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족진은 정족사고를 보호할 목적으로 운영한 조선시대 군사주둔지이다. 정족진에서 바라본 전등사 경내의 모습. 이 방향에서 왼편으로 정족사고가 위치한다. |
프랑스군 강화부 점령 … 서리·사서 등 토굴 파서 봉안
<정족사고 구조>
단층·별관 타 사고와 대조 … 보관에 열람 기능까지 겸비
눈동자 색깔이 시퍼런 오랑캐들이 강화부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랑캐들이 곧 '정족사고'까지 올라와 모든 책을 불태워버릴 것이란 정보가 올라왔다.
"놈들이 여기까지 올라온다면 책들이 모두 불 타고 말 것이오.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옮기도록 합시다!"
▲ 왕실서적을 보관했던 선원보각. |
▲ 왕실서적을 보관했던 장사각. |
사서들이 왕실서적을 모두 옮긴 뒤,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정족진에서 배수진을 치고 결전의 날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11월7일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해병 160여명이 정족산성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승병들과 호랑이를 잡는 범포수와 합세한 조선군은 남문을 통해 정족산성으로 기어오르는 프랑스군에게 총공세를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대패하고 만다.
최신 무기로 중국, 일본과 같은 동양인들을 제압했지만, 조선인들은 달랐다. 체구가 작고 얼굴이 새카맣지만 눈빛만큼은 호랑이처럼 이글거렸다. 조선인들은 함포를 쏴도 도망가지 않았고, 총이나 칼을 맞으면 그냥 쓰러지지 않고 조롱하는 얼굴로 적의 얼굴에 "칵"하고 피를 내뿜은 뒤 고꾸라지는 것이었다. 그런 조선인들은 사람이 아니라 마치 괴물처럼 보였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군은 11월11일 한 달 동안 점거했던 강화성에서 철수하며 관아를 불태우고 보물, 무기, 서적 등 약탈한 전리품을 갖고 결국 중국으로 떠난다.
오랑캐들이 떠난 뒤 은밀한 장소에 숨겨두었던 왕실서적을 환안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정족사고에서 나갈 당시는 워낙 시급한 상황이었으므로 조정의 허락을 받기조차 어려웠으나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을 때는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부를 점령하자 왕실서적을 임시 피난처로 이동시킨다. 사진은 당시 왕실서적을 숨겨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등사 북문 아래 토굴. |
병인양요 뒤 정족사고에 보관되던 <조선왕조실록>이 지금의 규장각으로 가게 된 건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1905) 뒤 일본군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부터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은 뒤 조선에 대한 사실상의 식민지배를 시작한다. 이때 정족사고의 서적이 일제 통감부 도서관으로 옮겨졌고, 1924년 일제가 서울에 관립종합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세우며 다시 이곳으로 옮겨 놓는다. 경성제대는 광복 뒤 국립 서울대로 바뀌었고, 서울대 규장각이 계속해서 정족사고에 있던 왕실서적을 보관해오고 있다. 결국 일제에 의해 옮겨진 인천 강화의 유산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외지에서 머물고 있는 셈이다.
정족사고는 단층구조로 돼 있다. 전국의 다른 사고들은 모두 2층 구조인데 유일하게 정족사고만 단층으로 돼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고들이 보관 기능만 하는 반면, 정족사고의 경우 열람기능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취향당'과 같은 별관 역시 정족사고에서만 볼 수 있는 건물이다. 취향당 편액은 특히 영조임금이 전등사를 찾았을 때 직접 써서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현재 정족사고는 텅 비어 있다. 전국에서 가장 규모있는 사고임에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은 것도 과제로 지적된다.
범우 전등사 주지스님은 "일제에 의해서 서울로 가게 된 것인만큼 제자리로 환원하는 것이 민족정신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길이라고 본다"며 "강화도나 인천에 국립기록문화유산 보존시설을 설립해 원자리로 되돌려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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