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기본소득제도가 도입되진 않았지만 가장 활발하게 기본소득을 논의하고 실험하는 나라다. 그중에서도 실리콘밸리를 끼고 정보기술(IT) 기업이 몰려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선 ‘기계의 습격’에 대비해 기본소득을 대안으로 삼자는 물결이 크게 일렁인다.
페이스북·테슬라 CEO도 기본소득 지지
미 서부 캘리포니아주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샌프란시스코는 푸른 바다 위에 걸쳐진 붉은색 금문교로 유명한 도시다. 온화하고 청명한 날씨와 즐비한 멋진 건물들에 히피가 넘쳐나고, 성소수자 권익 운동을 앞장서 주도하는 이 자유롭고 아름다운 도시는 아이러니하게도 오래도록 넘쳐나는 노숙인 문제로 고민해왔다. 이들은 어쩌면 이 도시에 속한 사람들의 ‘가까운 미래’다. 실리콘밸리의 IT 종사자들은 로봇이 인간의 일을 대체하고 대부분의 시스템이 자동화됐을 때 실업자로 전락한 자신들이 이 도시의 높은 집값을 감당하며 현재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도시 곳곳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하나둘 생겨났다. 지역의 스탠퍼드대학은 기본소득 연구소를 만들었고,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스타트업 창업·투자 인큐베이터인 ‘Y콤비네이터’는 기본소득 파일럿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도시 회계 담당자도 지역의 기본소득 지지자와 연계해 제도를 설계 중이다.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 등도 오래전부터 기본소득 개념에 동의해 이를 지지해왔다.
시민들 사이에서도 자발적으로 기본소득 운동이 일었다. ‘유니버설 인컴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유니버설 인컴 프로젝트는 구성원 모두 자원봉사자인 시민단체다. 월급 받고 일하는 상근자는 한 명도 없다. 이 단체를 이끄는 짐 푸 역시 따로 웹 개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코워킹 카페에서 <한겨레21>과 만난 짐은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풀어놓았다. 그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싶었다. “회사를 운영하며 관리·재정 등에 많은 사람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있으니 제가 구인하려던 일들이 사람 없이 자동으로 처리되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어요. ‘우리 일터가 위협당할 거야.’ 기본소득은 당장 우리 앞에 닥칠 미래의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겠지만,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다음 세대가 혜택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유니버설 인컴 프로젝트는 펀딩을 진행하거나 특정인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등 직접적 실험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기본소득에 대해 ‘말한다’.
아이디어 원천 ‘크리에이톤’ 대회
짐은 자신들의 활동을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의 주안점은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거예요. 미국에서 더 많은 사람이 흥미를 가지고 기본소득을 말하고, 다양한 견해로 접근해 궁극적으론 모든 사람이 혜택을 받기 바라죠. 인종차별, 주택 문제 등 어떤 측면에서 접근하더라도 기본소득이 적절한 해결책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야 해요. 우리는 가교 역할을 하는 사람이에요. 전세계 다양한 조직과 접촉하고, 더 많은 사람이 쉽게 기본소득 개념을 접할 수 있도록 메시지를 전파하는 거죠.”
이들은 기본소득을 주제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집중적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대회인 ‘크리에이톤’을 진행해왔다. 이 대회는 ‘해커톤’처럼 프로그래머·기업가·창작자가 모여 기본소득 관련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2015년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로스앤젤레스, 뉴올리언스 등 여러 지역의 전문가들을 만났다. 유니버설 인컴 프로젝트는 크리에이톤에서 꾸려진 각 팀에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이들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알리고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짐에게 크리에이톤에서 가장 눈에 띈 결과물을 묻자 다음 세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무노동 기본소득이 아닌 최소한의 효율적인 노동으로 기본소득을 얻는 실험을 하는 팀이다. “몇 명의 사람들이 지역사회에 가서 각자 가진 것을 가지고 서로 후원하고 지원하면서 그들 고유의 기본소득을 만들어내는 프로젝트였어요.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고, 지속적으로 살펴볼 계획이에요.” 또 다른 하나는 <한겨레21>의 ‘월 135만원 기본소득 받으실래요?’실험과 비슷한 내용이다. “나의 기본소득(My basic income)이라는 크라우드펀딩 프로젝트예요. 이 프로젝트를 먼저 시작한 독일의 마인 그룬트아인콤멘(mein-grundeinkommen.de) 팀의 도움을 받았어요. 1년간 기금을 모아 실험을 진행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을 필름으로 기록하는 팀이 있다. “2015년 크리에이톤을 시작할 때부터 다큐멘터리영화를 찍고 있어요. 언젠가는 개봉할 수 있겠죠. 내년이 됐으면 좋겠어요. 많은 사람과 기본소득의 개념과 필요성을 공유하고 싶어요.”
이외에 기본소득에 관심 깊은 사람들이 도시락을 가지고 모여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포트럭 파티’를 부정기적으로 열고, 짐을 중심으로 자원봉사자와 함께 팟캐스트 방송도 한다.
자본주의 꽃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최근 이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에 하와이주 크리스 리 하원의원이 출연했다. 지난 6월 하와이에선 크리스 리 의원의 주도로 기본소득을 연구하는 실무 그룹을 만드는 법안이 통과됐다. 하와이는 미국 최초로 모든 주민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지역이 될 가능성이 크다. 관광·서비스업 등 인력 투입이 많은 산업을 일군 하와이에선 컴퓨터나 기계가 대체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실업이 많이 발생할 것이라 예측된다. 실업자가 늘어날수록 사회시스템은 흔들리고 실업 구제와 주택 지원 등에 복지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도 있다. 하와이주 의원들은 기본소득제가 잘 정착되면, 빈곤으로 인한 무수한 상처를 잠재적으로 막을 뿐 아니라 복지 예산을 오히려 절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 연구자들은 각 국가의 경제 상태와 수준에 따라 기본소득이 사회에 작용하는 방식이 다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기본소득이 시행된다면 앞서 기본소득을 실험해온 아프리카의 빈곤 국가들, 유럽의 복지 선진국들과 또 다른 결과물을 낳을 것이다. 가장 화려하게 자본주의를 꽃피운 나라에서 이 실험이 진행된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샌프란시스코(미국)=신소윤 <한겨레> 편집부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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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살 만한 나라’로 보인다
<한겨레21>이 ‘기본소득 월 135만원 받으실래요?’ 카카오 스토리펀딩 프로젝트(storyfunding.daum.net/project/9578)를 시작(제1129호 표지이야기)한 지 열 달이 지났다. 이 프로젝트는 1천만원의 후원금이 모이면 1명에게 6개월간 월 135만원씩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실험이다. 기본소득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는 게 아니라,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기본소득을 받는다면?’이라는 가정을 직접 구현해보려 했다. 경기도 성남시의 ‘청년배당’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 기본소득 실험이다.
전국으로 불붙은 기본소득 실험
사실 이 프로젝트는 치밀하게 연구 목표를 설정하고 설계된 ‘실험’이라기보다 기본소득 의제를 대중적으로 폭넓게 논의하는 ‘마당’에 가까웠다. ‘마당’에는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 달 만에 1차 펀딩 목표금액 1천만원이 모였고, 만 18~34살 지원자 206명 가운데 무작위 추첨해 ‘기본소득 1호 대상자’를 선정했다. 경희대 대학원생 임지은(27)씨다. <한겨레21>은 2016년 12월15일 기본소득 135만원(세금 제외 129만600원)을 지은씨 통장에 송금했고, 이후 6개월간 매달 15일에 지급했다.
6개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국 사회에는 ‘촛불’ 물결이 일었고, 조기 대통령선거를 치렀으며 이 과정에서 기본소득이 이슈로 떠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은 모든 국민에게 지급하는 기본소득 형태는 아니지만 아동수당, 청년고용촉진수당 등 ‘생애맞춤형 기본소득’을 대선 공약으로 약속했다. 기본소득 실험도 확대됐다. 2017년 1월부터 핀란드 사회보장보험공단(KELA)은 2016년 11월 실업수당을 받은 17만5천 명 가운데 2천 명을 무작위로 뽑아 기본소득 월 560유로를 2년간 지급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기존 실업수당보다 기본소득이 구직에 효과적인지, 개인의 소득 변화는 어떤지 등을 2년간 추적 조사한다.
국내에서도 <한겨레21>의 실험에 자극받아 전국 곳곳에서 비슷한 ‘마당’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대전에서는 총 3명에게 기본소득 월 50만원을 6개월간 지급하는 ‘띄어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최저시급 6470원 이상의 돈을 후원한 사람 가운데 3명이 지난 2~3월 기본소득 지급 대상자로 뽑혔다. 전북에서도 5월부터 4명에게 기본소득 월 50만원을 지급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현재 후원금을 모금하는데, 8월 무작위 추첨으로 대상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강원도 춘천에서도 1만원 이상 후원자 가운데 청년, 비정규직, 문화예술인 각각 1명을 추첨해 월 30만원 상당의 기본소득을 강원상품권으로 지급하는 실험이 진행 중이다. 7월 첫쨋주에 1차 대상자를 선정한다. 각 지역의 실험들은 기본소득에 관심 있는 시민사회단체, 지역언론 등이 주도한다. <한겨레21>이 첫발을 뗀 것에 자극받아, 의미 있는 발자국들이 여기저기 찍히는 셈이다.
기본소득 1호 대상자 임지은씨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겨레21>은 매달 지은씨에게 소득과 지출의 변화, 근무·수면·식사 시간의 변화 등을 기록하게 했다. 특히 친구들을 만날 때 쓰는 교제비, 식사비에서 외식비 비중, 그중에서도 과일이나 육류 구입비가 얼마나 늘었는지 구체적으로 물었다. 기본소득이 자산·소득 심사나 구직 활동 증명 없이 받을 수 있는 돈이라는 점을 감안해 따로 영수증 등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매달 기자가 지은씨를 만나 한 달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했다. 지은씨가 평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경기도 수원의 학교, 서울 구로구 집과 근처 즐겨 찾는 장소 등에서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과정은 <한겨레TV> 조소영 PD가 영상으로 기록했으며,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공개된다. 지난 2월 지은씨가 첫 달 기본소득을 받은 뒤 한 달을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한(제1148호 표지이야기) 이후 못 다한 5개월치 이야기를 전한다. 지난 5월15일 지은씨 통장에는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기본소득이 입금됐다. 그로부터 한 달 뒤 6월14일, 지은씨를 집 앞 공원에서 만났다.
그날 만남에서는 인터뷰 외에 별도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기본소득을 받기 직전인 2016년 12월10일 실시한 설문과 동일한 63개 항목에 대해 지은씨의 생각과 감정을 표시했다. 이 프로젝트가 엄밀한 연구 실험은 아니지만, 최대한 객관화할 수 있는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설문의 자세한 내용은 아래 인포그래픽에서 볼 수 있다. 기본소득을 받기 전과 후, 지은씨의 행동양태와 생각, 사회에 대한 인식 변화는 매우 흥미로웠다. 설문 결과를 바탕으로 지은씨의 생생한 목소리를 덧붙여 6개월의 여정을 정리한다.
기본소득 지급받은 6개월, 임지은씨의 변화
<한겨레21>은 임지은씨가 기본소득을 받는 6개월 동안 가계부와 시간표를 매달 기록하도록 부탁했다. 생활여건과 의식조사는 기본소득을 받기 직전(2016년 12월)과 기본소득을 6개월간 받은 이후(2017년 6월) 두 차례 동일한 설문지로 진행했다. 설문 항목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한국복지패널조사’, <한겨레21>의 2017 신년호(제1144호) ‘청년 의식조사’ 등을 참고해 구성했다. 두 설문지를 비교해보니, 사회와 자신에 대한 인식이 6개월 사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응답 결과가 나왔다. _편집자
취미가 생겼다
6월14일 수요일 오후 2시. 평소 같으면 학교 실험실이나 연구실에서 한창 바빴을 시간이다. 이날 지은씨는 서울 구로구 집 앞 공원에 산책을 나왔다. 요즘 밤마다 1시간씩 공원을 걸으며 운동할 때의 차림 그대로였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상상 못한 일이다.
기본소득을 받은 6개월 동안 지은씨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지만 ‘몸의 여유’는 없었다. 대학교 실험실에서 근무하느라 일주일 가운데 평일 닷새가 쳇바퀴 돌듯이 바쁘게 돌아갔다. 특히 서울 구로구 집에서 경기도 수원 학교까지 통학하느라,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1시 무렵 집에 돌아올 때까지 지은씨의 하루는 참 길었다. 그런데 이제 주 5일 중 이틀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 5월 말부터 실험을 그만뒀기 때문이다. 이틀은 학교에 나가지 않는다. 나머지 사흘도 근무 대신 석사 논문을 위한 실험을 하러 학교에 가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한결 자유로워졌다.
“삶이 여유로워진 게 제일 큰 변화예요.” 지난달에는 30만원을 투자해 난생처음 ‘온라인 PT’를 받았다. 트레이너가 소셜메신저로 운동 방법과 식단을 관리해준다. 새로운 취미도 생겼다. 같이 사는 동생과 프로야구 경기장을 종종 찾는다. 응원하는 팀은 두산. 이번 시즌부터 응원을 시작했지만, 벌써 10여 차례 경기장에서 ‘직관’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가끔 볼링장도 간다. 지난 1~2월 주말마다 가죽공예를 배우러 다닌 이후 몇 가지 새롭게 생긴 취미다.
지은씨의 변화는 6개월치 가계부에서도 잘 나타난다. 위 그림을 보면, 2016년 12월 0원이던 교육비가 가죽공예와 동생 드로잉 수업비를 지불한 2017년 1월엔 60만원으로, 온라인 PT를 받은 5월에는 30만원으로 뛰었다. 4월에는 평일 저녁 조금 일찍 퇴근해 토익스피킹학원도 다녔다. 책을 사거나 공연, 스포츠 경기장 등을 다니는 데 쓴 돈의 액수도 6개월간 서서히 늘어났다.
기본소득을 받은 뒤 일어난 가장 큰 변화, 가장 잘한 선택을 묻자 지은씨는 이렇게 답했다.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돈이 없어 못하겠다고 생각한 취미생활도 해봤고, 그러면서 ‘이건 앞으로 돈 없어도 할 수 있겠구나’ 깨달았어요.”
친구를 자주 만나게 됐다
임지은씨는 기본소득을 받은 뒤 가장 큰 변화로 ‘여유’를 꼽는다. 지난 6월 동생과 다녀온 일본 여행(왼쪽)과 지난 1~2월 배운 가죽공예(오른쪽)가 바로 그런 여유였다. 임지은 제공
주말에 친구들을 자주 만나게 된 이유도 그래서다. 지난해만 해도 지은씨는 친구, 특히 직장인 친구를 만나기 주저했다. 평일에는 대학원 실험실 근무로 빡빡해 따로 아르바이트할 시간이 없었던 지은씨는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용돈 20만원으로 한 달을 버텼다. 친구들을 만날 때면 밥 먹고 커피 마시는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기본소득을 받고 통장 잔고가 여유로워지면서 친구 만나는 횟수가 증가했다. 2016년 12월 0원이던 교제비도 2017년 1~5월 적게는 월 8만원에서 많게는 월 20만원까지 액수가 달라졌다. “이제 돈이 없어도 친구를 꾸준히 만날 것 같아요. 밥 먹고 차 마시는 대신 같이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이처럼 ‘마음의 온도’가 올라갔다는 것은 지은씨가 기본소득을 받기 직전인 2016년 12월과 기본소득을 모두 받고 난 뒤 2017년 6월에 작성한 설문조사 결과의 변화에서도 감지된다(27쪽 그림 참조). “현재 자신의 상태에 얼마나 만족하십니까?”라는 질문 가운데 ‘여가생활’ 항목에 지은씨는 2016년 12월 ‘매우 불만족’을 선택했다. 6개월 뒤 지은씨의 대답은 ‘매우 만족’으로 달라졌다. ‘사회적 친분 관계’ 만족도는 ‘그저 그렇다’에서 ‘대체로 만족’으로 한 단계 올라갔다. 이에 힘입어 ‘전반적인 생활 만족도’는 ‘대체로 불만족’에서 ‘대체로 만족’으로 두 단계 상승했다.
이는 단순히 만족, 불만족의 차원을 넘어선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사회적 네트워크로부터 도움받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지은씨는 2016년 12월 “아니다”라고 답했다. 2017년 6월 지은씨의 선택은 “그렇다”로 바뀌었다. 친구들과의 만남이 잦아졌다는 것은 지은씨가 사회적 관계를 믿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울증 정도나 자존감을 판단하는 설문 항목에서도 지은씨의 마음 상태가 한결 따듯해졌다는 게 확인되었다. 잠을 설치거나 도무지 뭘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막막함을 느끼는 일은 줄었다.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자존감, 나 자신에 대한 긍정적 태도는 강해진 반면,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 등 부정적 감정은 최소화되었다.
6개월간 지은씨 마음을 단단하게 지탱해주던 기본소득이 지난 5월로 끊겼다. 실험실 근무까지 그만두면서 지은씨 수입은 반토막, 아니 3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아직 통장 잔고가 남았다고 해도 불안하지 않을까? “아직 괜찮아요. 기본소득을 받은 뒤 외식비나 교제비, 교양·오락비 등이 많이 늘었지만 소비 습관이 달라졌거든요.” 지은씨는 최근 신용카드보다 체크카드를 쓴다. 신용카드 할부금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부채도 130만원 안팎에서 최근 40만원대까지 줄어들었다.
먹는 것도 크게 달라진 소비 습관 중 하나다. “편의점 음식 먹는 일이 거의 없어졌어요. 한 끼를 먹어도 대충 때우는 게 아니라 되도록 잘 차려진 음식을 먹자는 생각에 외식비도 늘고, 과일이나 고기도 자주 사게 됐거든요.” 기본소득을 받지 못하더라도 이제 편의점 음식과 작별할 수 있을 듯하다.
기본소득 필요성 “매우 공감”
지은씨는 5월 말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토·일요일 오후 12시부터 5시까지 집 근처 커피숍에서 일한다. “첫날 5시간 동안 서서 일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집에 오자마자 뻗어버렸어요. 알고 보니 제가 근무하는 매장이 ○○ 브랜드의 전국 매출 3위 매장이더라고요. 하하.” 시급 7500원 아르바이트로 한 달 버는 돈은 20만원 남짓. 동생과 같이 사는 오피스텔 관리비와 교통비 등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해서, 기본소득을 받는 동안 마다했던 용돈도 다음달부터 부모님께 다시 받기로 했다. 가을부터 취업 준비에 집중할 생각이다.
지은씨는 의식 못할지라도 지난 6개월간 자신감이 크게 늘었다. 위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지은씨는 “우리 사회는 한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열심히 일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지은씨는 ‘정반대’로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경제적 지위도 10단계 중 4에서 7로 껑충 올라갔다(가장 낮은 계층이 1, 가장 높은 계층이 10). 이는 사회에 대한 믿음으로까지 이어졌다.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살 만한 나라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비교적 살기 어렵다”에서 “비교적 살기 좋다”로 답이 바뀌었다.
특히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더 큰 확신을 갖게 됐다. 기본소득을 모든 국민에게 적용하는 것에 대해 6개월 전 “어느 정도 공감”했던 지은씨가 지금은 “매우 공감”한다. 지난 3월 대선 전에 만난 지은씨는 “대선 후보들이 기본소득을 저소득층이나 불우이웃에게 줘야 하는 돈으로만 생각하는 듯하다”고 염려했다. 중산층이 사라지고 양극화가 심해지는 사회에서 기본소득이 모든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을 텐데, 대선 후보들의 생각은 달라 보인다는 걱정이었다. “예전엔 내가 세금 안 내고 꼭 필요한 사람들한테만 복지 혜택이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어요. 유럽 복지국가들처럼 세금을 많이 내더라도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기본소득 제도가 도입돼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저도 세금을 더 부담해도 괜찮아요.”
여유가 나와 너를 이어주길
지난 6개월 동안 지은씨를 만나면서 기자가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여유”였다. ‘띄어쓰기’(대전), ‘쉼표’(전북) 등 다른 기본소득 실험의 이름에 담긴 프로젝트 기획자, 후원자들의 마음도 비슷해 보인다. 기본소득이 빈곤에 허덕이는 너의 삶과, 정신적·심리적 빈곤에 메말라 있는 나의 삶을 잇고, 개인의 삶과 더 나은 사회를 단단하게 이어주길 기대하는 마음 말이다.
6월30일 현재 ‘기본소득 월 135만원 받으실래요?’ 카카오 스토리펀딩의 모금액은 1627만6467원이다. 1120명의 후원자가 마음을 보태주었다. 그러나 ‘기본소득 2호 대상자’를 뽑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스토리펀딩 모금 기한(7월25일)까지 2천만원이 모이지 않으면 <한겨레21>은 기본소득 실험을 여기에서 마무리지으려 한다. <한겨레21>은 프로젝트에 후원금을 보태며 ‘내가 기본소득을 받는 상상’을 했던 지원자들의 절실한 마음을 기억한다. 기본소득 지급 실험은 끝나더라도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또 다른 마당’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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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작 중 13편이 1차 심사를 통과했고, 3월10일까지 보드게임을 실물과 비슷하게 제작한 프로토타입을 제출받아 최종 심사를 진행했다. 심사는 국내 최대 보드게임 회사인 코리아보드게임즈에서 맡았다. 당장 보드게임으로 출시해 팔릴 만한 완성도를 갖춘 1등 당선작은 없었지만, <이코노미스트>(이수영)와 <하이 앤 로우>(성정현)가 상금 40만원을 받는 2등에, <시민을 지켜라>(이현진·장현서·황선우)와 <데모크테시스로의 길>(정해빈)이 상금 20만원을 받는 3등에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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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행복도 높이려면?
이 보드게임에서 이기려면 돈을 많이 벌거나 공장을 여러 곳에 지으려고만 해선 안 된다. 성장보다 행복이 목표다. 게임의 최종 승자는 시민의 행복도(점수)를 늘리는 사람이다. 행복도를 높이려면, 실업률을 낮추고 시민이 원하는 상품을 소비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시민은 그 존재만으로도 상품을 소비할 권리, 즉 사회로부터 일정한 배당을 받을 권리(기본소득)를 갖는다.
국내외 총 51편 응모
게임의 구체적인 방법은 이렇다. 먼저 당신은 독일, 중국, 대한민국, 미국 등의 나라에서 한 곳을 골라야 한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그 나라의 경제를 운영하는 셈이다. 게임은 총 12라운드로 운영된다. 각 라운드에서 게임 참가자들은 식품공장, 건설회사, 의류공장, 전력회사, 컴퓨터공장, 자동차공장 등을 짓거나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액션을 취할 수 있다. 자동차공장을 지은 뒤 제품을 생산했다면 자동차 모양의 칩을 하나 획득하는 식이다.
공장 외에 은행이나 시청을 지을 수 있는데, 시청은 이를테면 ‘기본소득 공장’ 또는 ‘복지국가’를 상징한다. 시청을 지으면 상품을 생산할 수는 없지만 ‘시민 카드’ 3장을 내려놓아 소비시장을 형성할 수 있다. 시민 카드에는 노동자·관리인·전문가 세 부류가 있고, 각 시민은 원하는 종류의 물건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그림이 그려진 시민 카드를 내려놓았는데 마침 당신이 자동차 모양 칩을 갖고 있다면 ‘행복도’ 1점을 획득할 수 있다. 공장을 마구 지어 제품을 아무리 많이 생산했더라도 소비할 시민이 없으면 소용없다. 시민 카드는 모두 36장이다. 이렇게 생산, 소비 등의 액션을 번갈아 12라운드 진행하면서 1시간가량 게임을 진행한다.
마지막까지 가장 많은 행복도를 획득한 사람이 승자가 된다. 게임이 끝날 때쯤 ‘이래서 복지 또는 기본소득이 필요하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국가(게임 플레이어) 경제의 존재 이유는 결국 시민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뜻을 담은 게임이다. 기본소득을 소재로 삼은 이 보드게임의 이름은 <이코노미스트>(Economist)다.
<한겨레21>은 ‘기본소득 월 135만원 받으실래요?’ 카카오 스토리펀딩(storyfunding.daum.net/project/9578)을 진행하면서 ‘기본소득 보드게임 국제공모전’(주최 <한겨레21>, 주관 코리아보드게임즈)을 열었다. 기본소득을 주제로 한 보드게임을 직접 제작하는 아이디어를 내달라 했고, 2월13일까지 국내외에서 총 51편의 응모작(국내 44편·해외 7편)이 접수됐다.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모은 돈을 월 135만원 기본소득으로 직접 지급하는 것이 ‘현실의 실험’이라면, 보드게임 공모전은 게임이란 매체를 통해 기본소득을 간접 경험케 하려는 ‘가상의 실험’이었다.
응모작 중 13편이 1차 심사를 통과했고, 3월10일까지 보드게임을 실물과 비슷하게 제작한 프로토타입을 제출받아 최종 심사를 진행했다. 심사는 국내 최대 보드게임 회사인 코리아보드게임즈에서 맡았다. 당장 보드게임으로 출시해 팔릴 만한 완성도를 갖춘 1등 당선작은 없었지만, <이코노미스트>(이수영)와 <하이 앤 로우>(성정현)가 상금 40만원을 받는 2등에, <시민을 지켜라>(이현진·장현서·황선우)와 <데모크테시스로의 길>(정해빈)이 상금 20만원을 받는 3등에 뽑혔다.
코리아보드게임즈 쪽은 “많은 응모작들이 헬조선, 수저계급, 취업난, 저임금 아르바이트 같은 우리나라 경제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 현실을 해결할 대안으로 기본소득이 제시됐지만 ‘정량의 수입을 공평하게 주는 규칙’ 정도로만 기본소득이 등장한 점이 아쉽다. 세계적으로 기본소득을 다룬 보드게임이 출시된 사례가 없고, 기본소득제가 실제 시행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다는 한계 때문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정당 되거나, 금수저·흙수저 되거나
그럼에도 최종 당선작들의 수준은 꽤 높았다. 보드게임 형식을 빌려 기본소득제의 의의를 잘 구현해보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게임 방식이나 규칙이 돋보이는 작품도 많았다. 응모작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 <이코노미스트>처럼 게임 플레이어가 국가 또는 경제 관료가 되어 진행하는 국가 경영 게임이다. 둘째, 게임 속에서 의회를 재현해 정책을 입안하고 플레이어들이 투표하도록 진행하는 게임이다. 셋째, 플레이어가 직접 다양한 직업을 가진 캐릭터가 되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경쟁하는 게임이다.
<이코노미스트>와 함께 2등으로 뽑힌 <하이 앤 로우>는 두 사람이 하는 게임이다. 한 사람은 ‘금수저’, 한 사람은 ‘흙수저’가 되어 한 달을 사는 방식으로 게임을 진행한다. 금수저는 1시간에 10만원짜리 타이마사지, 2시간에 40만원 하는 호텔 스파 풀케어를 즐기거나 2시간 동안 음미하는 40만원짜리 해산물 요리를 먹는 반면, 흙수저는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을 공짜로 먹거나 1만원짜리 탕짜면으로 허기를 겨우 채워야 한다. 노래방, 자전거 데이트 등이 여가생활의 전부다. 게임은 5라운드로 진행되는데, 전반전까지는 기본소득이 시행되지 않다가 후반에 들어 기본소득이 시행되면서 흙수저의 형편이 크게 나아진다. 흙수저 플레이어는 경우에 따라 기본소득제 시행을 앞당길 수 있다.
<시민을 지켜라>는 게임 플레이어가 국가가 되어 세금제도와 복지정책을 결정하고, 이에 따라 인구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점수화하는 게임이다. 복지정책 가운데 기본소득을 선택할 수도, 선별적 복지를 선택할 수도 있다. 복지정책이 소홀하면 국민이 죽기도 하고,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기도 한다. 플레이어인 국가 처지에선 노인이나 저소득층이 부담이 되는 현실 등도 빗댔다.
<데모크테시스로의 길>은 정당의 당수가 되어 시뮬레이션 형식으로 의회에서 자기 정당의 정책이 관철되도록 하는 게임이다. 의회에서 안건이 통과되느냐 통과되지 않느냐에 따라 국가 운영이 달라지고, 플레이어들은 게임 내에서 안건을 통과시키거나 승리하기 위해 합종연횡할 수도 있다. 게임 시작 단계에서 정당들은 기본소득제에 합의하지만, 아직 제도가 사회에 완전히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게임 내내 기본소득제를 유지하기 위해 플레이어(정당)들이 협력해야 한다. 정권이 붕괴하면 기본소득제도 폐기되기 때문이다.
‘메시지’와 ‘오락성’ 두 마리 토끼
심사를 진행한 박지원 코리아보드게임즈 차장은 “기본소득이란 메시지와 보드게임이란 오락성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은 게임을 위주로 최종 당선작을 선정했다. <이코노미스트>가 게임으로서 완성도에 가장 근접했던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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