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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보라 의원 |
의사이자 혁명가였던 중국의 쑨원(孫文)은 “소의치병 중의치인 대의치국(小醫治病 中醫治人 大醫治國)”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중간 의사는 사람을 고치며, 큰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는 뜻이다.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건강하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사회의 병을 고치지 않고서는 개인의 병을 온전히 치유하지 못한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건강이란 단지 아프거나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ㆍ정신적ㆍ사회적으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경기도의회 김보라 의원(새정치민주연합, 비례)은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는 환자 개인을 간호하기에 앞서 사회의 모순과 싸우는 일에 뛰어들었다. 의대-간호대의 선후배들과 함께 건강한 사회를 고민하고, 소외된 약자들과 함께 하는 ‘큰 의료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그리고 꾸준히 실천했다. 그런 집단적인 고민과 노력을 통해 1994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생활협동조합(의료생협)인 안성의료생협이다.
입학식 날부터 학생회실 노크
김 의원은 1988년 대학 신입생 때부터 학생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정치 이슈에 민감한 가정에서 자라기도 했거니와, 서울 광진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1986년에 이른바 ‘건대 항쟁’을 가까이 접하면서 학생운동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1987년의 ‘6월 항쟁’과 대통령 선거도 유심히 지켜봤다.
대학 입학식 날부터 그는 입학식장 대신 학생회실을 먼저 찾았다.
“여기가 총학생회실 맞나요?”
“그런데요?”
“저 올해 신입생인데요, 제가 할 일 없을까 해서 왔습니다.”
앳된 새내기 여학생이 대학 첫 날부터 입학식장에는 안 가고 학생회실로 스스로 찾아와 할 일을 달라니,선배들로서는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학생회에서 교지 편집부 활동을 시작했다.
학생회 일을 하면서 많은 선배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비록 소수였지만, ‘생명’과 ‘유기농법’, ‘협동조합’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현재 한살림생협의 김재경 상무, 윤형근 상무 등이 그때 만났던 선배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있는 원주에도 가 보고, 김지하 시인의 생명론도 듣고, 한살림생협이 태동하는 것도 보았다.
최초의 의료생협을 만들다
당시 의대-치대-간호대 기독학생회는 평소에는 주말마다 수도권 공단에서, 방학에는 농촌 마을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김 의원은 2학년이던 1989년 여름방학에 안성 고삼면의 마을로 처음 진료봉사 활동을 왔는데, 이것이 그와 안성의 첫 인연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이런저런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여러 환자들을 보면서 ‘아프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병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주민과 함께 하는 병원, 주민이 믿고 찾아갈 수 있는 병원.그러기 위해서는 병원이 환자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주민들의 삶 속에서 함께 움직이고 함께 고민하는 병원이어야 했다. 주민들이 부담 없이 찾아가서 아픈 부위나 증상에 대해, 건강한 삶에 대해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병원이어야 했다. 또 개인의 질병만이 아니라 지역사회, 나아가 나라의 건강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큰 병원’이어야 했다.
당시 뜻있는 의료인들 중에는 ‘민중의원’을 설립ㆍ운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민중의원은 지역의 주민이 참주체가 되는 구조는 아니었고, 따라서 지역민의 삶과 전면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김 의원과 그의 동료들은 ‘공동의원’을 모색했다. 의료인과 의료소비자가 공동으로 만들어 운영한다는 의미, 양방과 한방을 공동으로 채택한다는 의미의 공동의원이었다. 이렇게 ‘안성공동의원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러던 중에 당시 출간된 <몬드라곤에서 배우자>(1992년 초판 발행)를 접하면서 병원도 협동조합 방식으로 만들어 운영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게다가 당시 ‘농협 민주화’가 이슈가 되면서 ‘협동조합’ 자체가 중대한 의제로 논의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서서히 ‘의료생활협동조합’의 아이디어가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공동의원 추진위원회’는 ‘의료생협 추진위원회’로 바뀌었다. 추진위를 중심으로 조합원 모집에 나선 지 수 개월. 드디어 1994년 4월에, 의료인들과 직원들, 지인들, 예술인들, 그리고 안성 주민 300여 명 들이 참여하는 ‘안성의료생협’을 창립할 수 있었다.
노찾사(노래를찾는사람들)도 안성에 내려와 노래 공연으로 응원하기도 했고, 많은 화가들이 작품 전시회를 열어 기금을 만들어 직접 출자하기도 했다. 당시 안성에는 전시회를 열 만한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김 의원은 흰색 천을 사다가 밤새 미싱을 돌려 시민회관 소회의실을 장식하여 전시실로 꾸몄다. 몸은 고되었지만, 신명은 높고도 높았다.
협동조합은 민주주의의 학교
“하지만, 의료생협 만들 때는 하나도 힘든 줄 몰랐는데, 정작 만들고 나서 운영하는 과정은 무척 어려웠어요. 그렇게 힘든 줄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시작 안했을지도 몰라요.(웃음)”
어떤 점이 그렇게 힘이 들었을까.
바로, 다양한 구성요인을 갖는 조합원 및 직원들이 함께 합의하고 결정하는 그 과정이 제일 힘들었다고 한다. 우선 소비조합원들의 경우 지역마다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직원조합원들의 경우도 각자 맡은 역할이 생판 다른데다가 나이도 천차만별이어서 의견이 쉽게 모아지지를 않았다. 게다가 전례가 없는 첫 의료생협이다 보니 조합의 운영 면에서 참조할 만한 사례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속에서 수백 명의 조합원들을 일일이 만나 의견을 모으려니, 거의 매일같이, 그것도 밤늦도록 회의에 회의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2년에 한 번씩 치르는 대의원 선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각 지역마다 주민의 3분의 1은 꼭 출석한 상태여야 선거가 성립되는 것으로 정했기 때문에, 성원 미달로 선거가 연기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니 선거 한 번 치르는 데 몇 개월씩 걸리곤 했다.
총회는 총회대로 힘들었다. 농촌지역의 특성상 1~2월에 주민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총회의 예산 승인도 받지 않은 채 사업이 진행된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난점 때문에 예산 총회와 결산 총회를 분리하여 열고 있지만, 초기에는 그런 묘(妙)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안성의료생협의 설립 및 운영 과정은 고스란히 주민들을 위한 민주주의의 학교 그 자체였다. 소통하고, 협의하고, 합의된 결정을 준수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는 쌓여갔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동체의 새살이 돋아났다.
김 의원은 말한다. 이제 조합원들은 무슨 일이든 힘을 모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고. 어떤 일이든 필요한 게 있으면 “우리가 하면 되지!” 하는 식의 결의와 실천이 이루어진다고. 협동조합을 통한 학습과 훈련 없이 시민들의 이런 자신감과 확신이 과연 생길 수 있었을까?
의료생협에서 의회로
지난해 2014년 4월은 이렇게 만들어져 운영되어온 안성의료생협이 20년 된 때였다. 조합의 규정상 10년 근무한 직원은 3개월의 안식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김 의원은 20년 근무해온 터였으니, 규정대로라면 6개월 정도의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 김 의원 스스로도 이제 좀 쉴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 못했던 제안을 받게 됐다. 6. 4 지방선거에 민주당(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 경기도의회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할 생각이 있느냐는 거였다.
사실 그간의 의료생협 활동 과정에서 김 의원은 정부 쪽과 접촉할 때마다 미흡한 점을 많이 느낀 터였다. 정부가 무슨무슨 정책이나 제도를 만든다고는 하는데 정작 그것이 현장에 도움이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적이 더 많았던 것이다. 김 의원은 기회가 된다면 현장 중심의 행정을 마련하는 일에 그간의 경험을 써 보고 싶었다. 그래서 출마를 결심했고,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아 도의원에 당선되었다.
상임위는 경제과학기술위를 택했다. 사회적경제를 위해 뛰어보고 싶었고, 또 햇빛발전 등을 비롯한 지속가능한 에너지 발전 문제를 고민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소비자정책을 통해 바람직한 산업발전을 도모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활동이라고 보았다.
김 의원은 그간의 도의회 활동을 통해, 도의원이라는 자리가 현장과 행정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행정이 권위만을 내세우고 현장을 무시할 때 실사구시는 멀어지고 탁상공론만 남는 것은 뻔한 이치다. 그러니 의회가 나서서 행정을 약자인 현장 쪽으로 견인해야 한다는 것이 김 의원의 생각이다.
최근 김 의원의 직함이 하나 더 늘었다. 당에서 안성지역위원장 직무대행을 맡긴 것. 지역에서의 당세 확장 과제까지 맡았으니 어깨는 전보다 더 무거워졌을 텐데, 오히려 그는 더 힘이 나는 모양이다.
“제가 잘 하는 게 소통이잖아요. 사회적경제 현장과 지방정부 사이에서 양측의 좋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지역에서 당세 확장을 위해서도 부지런히 뛰어볼 생각입니다.”
그의 말은 생동감으로 넘치고, 그래서 빛이 난다.
김 의원은 말한다. 건강해지려면 지역과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지역의 공동체가 살아나야 건강을 건강답게 지킬 수 있다고. 어쩌면 김 의원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길 위에 서 있는지 모른다. 사람을 보듬고 사회를 바루는 ‘큰 의료인’이 되는 그 길 위에.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건강하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사회의 병을 고치지 않고서는 개인의 병을 온전히 치유하지 못한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건강이란 단지 아프거나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ㆍ정신적ㆍ사회적으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경기도의회 김보라 의원(새정치민주연합, 비례)은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는 환자 개인을 간호하기에 앞서 사회의 모순과 싸우는 일에 뛰어들었다. 의대-간호대의 선후배들과 함께 건강한 사회를 고민하고, 소외된 약자들과 함께 하는 ‘큰 의료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그리고 꾸준히 실천했다. 그런 집단적인 고민과 노력을 통해 1994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생활협동조합(의료생협)인 안성의료생협이다.
입학식 날부터 학생회실 노크
김 의원은 1988년 대학 신입생 때부터 학생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정치 이슈에 민감한 가정에서 자라기도 했거니와, 서울 광진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1986년에 이른바 ‘건대 항쟁’을 가까이 접하면서 학생운동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1987년의 ‘6월 항쟁’과 대통령 선거도 유심히 지켜봤다.
대학 입학식 날부터 그는 입학식장 대신 학생회실을 먼저 찾았다.
“여기가 총학생회실 맞나요?”
“그런데요?”
“저 올해 신입생인데요, 제가 할 일 없을까 해서 왔습니다.”
앳된 새내기 여학생이 대학 첫 날부터 입학식장에는 안 가고 학생회실로 스스로 찾아와 할 일을 달라니,선배들로서는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학생회에서 교지 편집부 활동을 시작했다.
학생회 일을 하면서 많은 선배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비록 소수였지만, ‘생명’과 ‘유기농법’, ‘협동조합’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현재 한살림생협의 김재경 상무, 윤형근 상무 등이 그때 만났던 선배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있는 원주에도 가 보고, 김지하 시인의 생명론도 듣고, 한살림생협이 태동하는 것도 보았다.
최초의 의료생협을 만들다
당시 의대-치대-간호대 기독학생회는 평소에는 주말마다 수도권 공단에서, 방학에는 농촌 마을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김 의원은 2학년이던 1989년 여름방학에 안성 고삼면의 마을로 처음 진료봉사 활동을 왔는데, 이것이 그와 안성의 첫 인연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이런저런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여러 환자들을 보면서 ‘아프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병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주민과 함께 하는 병원, 주민이 믿고 찾아갈 수 있는 병원.그러기 위해서는 병원이 환자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주민들의 삶 속에서 함께 움직이고 함께 고민하는 병원이어야 했다. 주민들이 부담 없이 찾아가서 아픈 부위나 증상에 대해, 건강한 삶에 대해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병원이어야 했다. 또 개인의 질병만이 아니라 지역사회, 나아가 나라의 건강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큰 병원’이어야 했다.
당시 뜻있는 의료인들 중에는 ‘민중의원’을 설립ㆍ운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민중의원은 지역의 주민이 참주체가 되는 구조는 아니었고, 따라서 지역민의 삶과 전면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김 의원과 그의 동료들은 ‘공동의원’을 모색했다. 의료인과 의료소비자가 공동으로 만들어 운영한다는 의미, 양방과 한방을 공동으로 채택한다는 의미의 공동의원이었다. 이렇게 ‘안성공동의원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러던 중에 당시 출간된 <몬드라곤에서 배우자>(1992년 초판 발행)를 접하면서 병원도 협동조합 방식으로 만들어 운영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게다가 당시 ‘농협 민주화’가 이슈가 되면서 ‘협동조합’ 자체가 중대한 의제로 논의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서서히 ‘의료생활협동조합’의 아이디어가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공동의원 추진위원회’는 ‘의료생협 추진위원회’로 바뀌었다. 추진위를 중심으로 조합원 모집에 나선 지 수 개월. 드디어 1994년 4월에, 의료인들과 직원들, 지인들, 예술인들, 그리고 안성 주민 300여 명 들이 참여하는 ‘안성의료생협’을 창립할 수 있었다.
노찾사(노래를찾는사람들)도 안성에 내려와 노래 공연으로 응원하기도 했고, 많은 화가들이 작품 전시회를 열어 기금을 만들어 직접 출자하기도 했다. 당시 안성에는 전시회를 열 만한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김 의원은 흰색 천을 사다가 밤새 미싱을 돌려 시민회관 소회의실을 장식하여 전시실로 꾸몄다. 몸은 고되었지만, 신명은 높고도 높았다.
협동조합은 민주주의의 학교
“하지만, 의료생협 만들 때는 하나도 힘든 줄 몰랐는데, 정작 만들고 나서 운영하는 과정은 무척 어려웠어요. 그렇게 힘든 줄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시작 안했을지도 몰라요.(웃음)”
어떤 점이 그렇게 힘이 들었을까.
바로, 다양한 구성요인을 갖는 조합원 및 직원들이 함께 합의하고 결정하는 그 과정이 제일 힘들었다고 한다. 우선 소비조합원들의 경우 지역마다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직원조합원들의 경우도 각자 맡은 역할이 생판 다른데다가 나이도 천차만별이어서 의견이 쉽게 모아지지를 않았다. 게다가 전례가 없는 첫 의료생협이다 보니 조합의 운영 면에서 참조할 만한 사례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속에서 수백 명의 조합원들을 일일이 만나 의견을 모으려니, 거의 매일같이, 그것도 밤늦도록 회의에 회의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2년에 한 번씩 치르는 대의원 선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각 지역마다 주민의 3분의 1은 꼭 출석한 상태여야 선거가 성립되는 것으로 정했기 때문에, 성원 미달로 선거가 연기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니 선거 한 번 치르는 데 몇 개월씩 걸리곤 했다.
총회는 총회대로 힘들었다. 농촌지역의 특성상 1~2월에 주민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총회의 예산 승인도 받지 않은 채 사업이 진행된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난점 때문에 예산 총회와 결산 총회를 분리하여 열고 있지만, 초기에는 그런 묘(妙)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안성의료생협의 설립 및 운영 과정은 고스란히 주민들을 위한 민주주의의 학교 그 자체였다. 소통하고, 협의하고, 합의된 결정을 준수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는 쌓여갔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동체의 새살이 돋아났다.
김 의원은 말한다. 이제 조합원들은 무슨 일이든 힘을 모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고. 어떤 일이든 필요한 게 있으면 “우리가 하면 되지!” 하는 식의 결의와 실천이 이루어진다고. 협동조합을 통한 학습과 훈련 없이 시민들의 이런 자신감과 확신이 과연 생길 수 있었을까?
의료생협에서 의회로
지난해 2014년 4월은 이렇게 만들어져 운영되어온 안성의료생협이 20년 된 때였다. 조합의 규정상 10년 근무한 직원은 3개월의 안식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김 의원은 20년 근무해온 터였으니, 규정대로라면 6개월 정도의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 김 의원 스스로도 이제 좀 쉴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 못했던 제안을 받게 됐다. 6. 4 지방선거에 민주당(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 경기도의회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할 생각이 있느냐는 거였다.
사실 그간의 의료생협 활동 과정에서 김 의원은 정부 쪽과 접촉할 때마다 미흡한 점을 많이 느낀 터였다. 정부가 무슨무슨 정책이나 제도를 만든다고는 하는데 정작 그것이 현장에 도움이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적이 더 많았던 것이다. 김 의원은 기회가 된다면 현장 중심의 행정을 마련하는 일에 그간의 경험을 써 보고 싶었다. 그래서 출마를 결심했고,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아 도의원에 당선되었다.
상임위는 경제과학기술위를 택했다. 사회적경제를 위해 뛰어보고 싶었고, 또 햇빛발전 등을 비롯한 지속가능한 에너지 발전 문제를 고민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소비자정책을 통해 바람직한 산업발전을 도모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활동이라고 보았다.
김 의원은 그간의 도의회 활동을 통해, 도의원이라는 자리가 현장과 행정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행정이 권위만을 내세우고 현장을 무시할 때 실사구시는 멀어지고 탁상공론만 남는 것은 뻔한 이치다. 그러니 의회가 나서서 행정을 약자인 현장 쪽으로 견인해야 한다는 것이 김 의원의 생각이다.
최근 김 의원의 직함이 하나 더 늘었다. 당에서 안성지역위원장 직무대행을 맡긴 것. 지역에서의 당세 확장 과제까지 맡았으니 어깨는 전보다 더 무거워졌을 텐데, 오히려 그는 더 힘이 나는 모양이다.
“제가 잘 하는 게 소통이잖아요. 사회적경제 현장과 지방정부 사이에서 양측의 좋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지역에서 당세 확장을 위해서도 부지런히 뛰어볼 생각입니다.”
그의 말은 생동감으로 넘치고, 그래서 빛이 난다.
김 의원은 말한다. 건강해지려면 지역과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지역의 공동체가 살아나야 건강을 건강답게 지킬 수 있다고. 어쩌면 김 의원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길 위에 서 있는지 모른다. 사람을 보듬고 사회를 바루는 ‘큰 의료인’이 되는 그 길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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