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0일 일요일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8--하이에크는 단순한 신자유주의자가 아니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34700.html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인 1947년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3부. 냉전과 자유주의의 재구성
7. 존 메이너드 케인스: 수정자본주의
8.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 국가에 대한 공포에서 신자유주의로
9. 이사야 벌린: 자유 민주주의
10.한나 아렌트: 근대적 인간 조건 속에서의 자유
11.존 롤스: 자유주의의 철학적 정당성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상징처럼 간주되는 사상가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대학생 시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1944)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총리가 된 뒤 하이에크를 불러 자문을 청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1984년 대처의 추천으로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명예 훈장을 받았으며, 1991년에는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다. 따라서 하이에크가 신자유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거론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는 이중적인 측면에서 다소 단순한 주장이다. 우선 하이에크를 단순히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로 몰아붙이는 것은 공정한 평가라고 하기 어렵다. 하이에크는 경제학자로 출발했지만, 지식이론과 진화심리학, 법철학, 정치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독창적인 이론 체계를 세운 종합적인 사상가이고, 또한 그의 사상 전체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신자유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성물이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하이에크 같은 특정한 경제학자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최근 몇몇 지성사가들이 잘 보여준 것처럼, 처음부터 국제적인 기원을 지니고 있으며, 경제학자, 기업가, 관료, 언론인 등의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형성되고 확산된 이념(들)이다. 따라서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네트워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30년대 중반까지 하이에크는 전형적인 경제학자였다. 그는 카를 멩거에서 발원하여 하이에크의 스승이었던 루트비히 폰 미제스 및 조지프 슘페터 등을 배출한 오스트리아학파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케인스를 중심으로 한 케임브리지학파의 경제학에 대항하기 위하여 젊은 경제학자들을 물색하고 있던 런던정경대학교의 라이어넬 로빈스의 눈에 띄어 1931년 영국으로 건너왔다. 처음으로 맡은 연속 강의에서 그는 케인스의 경제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했으며, 곧바로 케인스에 필적할 만한 경제학자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나치즘과 파시즘의 어두운 그림자가 유럽 전역을 뒤덮게 되면서 그는 유럽 문명의 핵심을 이루는 자유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좀 더 실천적이고 일반적인 논의를 전개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는 특히 당시 영국에서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계획과 사회화가 필수적이라고 보는 지식인들의 관점이 널리 확산되는 것에 불안과 위협을 느꼈다. 그가 보기에 이는 실제로는 사회주의와 나치즘의 공통의 뿌리를 이루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자유주의 문명의 근저를 뒤흔들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하이에크만이 아니라 다수의 경제학자들, 특히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독일의 경제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인식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1938년 파리에서 열린 한 컬로퀴엄(집담회)이다. 미국의 언론인 월터 리프먼의 저서 <좋은 사회>(1937)의 프랑스어판 출간을 기념하여 열린 이 모임에는 프랑스 산업계의 거물과 고위 관료를 비롯하여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들이 참석했다. 참석자들 중 일부는 서구 문명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고전적인 자유주의로 복귀할 것을 주장한 반면, 다른 일부는 좀 더 조직적이고 새로운 자유주의, 곧 신자유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상당한 이견이 표출되었지만, 이들은 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주재 아래 스위스 몽트뢰 부근의 몽펠르랭에서 열린 ‘몽펠르랭 협회’ 첫 모임. 이때 대부분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36명의 학자들이 모여 하이에크를 초대 의장으로 뽑았다. 이 자리에는 철학자 카를 포퍼를 비롯하여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 등이 참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문명의 가치가 위기에 빠지자, 그 대안을 모색하는 성격의 모임으로 이 협회가 신자유주의의 조직과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
하이에크는 공정한 경쟁을 위한
균등한 기회 보장에 주목했다
반면 결과나 조건의 평등을 추구하면
시장을 왜곡하고 자유를 침해하므로
사회정의란 무의미하다고 일축했다
고전 자유주의가 경제적 자유를 위해
‘국가에 의한 감시’를 전제했다면
‘시장의 감시 아래 있는 국가’를
만들려 한 게 신자유주의다
그것은 첫째, 인간 기대를 가장 잘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서 가격 메커니즘을 활용하는 것, 둘째, 시장이 정의하는 질서에 부응하는 법적인 틀을 제도화해야 하는 국가의 책무, 셋째, 단기적인 미봉책 및 조세 강화와는 다른 정책을 국가가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것, 넷째, 특정한 집단에 특혜가 되지 않을 경우, 경제적 어려움의 원인에 대한 대응으로서 국가 개입을 받아들이기였다.(세르주 오디에, <리프먼 컬로퀴엄 회의록>)
이는 이 회의에 참석한 이후 하이에크가 집필하여 1944년 출판한 <노예의 길>이라는 제목의 책에 그대로 반영된다. 영국과 특히 미국에서 대단한 대중적 인기를 얻은 이 책은 전문적인 학자들에게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이는 신자유주의를 조직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몽펠르랭 협회의 결성(1947)으로 이어졌다.
그는 책의 첫머리에서 “나치즘이 사회주의의 필연적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이 사실에 대한 오해가 오늘날 자유주의 문명을 위협하는 근본적인 위험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고 전체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시급한 과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경제적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경제 문제에서의 자유가 없이 개인적, 정치적 자유가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에크가 고전적인 자유방임주의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유방임의 원리에 대한 아둔한 고집만큼 자유주의의 명분에 해를 입힌 것은 없다”고 역설한다. 그 대신 그는 “경쟁이 가능한 한 최대한 유익하게 작동하도록 체계를 의식적으로 창출하는” 길을 택한다. 하이에크가 보기에 사회주의의 핵심은 “사기업제도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가 대신 그 자리에 중앙계획당국이 들어서는 계획경제의 창설”에 있었다. 이는 엄밀한 의미의 사회주의는 물론이거니와 “단일 계획에 따라 어떤 자원들이, 어떤 목적들에 봉사하기 위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쓰여야 하는지 의식적으로 지시하는” 일체의 계획경제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계획경제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시장에 대한 그의 진화론적 관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인간을 비합리적이고 오류에 빠지기 쉬운 존재로 간주했으며,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 시장은 자생적 질서로서, 어떤 특정한 개인들이 의식적으로 고안하거나 계획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서로 최선의 정보를 획득할 수 있게 해주며, 더욱이 다른 사람의 간섭 없이 각자가 자신의 목적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가격 체계가 존재한다. 가격 체계는 불완전한 정보가 분산되어 있는 곳에서 다양한 개인들의 상이한 행동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어떤 상품에 대해서도 하나의 가격만 성립한다는 단순한 사실이야말로 이 과정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 사이에 흩어져 존재하는 정보들을 유일한 한 사람이 모두 소유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것과 같은 해법을 제공한다.”(<사회에서 지식의 용도>)
따라서 하이에크는 사람들이 서로 공정한 경쟁을 벌일 수 있도록 균등한 기회를 보장해주는 “법적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반면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이나 조건의 평등을 추구하게 되면, 이는 자생적인 시장의 질서를 왜곡하고 개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 때문에 하이에크는 사회정의라는 개념은 무의미하고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라고 일축했다.(<사회정의라는 환상>)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강조한 것처럼, 바로 이 때문에 질서자유주의자들과 하이에크가 고전 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신자유주의를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즉 고전 자유주의가 경제적 자유를 유지하고 보증하기 위한 “국가에 의한 감시”를 전제했다면, 이들은 반대로 “시장의 감시 아래 있는 국가”, 곧 “시장의 자유가, 국가를 그 존재의 시작부터 그 개입의 최종 형태에 이르기까지 조직화·규칙화하기 위한 원리로서 부과”되는 국가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1962년 시카고대학의 사회·도덕과학 교수를 그만두고 하이에크가 옮겨간 자리는 질서자유주의자 발터 오이켄이 물려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정치경제학 교수직이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그의 필생의 대작 <법, 입법, 그리고 자유> 대부분을 집필했다.
진태원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사진 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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