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인 1947년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3부. 냉전과 자유주의의 재구성
7. 존 메이너드 케인스: 수정자본주의
8.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 국가에 대한 공포에서 신자유주의로
9. 이사야 벌린: 자유 민주주의
10.한나 아렌트: 근대적 인간 조건 속에서의 자유
11.존 롤스: 자유주의의 철학적 정당성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상징처럼 간주되는 사상가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대학생 시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1944)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총리가 된 뒤 하이에크를 불러 자문을 청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1984년 대처의 추천으로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명예 훈장을 받았으며, 1991년에는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다. 따라서 하이에크가 신자유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거론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는 이중적인 측면에서 다소 단순한 주장이다. 우선 하이에크를 단순히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로 몰아붙이는 것은 공정한 평가라고 하기 어렵다. 하이에크는 경제학자로 출발했지만, 지식이론과 진화심리학, 법철학, 정치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독창적인 이론 체계를 세운 종합적인 사상가이고, 또한 그의 사상 전체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신자유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성물이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하이에크 같은 특정한 경제학자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최근 몇몇 지성사가들이 잘 보여준 것처럼, 처음부터 국제적인 기원을 지니고 있으며, 경제학자, 기업가, 관료, 언론인 등의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형성되고 확산된 이념(들)이다. 따라서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네트워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30년대 중반까지 하이에크는 전형적인 경제학자였다. 그는 카를 멩거에서 발원하여 하이에크의 스승이었던 루트비히 폰 미제스 및 조지프 슘페터 등을 배출한 오스트리아학파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케인스를 중심으로 한 케임브리지학파의 경제학에 대항하기 위하여 젊은 경제학자들을 물색하고 있던 런던정경대학교의 라이어넬 로빈스의 눈에 띄어 1931년 영국으로 건너왔다. 처음으로 맡은 연속 강의에서 그는 케인스의 경제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했으며, 곧바로 케인스에 필적할 만한 경제학자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나치즘과 파시즘의 어두운 그림자가 유럽 전역을 뒤덮게 되면서 그는 유럽 문명의 핵심을 이루는 자유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좀 더 실천적이고 일반적인 논의를 전개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는 특히 당시 영국에서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계획과 사회화가 필수적이라고 보는 지식인들의 관점이 널리 확산되는 것에 불안과 위협을 느꼈다. 그가 보기에 이는 실제로는 사회주의와 나치즘의 공통의 뿌리를 이루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자유주의 문명의 근저를 뒤흔들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하이에크만이 아니라 다수의 경제학자들, 특히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독일의 경제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인식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1938년 파리에서 열린 한 컬로퀴엄(집담회)이다. 미국의 언론인 월터 리프먼의 저서 <좋은 사회>(1937)의 프랑스어판 출간을 기념하여 열린 이 모임에는 프랑스 산업계의 거물과 고위 관료를 비롯하여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들이 참석했다. 참석자들 중 일부는 서구 문명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고전적인 자유주의로 복귀할 것을 주장한 반면, 다른 일부는 좀 더 조직적이고 새로운 자유주의, 곧 신자유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상당한 이견이 표출되었지만, 이들은 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8.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 국가에 대한 공포에서 신자유주의로
9. 이사야 벌린: 자유 민주주의
10.한나 아렌트: 근대적 인간 조건 속에서의 자유
11.존 롤스: 자유주의의 철학적 정당성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주재 아래 스위스 몽트뢰 부근의 몽펠르랭에서 열린 ‘몽펠르랭 협회’ 첫 모임. 이때 대부분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36명의 학자들이 모여 하이에크를 초대 의장으로 뽑았다. 이 자리에는 철학자 카를 포퍼를 비롯하여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 등이 참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문명의 가치가 위기에 빠지자, 그 대안을 모색하는 성격의 모임으로 이 협회가 신자유주의의 조직과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
균등한 기회 보장에 주목했다
반면 결과나 조건의 평등을 추구하면
시장을 왜곡하고 자유를 침해하므로
사회정의란 무의미하다고 일축했다
‘국가에 의한 감시’를 전제했다면
‘시장의 감시 아래 있는 국가’를
만들려 한 게 신자유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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