 결실은 극소수에게만 돌아가는 것이다. 지독한 불평등, 환경파괴, 사회불안 등으로 21세기 문명이 완전히 붕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레빗 교수는 이같은 불평등을 완화할 대안이 ‘기본소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 피케티 교수에 대한 비판적 의견도 밝혔다. “피케티는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상황을 바꾸기 위한 대안으로 자본세를 제시했다. 하지만 자본이나 기업의 힘이 굉장히 강한 상황에서 (자본세의) 현실화에 대해 (나는) 비관적이다. 기본소득이 불평등 완화, 재분배 차원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는 기본소득이 돈 없는 일부 계층에 대한 ‘적선’이 아니라 ‘시민권’이라고 강조했다. 정치적 해결책이기도 하다. “현재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심각한 양극화 사회는 정치적으로도 위험하다. 기본소득은 결국 부의 재분배뿐만 아니라, 시민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살아 있게 만드는 대안이 될 것이다.”
아버지인 칼 폴라니가 기본소득에 대해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 그의 사회철학에 비춰볼 때, 기본소득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2010년 기본소득네트워크 총회에서 만난 브라질 상원의원이 “칼 폴라니가 살아 있다면 기본소득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란 질문을 던졌다. 그 뒤 아버지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봤다. 아버지도 지지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경제적 이유다. 빈곤층에게 일정 소득이 주어지면 이를 소비재에 지출할 것이고, 그건 결국 침체된 지역공동체의 부활로 연결된다. 둘째, 사회적 측면이다. 정의롭지 못한 불평등은 사회 통합을 저해한다. 기본소득은 지속 가능한 사회로 만들 수 있다. 셋째, 정치적 이유다. 기술이 고도로 진보된 사회에선 순응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아버지는 자유를 보호하려면 일반적 규범에 순응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믿었다. 다수결 사회에서도 소수자가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순응하지 않고 살아가는 소수자인 시민활동가나 작가들에게 생존할 수 있는 기본소득을 준다면, 정치적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다.
4월24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서울혁신파크에 문을 연 ‘칼 폴라니(아래 작은 사진) 사회경제연구소’ 현판 제막식을 마친 뒤 박원순 서울시장과 캐리 폴라니 레빗 교수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레빗 교수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아버지의 저작이 90여 편이나 남아 있다”고 말했다. 뉴시스, 한겨레
기본소득, 보편성이 중요
기본소득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많은데.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사람들이 일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은 말이 안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혁신이 이뤄지면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노동의 잉여’가 늘어나고 있다. 그나마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저임금을 준다. 1940년대 어느 경제학자가 ‘완전고용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노동이 사회에 대한 통제를 잃을 것’이라고 내다봤는데 실제로 그랬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됐고, 1980~90년대 미국에선 중위 임금이 전혀 오르지 않았다. 완전고용이 불가능해졌다. 대신 사람들이 이미 여가나 창의적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준비가 돼 있다.
레빗 교수는 캐나다에서 진행 중인 기본소득 제도를 소개했다. 65살 이상 노인에게 소득을 보장해주는 방식이다. 연방 정부는 일정액을 지급하고, 퀘벡주는 소득에 따라 금액을 달리 준다. 레빗 교수는 “자산 조사 등을 전제로 한 (선별 지급) 방식이 아니라, 보편성이 굉장히 중요하다. 받는 사람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내년 서울에서 열리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의 주제가 ‘사회적·생태적 전환과 기본소득’이다. 칼 폴라니의 사상에서 이와 관련한 어떤 함의를 끌어낼 수 있을까.
생태와 관련한 주제를 잡은 건 반갑다. 신고전파의 효용 이론이나 마르크스주의 노동가치론에서도, 자연이라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나무’의 가치를 물었더니 ‘시장에서 거래될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는 식의 답들이 나오더라. 나무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 더 많이 생산하면 행복하고, 더 싸게 생산하면 좋은 것이란 성장중심주의를 탈피해야 한다. 지역에서 직접 농산물을 생산하는 사람과 도시에서 소비하는 사람이 연결되는 ‘사회적 경제’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교육을 통해 이같은 공동체 운동이 활성화돼야 한다.
폴라니는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협동사회주의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대안 체제로 제시된 것인가.
폴라니는 사회주의자였다. 하지만 이상주의적인 소비에트식 사회주의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소비에트에는 시장과 가격이란 현실이 없었다. 아버지는 항상 이상이 아닌 현실에서 출발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협동사회주의는 기존 자본주의 질서와 제도의 바탕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사회 영역에서의 보완에 가깝다. 한 사람은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이고, 시민으로서 협상하는 주체다. 자본가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소비자 공제조합 등에서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삶의 방식을 폴라니가 지지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해서 협동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은 아니었을 것이다. 칼 폴라니는 하나의 유일한 대안을 제안하거나 주장한 적은 없다.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문 열어
서울형 다원적 발전 모델, 어떤 모습일까?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소장 정태인)가 4월24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서울혁신파크에 문을 열었다. 연구소는 연구자, 사회적 경제 기업가, 공무원, 시민 등이 참여하는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된다.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으로서 ‘사회적 경제’ 이론의 밑돌을 괴어놓은 칼 폴라니와 관련된 각종 연구 활동과 행사, 저작 출간 등의 사업을 할 예정이다.
서울 연구소는 1988년 캐나다 몬트리올 콩코디아대학교에 설립된 ‘칼 폴라니 정치경제연구소’의 아시아지부 격이다. 프랑스 파리에도 ‘칼 폴라니 연구소’가 있다. 사회적 경제를 발전시키는 다양한 실험을 진행 중인 서울시가 연구소 유치에 공을 들인 결과다. 연구소 설립 논의는 2013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사회적경제포럼’(GSEF)에 마거릿 멘델 칼 폴라니 정치경제연구소장이 참가하면서 시작됐다. 지난해 11월엔 서울시, 칼 폴라니 정치경제연구소, 칼 폴라니 연구소 아시아지부 설립준비위원회 3자 간 협약을 맺었다. 박원순 시장은 4월24일 열린 개소식에 참석해 “서울이 사회적 경제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데 칼 폴라니 연구소가 든든한 조력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학자인 정태인 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이 연구소 소장을, 박진도 충남대 교수가 연구소 협동조합 이사장을 맡았다. 연구위원장은 칼 폴라니 관련 저작들을 번역한 홍기빈씨다. 연구소는 앞으로 연구 작업을 거쳐 시장경제와 공공경제, 사회적 경제가 조화를 이루는 ‘서울형 다원적 발전 모델’을 제시할 계획이다.
캐리 폴라니 레빗 교수는 “서울 연구소에 기대감이 크다. 한국은 놀라울 정도로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뤘지만, 그만큼 경제 불평등이 심각한 나라다. 칼 폴라니와 사회적 경제에 대한 관심이 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동남아, 인도 등으로 퍼져나간다면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 흐름을 바꿔낼 수 있을 것”이라며 연구소 개소를 축하했다.
유일한 대안은 없다
레빗 교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이 반짝거렸다. 아버지인 칼 폴라니가 오늘날 재조명될 수 있게 한 일등공신은 어머니였다. 1917년 당시 스무 살이던 어머니는 헝가리에서 군수공장 파업을 주도한 반전운동가였다. “아버지가 사상가였다면 어머니는 활동가였다.” 칼 폴라니는 타이핑 기계를 다룰 줄 몰랐다. 남편이 손으로 쓴 원고는 모두 아내의 손을 거쳐 타이핑됐다. 아내는 심지어 남편의 편지까지도 사본을 남겨뒀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칼 폴라니의 방대한 아카이브는 존재할 수 없었다. 경제학 공부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나는 아버지의 사상을 그대로 따라가진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내가 아버지의 저작물을 관리해야 했다. 아버지가 남겨놓은 100여 편의 에세이를 하나하나 보게 됐다. 그때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지금도 아직 출판되지 않은 아버지의 에세이가 90여 편이나 남아 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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