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여섯 살 아버지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쉰여섯 살 아들은 “괜찮아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아버지를 달래 다시 샤워를 하게 하고 욕실 사방에 뿌려진 똥을 치우기 시작했다. ‘발에 밟혀 욕실 매트에 묻었고 변기 가장자리 너머로 넘쳤고, 변기 아래쪽 바닥에는 한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아버지가 막 나온 샤워 칸막이의 유리에도 튀겼고, 복도에 버려진 옷에도 묻었다. 아버지가 물기를 닦고 있는 수건 귀퉁이에도 묻었다.’ 나이든 아들은 욕실에서 무릎을 꿇고 틈새에 박힌 것까지 찬찬히 닦아냈다.
지금은 죽은 아버지의 나이에 육박한,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비롯한 각종 문학상을 휩쓸고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히는 미국 원로작가 필립 로스(84)가 그 아들이다. 그가 아버지의 죽음을 다룬 에세이 ‘아버지의 유산’(정영목 옮김·문학동네·사진)이 최근 번역됐다. ‘에브리맨’ ‘네메시스’ ‘미국의 목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같은 장편들은 국내 독자들에게도 친숙하지만, 1992년 전미도서평론가협회상을 수상한 에세이가 국내에 소개되기는 처음이다.
미국으로 이민 온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난 필립 로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그냥 여느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존재에게서 미워할 모든 것을 갖추고 사랑할 모든 것을 갖춘 바로 그런 아버지”라고 회고한다. 자신의 기준을 강박적으로 모든 이에게 적용하는, ‘자신의 극기심과 강철 같은 자기 규율 능력이 특별한 것이지 모두가 공유하는 자질은 아니라는 사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이지만 ‘빈곤 상태에서 성장해 약 사십 년 동안 노예처럼 일하면서 가족에게 소박하지만 안정된 가정생활을 제공했고 이목을 끄는 소비, 허세, 사치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또한 그의 아버지였다.
이 아버지는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6년여를 이승에 더 머물렀는데 새 여인을 만나 추운 겨울을 플로리다 쪽에서 보내려고 날아갔다가 안면마비 증상을 겪는다. 처음에 의사는 단순한 안면신경마비로 진단하지만 그것은 이미 자랄대로 자란 뇌종양을 간과한 오진이었다. 아버지는 이때부터 투병을 시작해 수술을 할 것인지, 수술을 해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그냥 죽음을 기다릴 것인지 선택을 해야 했다.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생명보험 밑바닥 영업사원으로 시작해 지점장까지 오른 불굴의 아버지는 죽음과도 싸우기 시작한다. 그 아버지는 평소에 농담처럼 “생명보험은 세상에서 가장 팔기 힘든 거야. 왜인지 아니? 고객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죽는 것뿐이기 때문이지”라고 말했었다.
그런 아버지도 죽음 앞에서는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필립 로스는 평범한 이의 죽음을 다룬 ‘에브리맨’에서 “노년은 전투가 아니라 대학살”이라고 썼거니와 이 에세이에는 “늙는 건 소풍이 아니다”고 써넣었다. 아버지와 얽힌 가족사, 아버지의 주변 사람들 이야기, 유대인으로 겪는 차별 같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삽입하다가 필립 로스는 특유의 냉정하고 강인한 문체로 아버지의 죽음을 직면한다.“아버지는 삼주 후에 죽었다. 1989년 12월 24일 자정 직전에 시작되어 다음날 정오 직후 끝난 열두 시간의 시련 동안 아버지는 평생에 걸친 고집스러운 끈기를 멋지게 분출하며, 마지막으로 과시하며 숨 한번 한번을 위해 싸웠다. 볼 만한 광경이었다.”
‘볼 만한 광경이었다’는 서술은 방관자의 자세라기보다 아버지의 죽음과의 싸움을 높이 평가하는 태도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작성해두었던 생명연장 포기 각서인 ‘사망 선택 유언’을 실천해 호흡유지장치 사용을 거부한다. 이미 “그때쯤 아버지는 들것 위에서 조 루이스와 백 라운드는 싸운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진술한다. “죽는 것은 일이었고 아버지는 일꾼이었으며, 죽는 것은 무시무시했고 아버지는 죽고 있었다”고.
필립 로스는 아버지의 똥을 치우면서 “치워야 하는 것이니까 아버지의 똥을 치우지만, 치우고 난 뒤에는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느껴졌다”면서 “일단 혐오를 피하고 구토를 무시하고 금기처럼 단단하게 구축된 공포증들을 지나 확 뛰어들면 소중하게 품을 삶을 엄청나게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기술했다. 그는 “일을 다 마치고 나니, 왜 이것이 옳고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대로인지 그렇게 분명할 수가 없었다”면서 “그것이 나의 유산이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출처 https://goo.gl/SYjAq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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