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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부터 제작된 우리나라 전통한지는 고려시대 '고려지'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첨단 하이테크 기술이었다. 현재 전통한지는 전주지역이 알려졌으며 인천경기지역에선 가평의 '장지방'이 전통 방식으로 종이를 만들고 있다. 장지방은 '장씨 집안에서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126년째 대를 이어 닥나무를 이용한 전통방식으로 한지를 만드는 곳이다. 장지방의 장용훈 지장은 중요 무형문화재이다. 장성우 경기도 무형문화재 전수조교가 한지를 뜨고 있다. |
▲ 강화도의 충렬사. 인천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에 있는 충렬사는 1641년(인조19)에 김상용을 비롯해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인물들을 모시기 위한 사우다. 충렬사터는 지금의 선원사와 함께 팔만대장경과 같은 목판인쇄물을 판각한 '대장도감'이 있던 자리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고려지는 금·은·동·철의 광산물이나 소금, 미역, 생선, 직물, 땔깜과 같은 수공업제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한 특수한 행정단위인 '소'(所) 가운데 하나인 '지소'(紙所)에서 만들었다. |
'활자·종이·먹 우수 … 유구역사 보존
'송연·유연묵' 품질 中서 크게 호평
닥나무 도침법으로 당대 종이 제작
제지공이 활자판에서 조심스럽게 종이를 떼어냈다. 세로로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찍혀나왔다. 인쇄된 글씨는 미세한 번짐도 없이 '증도가자'의 크기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글자의 빛깔은 검은색이었으나 백옥처럼 맑은 빛을 내뿜었다. 청홍색이 감도는 것처럼도 보였다. '대장도감'을 찾아 금속활자를 인쇄한 '고려지'를 꼼꼼히 살펴보던 최이(최우)가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음 이 정도면 백운거사도 만족하실게다. 속히 본문을 인쇄하거라"
인쇄를 위해선 활자뿐 아니라 종이와 잉크, 즉 먹물이 필요하다. 활자를 아무리 잘 만든다 해도 종이와 먹의 품질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글씨가 번지거나 뭉게질 수 있다. 활자 인쇄는 이처럼 주조의 기술 외에도 판을 찍어낼 종이와 먹의 제작기술이 뛰어나야 가능했다. 700년 경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0세기 제작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지금까지 1000년 넘게 부식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고려가 뛰어난 종이와 먹을 생산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중국 원대 왕쩐(王禎)의 1313년 <농서>(農書) 권22 부록 '조활자인서법'의 기록엔 "주석으로 활자를 만들었는데 먹을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많아 인쇄가 거의 되지 않는다"는 기록이 나온다. 금속활자 인쇄에 적합한 유성먹이 아닌 기존의 수성먹이 금속활자 표면에 잘 달라붙지 않아 인쇄가 어렵다는 의미였다. 고려 인쇄술이 21세기 인터넷, 모바일에 비견되는 '첨단 하이테크'인 이유는 이처럼 활자, 종이, 먹의 3요소가 완벽하게 갖춰졌기 때문이었다. 고려는 이미 지식정보강국이자 세계 최고 문화선진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먹의 종류는 크게 송연묵(松煙墨)과 유연묵(油煙墨)이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신라때부터 우수한 '송연묵'을 생산했다. 송연묵은 소나무의 관솔을 태워 미세한 그을음으로 만든 먹이고, 유연묵은 기름을 태운 그을음을 긁어모아 만든 먹을 가리킨다. 쉽게 말하자면 송연묵은 수성먹이었고, 유연묵은 유성먹이라고 보면 된다. '고려묵'과 '조선의 먹'은 중국에서도 호평을 받을 정도로 품질이 좋았다.
'고려지'(고려종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일반적으로 한지(韓紙)라 부르는 이 종이를 당대 중국의 문인·학자들은 '고려지'라고 불렀다. 박종기(국민대 교수) 강화고려역사재단 대표는 "오늘날 한국의 대중가요·영화·드라마를 선호하는 해외트렌드를 한류라고 하듯이 고려지는 고려판 한류의 원조이자 고려명품"이라고 말했다. 고려지가 중국과 몽골에 널리 유통된 사실은 역사기록에도 잘 나타난다. 1074년(문종28), 1080년(문종34) 고려는 송나라에 대지(大紙) 20부(2000폭)을 각각 보냈다. 1218년(원종3) 고려와 공식관계를 맺은 원나라(몽골)도 1221년(고종8) 10만 장의 종이를 공물로 가져갔다. 2년 전 몽골에선 고려지를 생산한 공방의 유적이 발견됐다. 몽골이 고려지 기술자를 데려갔다는 증거였다. <일본서기>는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중국에서 종이 만드는 법을 배운 뒤 610년(영양왕 21)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가 채색과 종이·먹·연자방아 등의 제작 방법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고려시대 이전부터 종이를 만들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름다운 하얀 빛에 결이 있는 매끄러움, 두터움과 흰빛, 흰빛과 질김 등 중국인들은 고려지의 우수성을 이같이 표현했다. 박종기 이사는 "종이는 중국의 채륜이 2세기 무렵 발명했으나 그로부터 천년이 지나지 않아 고려지가 만들어졌고 이를 송나라는 물론 양자강 유역의 만족(蠻族)에게까지 유통됐다"고 설명했다.
고려지 제작의 핵심은 '도침법'이었다. 도침법은 종이 표면을 두드려 면을 고르게 해 섬유 사이 미세한 구멍을 메우고 광택을 내는 기술이다. 수분을 고르게 먹인 뒤 큰 망치로 두들긴다. 도침법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종이의 질이 결정됐다. 고려지에 닥나무를 사용한 것은 단단하면서 함경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에 비교적 많이 분포된 나무이기 때문이었다.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엔 "(고려의) 종이는 온전히 닥나무만을 써서 만들지 않고 간혹 등나무를 섞어서 만든다. 다듬이질을 하여 모두 매끈하며, 높고 낮은 등급이 몇 개 있다"(권23 토산조)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지를 가리켜 중국인들은 백추지(표면이 희고 단단한 종이)나 경면지(표면이 거울과 같이 맑고 깨끗한 종이), 견지(표면이 솜처럼 부드러운 종이)라고도 했다. 닥나무가 주 재료인 고려지를 우리나라에서 만들기 시작한 때는 통일신라시대 때부터이다. 이에 비해 한나라부터 당나라 이전까지 중국 종이의 80%이상은 마지(麻紙)였다.
현재 고려지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가평의 '장지방'에선 고려지 제작기법으로 한지를 만들고 있다. 이 곳에선 126년째 닥나무를 삶고 빻고 두드리고 해서 종이를 만드는 방식으로 한지를 제작한다. 지난 달 23일 오전 장지방에선 4대째 맥을 이어가는 장성우(49)씨가 한지를 '뜨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중요무형문화재인 장용훈(84) 지장이고, 아들인 그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전수조교다. 맑은 우윳빛깔의 물을 커다란 막대기로 휘휘 저어 크고 네모난 채에 종이를 뜨는 그의 손에서 고려시대 장인의 면모가 묻어나왔다.
/가평=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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