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원사 주지인 성원스님이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선원사지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
▲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고 보관했던 선원사터. 고려왕조는 1232년 개경을 떠나 강화로 도읍을 옮긴 뒤 방대한 지식과 최첨단 인쇄술의 결합인 '팔만대장경'을 1236년~1251년 판각한다. 팔만대장경은 이후 150년간 강화도에 보관되다 1398년 지금의 해인사로 이운된다. 대장경을 판각하던 고려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선원사지의 겨울풍경이 쓸쓸하기만 하다. |
우리나라는 물론 동아시아 불교 사상 지식 집대성 '위대한 걸작'
150년간 선원사 보관 … 1398년 서울 거쳐 경남 합천 해인사 이운
"심하도다 달단(몽골)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 할 수 없으며, 이런 까닭에 그들이 지나간 곳에서는 불상과 불경책이 모두 불 타 없어졌습니다.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 판본도 남김없이 불에 타 버렸습니다. 아, 여러 대에 걸쳐 이루어진 공적이 하루 아침에 재가 되어 나라의 큰 보배를 잃었습니다, 이런 짓을 하는데…, 크 흐 흑!"
'대장각판 군신기고문'(大藏刻版 君臣祈告文)을 읽어 내려가던 이규보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잠시 고개를 떨구었던 이규보가 다시 떨리는 손으로 문서를 펴 들었다.
"원하옵건데 신통한 힘을 빌어주어 완악한 오랑캐로 하여금 멀리 도망하여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여 전쟁이 그치고 중외가 편안하며 모후 저군이 무강한 수를 누리고 나라의 국운이 만세로 유지될 수 있게 하여 주신다면 제자들은 마땅히 노력하여 더욱 법문을 보호하고 부처님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 합니다."
1237년(고종24). 고종임금의 눈에 안개가 어렸다. 고려 무신정권의 실권자 최이의 눈도 가늘게 접혔다. 그것도 잠깐, 최이의 눈이 펴지며 끓는 용암처럼 무섭게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높은 문화수준을 가진 고려가 야만족인 오랑캐에게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의지의 안광이었다.
최이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판각이란 '대불사'를 기획한 주인공이었다. 그가 팔만대장경 판각을 결정한 것은 어떻게든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지켜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이는 무엇보다 대장경 판각을 통해 불력의 힘으로 몽골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한편 고려의 승려들과 백성들의 처참한 삶과 황폐해진 영혼을 달래고 그들의 힘을 하나로 결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 중국 북방에서 발원한 거란족이 993년(성종12)부터 세 차례나 고려를 침략하자 1011년(현종2) 고려는 처음으로 대장경 판각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70여년 만에 대장경이 완성됐을 때 놀랍게도 오랑캐는 물러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초조대장경'은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1232년(고종19) 몽골에 의해 소실된다.
이후 대각국사 의천이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 송에서 가져온 불경과 요(遼)·일본에서 수집한 불경의 총목록을 작성한 뒤 만든 대장경이 '속대장경'(續大藏經)이다. 속장경은 1010부 4740여권에 달했으나 이 역시 몽골의 병화로 거의 사라지고 일부만 전해진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236년 고려는 또다시 대장경 판각을 시작, 1251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완성한다. '팔만대장경'의 탄생이다. 연인원 130만여명이 참여해 만든 세계의 불가사의 팔만대장경은 전쟁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하나로 결집하는 '사회대통합'의 국책 사업이었다. 고려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한 자 한 자 나무판에 새겨넣으며 하루라도 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기원했다. 고려인들에겐 세계 문명의 중심국이란 자부심도 깔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팔만대장경은 우리나라는 물론 동아시아 불교사상과 지식을 집대성한 위대한 걸작이었던 것이다. 이는 인류 최초의 한문대장경인 송나라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이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을 비롯해 그때까지 나왔던 대장경을 모두 모아 방대하게 제작했기 때문이다.
박종기(국민대교수) 강화고려역사재단 대표이사는 "팔만대장경 판각은 불교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완벽한 인쇄기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며 "방대한 불교지식과 뛰어난 인쇄술의 결합이 팔만대장경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팔만대장경은 경판의 수가 8만여장(8만1258장)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 '고려대장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강도시기(고려가 도읍을 강화로 천도한 1232년~1270년) 제작해 '강화경판대장경'이라고도 불린다. 대장경은 부처님 말씀을 체계적으로 모은 법전으로 '불교성전'을 총칭하는 단어다. 불제자들이 지키고 따라야 할 부처님의 근본교리라고 할 수 있다. 내용상으로 볼 때 서양의 성경에 비유할 수 있다.
기원전 544년쯤 석가모니 부처가 입적한 이후 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 기록해야 겠다고 생각한다. 제자들은 이에 따라 부처의 가르침인 경(經), 부처가 정한 교단의 규칙인 율(律), 경과 율을 해석한 논(論)의 '삼장'을 그러모은다. 삼장은 '경·율·논'을 담아 놓은 '세 개의 광주리'(Tripitaka)란 뜻을 갖고 있다. 손오공에 나오는 '삼장법사'는 경율논을 통달한 승려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인쇄술의 발달과 출판기술에 큰 공헌을 한 팔만대장경은 150년간 강화도 '대장경판당'에 보관됐었다. 그러나 1398년(조선태조7) 서울 용산강을 거쳐 지금의 경남 합천 해인사로 이운된다.
2015년 2월, 팔만대장경을 품고 있던 선원사는 '선원사지'로만 남은 모습이다. 흔적이 없으면 오히려 더 신비스럽고, 또 더 큰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법이다. 누런 풀잎들을 밟으며 천천히 걸어간다. "바스락", 마른 풀잎을 밟는 소리가 나무판에 부처님 말씀을 새기는 소리로 다가와 오래도록 귓전을 맴돈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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