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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0일, 경향신문, 김종철 칼럼
- ‘깊은 민주주의’가 세상을 살린다
-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세상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다. 세월호 사태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생명보다 돈을 중히 여기는 풍조는 조금도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온갖 불의와 부조리, 비이성과 몰상식이 활개를 치는 사회는 갈수록 자정기능을 잃고, 병들어 썩어가고 있다.
이 상황에서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모든 사회적 부패와 병리현상에 대하여 최종적인 책임이 있는 ‘정치’가 지금 완전히 기능 부전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전체 근로소득자의 절반 이상이 기아임금을 받고, 자살률은 산업국가 중 최고인데다 젊은이들은 결혼도, 가정을 꾸리는 일도,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게 지금 이 나라 ‘국민’의 생활실태이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는 이 나라 통치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점점 심해지는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해법이랍시고 정규직을 보다 쉽게 해고할 수 있는 터무니없는 방안을 내놓고 있는 게 아닐까.
소위 야당 정치가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지금 ‘경제민주주의’의 절박성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제대로 싸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뿌리 깊은 무능 탓인지, 의지가 없는 탓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따져보면, 근본적인 이유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의 부족 때문일 것이다. 사실, 여야를 막론하고, 지금 정치가들은 ‘정치가계급’이라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여 거기에 안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특권적인 지위의 영속화 이외에는 별로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런 ‘국민’ 없는 국가라는 기묘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일찍이 소비에트사회주의권이 붕괴했을 때 <역사의 종언>이라는 논문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최종적인 승리를 논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몇 해 전 내놓은 <정치적 질서의 기원>에 이어 최근에는 <정치적 질서와 정치적 쇠퇴>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이 저술들에서 그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제도도 계속적인 자기갱신을 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쇠퇴·자멸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동안 민주체제를 대변해온 미국의 정치질서도 지금 심각한 쇠퇴국면에 놓여 있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민주정치’가 쇠퇴하고 있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대의제 정치가 공공선이 아니라 자본과 기업의 이익을 무엇보다 앞세우는 하수인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금 민주주의란 허울뿐, 어디서나 압도적인 것은 금권과두정치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선거를 하고 투표를 한다 하더라도 상황이 개선될 가능성은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의지나 계획을 가진 개인이나 정당이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은 제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선거를 통해 민의를 묻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지금은 작동불능 상태라는 사실이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국민을 향해서 (집권 후 쉽게 뒤집어버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된 정치풍토에서 ‘책임 있는 민주정치’란 언어도단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최근 저서들에서 제시하는 모범적인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있다. 그는 그것을 ‘덴마크’라고 부른다. 이 경우, 덴마크는 현실의 특정 국가라기보다 “번영을 누리고, 민주적이고, 안전하며, 잘 통치되고, 부패 정도가 낮은” 상상의 나라이다. 그러나 비록 상상의 장소라지만, 굳이 ‘덴마크’라는 이름으로 성숙한 민주주의를 묘사한 데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후쿠야마의 의도가 무엇이든, 덴마크를 하나의 모범국가로 제시한 것은 자연스럽게 생각된다. 지난 몇 해 동안 나는 덴마크에 관한 자료와 문헌을 읽을 때마다 늘 감탄이 절로 나왔다. 덴마크가 단순히 세계 첫째의 복지국가라는 것 때문이 아니다. 덴마크는 한때 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나라였지만, 자립적 정신과 협동적 능력을 기르는 광범한 민중교육과 협동조합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 바탕 위에서 복지민주국가가 된 나라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덴마크인들에게 민주주의란 대의제가 아니라, 정치를 자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비단 국가 차원뿐만 아니라 생활의 온갖 영역에서도 대화와 토의를 통한 합의제 민주주의를 습관화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것은 ‘시민합의회의’라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원래 1980년대 초에 핵발전소 건설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벌어진 논쟁의 산물이다. 그 논쟁 중에서 덴마크 국민 다수는 원전 도입을 반대했고, 의회는 국민의 뜻을 따랐다. 그런데 덴마크가 좋은 나라인 것은, 찬반 두 의견 사이에 치열했던 논쟁으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는 점이다.
즉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해야 할 문제가 대두될 때 그것을 절도 있게, 가장 합리적으로 논의·결정할 제도적 틀을 만든 것이다. 그것이 ‘시민합의회의’이다. 예를 들어, 유전자변형농산물을 도입할 것이냐를 결정할 때 국민들의 숙고된 의사를 얻어내기 위해서 이 시민합의회의가 열린다. 대개 20명 정도로 구성되는 이 회의의 멤버들은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시민들 중에서 제비뽑기로 무작위로 뽑혀, 몇 달 동안 주말마다 모여 해당 전문가들의 설명과 관련 자료들을 철저히 숙지한 다음, 국회의사당에서 공개리에 최종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이 회의는, 목사, 교수, 변호사, 택시운전사, 간호사, 환경미화원 등 다양한 신분의 시민들로 구성되는 게 상례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결정이 대개 다수결이 아니라 전원 합의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투표가 아니라, 제비뽑기로 뽑혔기 때문에 그들이 특정 이해관계를 가진 자들의 영향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특별한 이권,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는 이상, 사람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게 마련이다.
아직까지 덴마크에서도 이 시민합의회의는 과학기술과 관련된 문제에 국한해서 실시되고 있지만, 그 원리는 국가의 중대사 전반에 걸친 의사결정 방식으로 활용해도 조금도 모자랄 게 없다. 아니, 제비뽑기에 의한 시민회의라는 ‘깊은 민주주의’의 실천이야말로 민중의 집단지성이 왜곡 없이 반영되는 가장 합리적인 국가운영을 약속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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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도서] 덴마크어 정 한사전
- 박보경 (지은이) | 명지출판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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