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책과 출판의 문화사] 종교개혁은 어떻게 인쇄술의 자식이 됐나 /전성원




[책과 출판의 문화사]  
종교개혁은 어떻게 인쇄술의 자식이 됐나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을 '인쇄술의 자녀'라고 기록한다. 그 같은 단언을 무리라 할 수 없는 까닭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개인(독자)의 수가 극히 적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인쇄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초기 서적시장은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로 국한돼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류의 대다수는 평생 한가지 언어만을 구사하며 살아가는데, 우리가 흔히 모어(母語)라고 부르는―'지방어(地方語)' 또는 '민족어'―언어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전 크리스트교가 지배하던 중세 시대의 독자들은 소수의 엘리트들로 '라틴어'라는 언어를 통해 국경이나 민족(이 시기는 근대의 민족 개념 생성 이전)을 넘어 기독교인이자 라틴어 사용자라는 공통점을 지닌 보편의 세계에 살았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면죄부 폐지를 주장하는 95개 조항을 공표하고, 마침내 교황권에 도전하기로 결심하면서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시작됐다. 루터 이전에도 종교개혁 시도는 있었지만, 인쇄술 등장 이전까지 로마교황청은 언제나 도전자들을 능가하는 통신망과 매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이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기도 전에 도전자들은 종교재판이나 화형대 위에 서야 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가 교회 문에 붙인 논제는 독일어 번역본으로 인쇄돼 15일 만에 독일의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었다.

루터 이전까지 일개 지방어에 불과했던 독일어였지만, 종교개혁이 촉발된 이후 20년(1520~1540년) 동안 그 이전의 20년(1500~1520년) 보다 3배나 많은 책들이 독일어로 출판됐다. 이처럼 놀라운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루터였다. 이 시기에 독일어로 출판된 책의 3분지 1이 루터의 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는 대중에게 알려진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는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그의 이름이 붙어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은 기꺼이 책을 구입했다. 이처럼 놀라운 현상의 밑바탕엔 매스커뮤니케이션 기술로서 인쇄술이 있었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가 독일어 독자라는 새롭고 광범위한 독자 계층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얻으려는 거대한 전쟁에서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구교는 '라틴어'의 성채를 지키는 방어적 입장이었고,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신교는 지방어를 선택해 대중(민족)에게 호소했다. 종교개혁 사상가들의 저작물들은 당대로선 놀라운 판매부수를 올렸는데, 한 예로 1520년에 발행된 루터의 <독일 국민의 고귀함에 대하여>라는 팸플릿 4000부는 며칠 만에 동이 나버렸다. 종교적 논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마르틴 루터는 이처럼 독일 민족주의를 부추겼고, 대중에게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 독일어를 사용했다. 신구교간에 벌어진 종교 논쟁은 인쇄술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통해 팸플릿 전쟁을 촉발시켰고, 신교와 인쇄술, 그리고 지방어의 연합은 보편적 크리스트교 세계라는 중세의 파국을 몰고 왔다. 새롭게 출현한 신흥 독자들, 상인 계층이자 신교도들은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에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했던 것처럼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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