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로서 발 딛고 선 땅도, 구사하는 언어도 달랐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오랜 동지처럼 대화를 주고받았다. 삼십년 넘게 불평등 연구의 ‘외길’을 걸어온 사회학자들의 진한 공감과 연대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저 둘 다 1980년대 후반 위스콘신 매디슨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연’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 터였다.
지난 14일 연세대학교 백양누리에서 연세대 사회학과 BK21플러스 ‘사회적 연대와 공존’ 사업단 초청으로 방한한 데이비드 그러스키 스탠퍼드대 교수와 신광영 중앙대 교수가 만났다. 두 사람은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정책의 역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 대한 전망, 사회 이동성의 중요성과 미국식 모델의 미래에 대한 논의까지 서로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갔다.
■ 불평등은 정책의 결과
신광영 교수(이하 신광영) = 우선 미국이나 선진국, 동아시아에서 사회 불평등이 늘어나는 원인에 대해서 논해보자.
데이비드 그러스키 교수(이하 그러스키) = 미국의 소득불평등 증가를 두고 불가피한 과정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잘못된 오해다. 사실은 미국이 경제나 노동시장을 조직화하는 방식과 제도가 소득불평등을 증가시켰다. 구체적으로 미국이 수십년 동안 최저임금의 실질가치를 인상하지 않고 노조 조직화를 어렵게 만들면서 소득분위상 하위에 있는 사람들의 소득이 줄어들었다. 동시에 소득분위 상위층이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적 결정이 내려졌다. 두가지 층위의 결정이 결합되면서 불평등이 증가했다.
신광영 = 불평등을 야기한 주된 원인을 정책 결정에서 찾는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책은 불평등의 수준을 높일 수도 낮출 수도 있다.
그러스키 = 우리가 실행하는 정책이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우선 아주 명확하고 의도적인 효과로써 노조 조직화를 수월하게 만드는 정책을 펴면 하층민의 역량을 증대해 소득불평등이 줄어든다. 그런데 많은 정책들은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통해 사람들의 삶을 결정짓는다. 미국에는 부자는 부자끼리,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끼리 모여 살도록 분리를 야기하는 여러 정책이 있는데, 사람들이 비슷한 사회계급 내에서 만나 결혼하면서 소득불평등이 악화된다.
신광영 = 맞다. 한국의 불평등은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현 정부는 지니 계수로 나타나는 불평등을 줄이고 싶어한다. 정부는 대개 단기적, 즉각적 효과를 낳는 정책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장기적이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지속가능한 수준의 평등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합리적이고 적절한 경제·사회정책을 만들 것인지가 관건이다. 또 자본주의 경제는 상승과 하강 국면이 있는데, 불평등을 조장하는 경제적 변동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도 문제다.
그러스키 = 큰 결정을 내려야 한다. 먼저 소득불평등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불평등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논의는 많이 나왔다.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불법적 불평등을 뿌리 뽑는 것으로 부패나 지대추구행위와 같은 ‘달콤한 거래’, 최고경영자(CEO)들에 대한 과도한 보상 제도가 이에 속한다. 경제 전체의 산출에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 ‘나쁜 불평등’ 근절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둘째로는 분배 이전(선분배)은 건드리지 않고 분배 이후(후분배)에 개입하는 것이다. 즉 세제 구조 개혁이라는 단순하고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재분배하는 것이다. 최상위층이 지대를 많이 얻으니까 세금을 많이 물리면 된다.
신광영 = 한국 경제는 재벌이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 족벌경영이나 독점화된 경제가 나쁜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주범이지만, 재벌의 영향력 때문에 체제를 바꾸기가 어렵다.
■ 빈곤과 불평등 해법은
신광영 = 불평등과 빈곤의 관계도 중요하다. 토마 피케티가 말했듯이 상위 1%가 대부분의 몫을 가져가면 중산층이 소득을 유지하더라도 불평등이 늘어나고, 반대로 소득분위 하위계층이 점점 소득을 빼앗겨도 불평등이 커진다. 빈곤 해결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나.
그러스키 = 현재 우리는 어떤 접근이 효과적인지 아닌지를 알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최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절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다. 일례로 생애주기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잘 사는 사람들 사이에 매우 다른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 지점을 찾아내 개입하는 것이다. 태아 상태에서부터 가난한 사람들은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역량이 부자들에 비해 크게 부족하므로, 가정방문이나 출산 지원 프로그램 실시와 양질의 유아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서머스쿨이나 진로 정보와 같이 제도권 학교 바깥에서 일어나는 불평등을 평준화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최적의 효과를 내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근거 중심 정책이 필요하다.
신광영 = 빈곤 해소를 위해 생애주기 접근이야말로 지난 30년간 사회과학자들이 이뤄낸 가장 훌륭한 성취라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사회과학분야에서도 어린 시기에, 생애주기 접근이 필요하다는 공통된 인식이 있다. 워킹푸어 문제를 다루는 해법을 논해보자. 하나는 미국, 한국, 일본이 채택하고 있는 최저임금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북유럽 국가들처럼 단체협약에 따라 임금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저임금제도가 있는 경우 워킹푸어 문제가 심각하다.
그러스키 = 최저임금은 매우 중요한 개입방법이다. 미국에서는 연방정부 차원의 근로장려세제(EITC)가 워킹푸어의 소득을 늘리는데 더 큰 성공을 거뒀다. 진짜 문제는 워킹푸어보다 일하지 않는 빈곤층이다. 복지 개혁으로 일하지 않는 빈곤층 집단이 줄어들었다가 다시 증가하고 있다.
신광영 = 한국도 미국을 따라서 EITC를 도입했다. 일하지 않는 빈곤층은 한국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특히 노인층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보다 5~6배나 높은 세계 최고치 수준으로 비극적인 상황이다. 젠더 불평등 문제도 심각하다. 한국은 OECD에서 남녀 임금 격차가 약 38%로 가장 크다. 미국에서도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 차별시정조치 등 여러 정책적 개입이 있었다.
그러스키 = 우선 언급해야 할 것은 당면한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우리가 간과한다는 점이다. 빈곤과 불평등, 젠더 불평등 문제는 우리 사회 제도 안에 이미 깊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적은 재정을 투입해 추진하는 프로그램만으로 협소하게 대응하고 있다. 필요에 따라 현재 투입의 10배로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 아주 중요한 법률인 차별금지법을 더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 여성에게 온전히 부담이 전가되는 보육 문제를 좀 더 평등하게 만드는 것 등도 필요하다.
신광영 = 한국에서 젠더 불평등 문제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지만, 남성의 여성 차별은 사회 모든 시스템에 넓게 퍼져있다. 아들 대신 딸을 선호하는 문화라든지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는 있다. 하지만 대학, 관료제, 가족 내 등 모든 면에서 가부장제가 너무 심각하고 생명력이 질기기 때문에 해결이 어렵다. 임금 격차도 이십년 넘게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러스키 = 미국도 마찬가지다.
■ 트럼프 정부에 대한 전망
신광영 = 지난주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했는데, 트럼프 행정부에서 불평등 문제가 어떻게 될 것으로 예상하나. 트럼프는 미국 기업들이 미국 본토에 투자를 늘리는 것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데, 세계화 기조와는 반대되는 흐름이자 경제 민족주의처럼 보인다.
그러스키 = 일단 당선되기 위해서 사용하는 레토릭이나 정책, 당선된 이후의 것들을 구별해야 한다. 당선 전의 레토릭은 분명히 불평등 반대 레토릭이었다. 트럼프는 미국 사회에서 상처받고 패배하는 이들이 있음을 인식했고, 이를 바로잡으려 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는 공화당 후보였고, 공화당의 ‘친-불평등’ 접근에 완전히 포섭됐다. 상위층에게 자본을 이전시키는 세금 정책은 그 포섭의 결과이고, 결과적으로 레토릭은 공허하게 들린다.
신광영 = 트럼프는 실업자나 러스트벨트 주민들의 포퓰리즘을 활용했다. 극우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사람들의 좌절을 이용해서 표를 얻고, 자기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정책을 실행하는 것은 여러 나라에서 흔한 풍경이다.
그러스키 = 민주당도 신자유주의 정당이 되었다는 비판이 있지만, 공화당이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지지자로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를 또 하나의 선거 승리로 바꿔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누가 이걸 해냈는지는 몰라도 정치적으로 뛰어난 솜씨였다. 어디로 갈지는 지켜봐야 한다. 현재로서는 두 가지 핵심 정책인 세금정책과 의료보험이 노동자를 해치는 ‘친-불평등’ 정책이다.
■ 흔들리는 아메리칸 드림
신광영 = 사회이동성 이야기를 해볼까.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로 절대적 사회이동성이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제 급성장기는 끝났고, 1997년 외환 위기와 이후의 광범위한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인해 계급 이동 사다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평균 은퇴연령이 54세로 매우 낮다는 점은 생애주기 면에서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중산층의 50대 남성은 자녀들이 아직 대학생, 고등학생인데 벌써 은퇴를 걱정해야 한다. 미국은 어떤가.
그러스키 = 정말 우려스럽다. 그동안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으로 상징되는 공정한 기회와 높은 사회이동성이 보장되는 사회였다. 하지만 절대적 소득 이동성을 긴 기간에 걸쳐 살펴보면, 부모보다 많이 버는 자녀들이 급감하고 있다. 아이들은 어린시절 노출된 환경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부모의 삶에 못 미치면 아주 심각한 실패로 간주한다. 이전보다 줄어든 경제 성장의 열매가 점점 더 상위층에만 가고 있는데, 인구 전체에 몫이 골고루 나눠져야만 자녀들이 부모를 따라잡을 수 있다. 지금처럼 불평등이 높은 사회를 유지한다면 이동성 저하 비용이 초래된다.
신광영 = 다른 사회와 비교하면 미국은 불평등은 높지만 이동성도 높은 사회라는 점이 특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불평등은 높고 이동성은 낮은 사회다. 한국 사회와 학계의 아이러니는 미국을 고도로 선진화된 바람직한 사회 시스템의 모델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경제 정책을 모델로 하고, 미국 스타일을 전파한다.
그러스키 = 미국의 이야기는 원래 ‘그래, 우리가 불평등하지만, 공정하고 열린 경쟁의 결과이고, 낙오자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생산적인 불평등이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회 자체가 시장에 있기 때문에 경쟁이 공정하지 않다. 잘사는 부모는 시장에 가서 아이들을 위해 기회를 산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겼는데, 이제는 기회도 시장에서 구매하고 있다. 시장은 희소한 자원 분배에는 아주 훌륭한 도구이지만, 기회만큼은 신성한 것으로 모두에게 열려있어야 한다.
■ 한국과 미국의 미래
신광영 = 당신이 사용하는 ‘기회의 상업화(commodification ofopportunity)’라는 개념에 동의한다. 나는 ‘미국의 남미화’에 주목하고 싶다. 중국도 불평등이 급증하면서 유사한 궤적을 밟고 있다. 세계 경제규모 1, 2위인 미국과 중국 모두 불평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체제에 암울한 사실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하향경쟁(race to the bottom)이 일반화됐다. 미국 시스템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러스키 =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미국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불평등 수준이 낮을 때 경제대국이 됐다. 따라서 이제는 불평등이 이렇게 높은데도 성장을 지속할 수 있겠냐는 문제가 남는다. 과연 기회가 시장에서 팔리고, 불법적이고 부패한 불평등이 만연한 상황에서도 가능할 것인지. 사람들이 포퓰리즘 환상에 넘어갈 것인지, 또 아메리칸 드림을 저버릴지 우리는 모른다. 미국의 미래에 대해서 나는 사실 굉장히 낙관적이다. 나는 내 나라를 사랑하는 포로다.(웃음) 미국은 거대한 문제 앞에서 스스로를 새롭게 발명해왔다. 노예제나 민권운동 등 시스템이 위기에 빠지고 평등한 사회를 위한 근본적인 가치가 흔들리던 시기에도 우리는 실질적인 개혁을 취했다. 미국인의 DNA 안에 자신을 새롭게 발명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불평등 문제도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다.
신광영 = 미국의 오랜 역사적 경험은 한국이 좋은 정책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실행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지난 20년간 한국에서 서민들의 경제 지위는 과거에 비해 심각하게 나빠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민주정부가 탄생했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정부는 남아공이나 대만에서 새로운 민주정부가 그랬듯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실행했고, 장기적으로 심각한 노동시장 문제, 불평등 급증이 일어났다. 지금 정부는 과거의 정책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있다. 알다시피 지난해 말과 올해 초의 촛불시위는 엄청난 피플파워를 보여줬고, 정치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새 역사와 새 정책, 특히 경제나 세금 정책의 방향을 바꿨다. 나 역시 한국의 미래에 대해서 매우 낙관적이다. 더 나아가 한국의 사례는 정치변화가 어떻게 경제·사회 변화를 이뤄내고, 불평등과 빈곤을 줄이고 복지를 증대할 것인지에 관한 상징적 사례이자 중요한 실험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스키 = 전적으로 동의한다. 불평등이 높게 나타나지만, 우리는 민주적 시스템에 살고 있다. 이론대로라면 사람들이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시스템이 효과적이지 않으면 저항할 수 있다. 내 낙관주의도 여기에 기인한다. 그럼에도 불평등이 높기 때문에 상위층의 목소리만 확대되어 들리다보니 거버넌스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에서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권력이 없는 사람들의 대응 역량이 쪼그라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순간과 기회가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 있으므로 지금 행동해야 한다.
▲ 신광영 교수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로 불평등과 계층, 계급 문제에 천착해 왔다. 세계화와 동아시아 불평등체제, 북유럽 복지모델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대표 저서로 <한국 사회 불평등 연구>(후마니타스), <한국의 계급과 불평등>(을유문화사), <스웨덴 사회민주주의>(한울아카데미)가 있다.
▲ 데이비드 그러스키 교수 =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이자 스탠퍼드 빈곤과 불평등 연구센터(CPI)의 디렉터이다. 소득불평등과 빈곤, 사회 이동성, 빈곤 문제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지난 4월 ‘사이언스’에 미국 센서스 자료를 토대로 지난 40년간 절대적 소득 이동성이 급감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 데이비드 그러스키 교수 =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이자 스탠퍼드 빈곤과 불평등 연구센터(CPI)의 디렉터이다. 소득불평등과 빈곤, 사회 이동성, 빈곤 문제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지난 4월 ‘사이언스’에 미국 센서스 자료를 토대로 지난 40년간 절대적 소득 이동성이 급감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정리 |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출처 https://goo.gl/Y7w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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