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세계책의수도 인천]금속활자 숨결로 부처의 가르침 다시 울려퍼지고 … 인천 활자의 시대를 열다 - 3 불교국가 고려와 남명천화상송증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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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2년 개경에서 강화로 수도를 옮긴 고려는 내성, 중성, 외성 등 3중성을 쌓고 몽골의 침입을 대비했다. 몽골과의 항전 속에서도 금속활자의 종주국이었던 고려는 <상정예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와 같은 금속활자본을 펴 냈다. 사진은 궁궐을 보호하는 가장 안쪽의 성인 내성의 서문.
▲ 갑곶돈대에서 본 염하.
'증도가' 금속활자 인쇄본  
강화 천도 때 1부만 남아  
최이가 목판 번각본 보급  
초기 주자인쇄 특징 형용 


염하를 바라보는 최이(최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뜩이나 날카로운 눈매가 칼날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염하 건너 편으로 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말을 탄 몽골군들이 육지를 서성대고 있었다.  
최이는 아침 일찍 '대장도감'에 들어 대장경 판각을 지휘한 뒤 임금이 있는 고려궁으로 가는 중이었다.  

3년 전 시작한 대장경 판각은 상당히 진척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화의 대장도감은 물론,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과 전국의 몇몇 사찰에서 동시에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이는 생각했다.  
'네 놈들은 절대 이 거센 바다를 건너오지 못 할 것이다. 설사 배를 띄운다 해도 염하에 수장당하거나 갯벌에 빠져 목숨을 부지하지 못 할 것이다.' 
전투를 할 때면 몽골군은 말과 한몸처럼 보일 정도로 말을 잘 탔다. 
그러나 물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  

염하는 더구나 물길에 익숙한 뱃사람조차 조심해야 하는 사나운 바다였다. 
강화의 갯벌 또한 몽골군에겐 큰 장애물이었다.  
강화는 육지에 단련된 몽골군에겐 범접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이었던 것이다. 
"백운거사께서 저 놈들을 보고 시를 한 수 지어보시오."

최이가 이규보에게 명했다.  
"오랑캐들이 아무리 완악하다지만 어떻게 이 물을 뛰어 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 치고 시위만 한다오/ 누가 물에 들어가라 말하겠는가/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텐데."<동국이상국집> 

이규보의 즉흥 시에 최이가 껄껄껄 웃더니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푸르륵" 백마가 최이만큼이나 큰 소리를 내며 고개를 바짝 든 채 궁궐을 향해 따각 따각 걷기 시작했다.  

수백 명의 삼별초군이 무신정권 1인자의 뒤를 따랐다. 1239년(고종 26년), 강화의 바닷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1234년 <상정예문>을 인쇄해 나라를 통치하던 '매뉴얼'로 쓰던 최이는 1236년 '팔만대장경' 판각을 시작한다.  
대불사를 통해 전쟁으로 지친 고려인들의 불심을 규합하고, 이를 통해 몽골군을 물리치려는 의도였다.  
강화로 들어올 때 고려왕조는 강안전, 경령전, 건덕진 등 개경에 있던 14개의 궁궐 건물을 강화도에 그대로 지었다.  

궁궐 뒤에 있는 산의 이름까지 '송악산'이라 바꾸어 불렀다. 
그렇지만 고려청자와 금속활자 등 많은 빛나는 발명품들까지 일일이 다 챙겨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상정예문>이었고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이하 증도가) 역시 두고 온 귀한 자료였다.  
당나라의 현각(玄覺·643~713)선사가 지은 <증도가>의 각 구절 끝에 송나라 남명선사(南明禪師) 법천(法泉)이 7자 3구씩 모두 320편을 읊어붙여 증도의 깊은 뜻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힌 책이다.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에서 <증도가>와 같은 책을 인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태조 왕건(877~943·재위918~943)이 10개의 사찰을 세운 이래, 후대의 고려왕들 역시 많은 사찰을 세웠다. 

고려의 사찰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 정치·경제·사회·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처의 가르침이 어두운 세계까지 닿기를 기원하며 등불을 밝히던 '연등회'는 지역마다 행해졌으며, 온 나라가 함께 나라의 평안을 빌던 '팔관회' 역시 대규모 불교행사였다. 

태조 왕건은 '훈요 10조'에서 연등회와 팔관회를 계속 해 나갈 것을 후손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최이가 1239년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인쇄를 명한 것은 불교국가 1인자로서의 의무였던 셈이다. 

"증도가는 선문(禪門)에 매우 긴요한 책이오. 참선하는 이들은 모두 그것에 의해 깊은 이치를 깨닫고 있는 터인데, 그 전래가 끊겨 통행되고 있지 않소. 다행히 이곳(강화도)으로 천도할 때 금속활자로 찍은 <증도가>를 내 가져왔소. 그런데 한부 밖에 없으니 이를 목판으로 번각하여 보급하도록 하시오." 

'번각'(飜刻)은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을 다시 목판으로 새겨 인쇄하는 방식이었다. 

<증도가>는 이렇게 탄생했다.  
인천에서 탄생한 두번째 금속활자의 역사였다.  
<증도가>는 부처의 영원불변한 진리를 깨닫고 체득하는 정수를 기록한 책이다.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의 심성은 본래 불성(佛性)이며, 누구나 참선 수행을 하면 부처의 참된 본체를 체득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문장이 유창하면서도 그윽한 뜻을 지니고 있어 음송하면 음송할수록 부지불식간에 불법의 참뜻을 터득할 수 있어 참선하는 사람들의 책이었다고 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현재 금속활자로 찍은 <증도가>는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다만 번각본을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1984년 '보물 제758호'로 지정됐다. 
이 책은 주자본을 번각으로 다시 새겼으므로 책 전체에 칼자국과 나뭇결이 많이 나타난다. 

그렇지만 글씨가 매우 정교해 본 바탕이던 금속활자본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글줄이 좌우로 들어갔다 나왔다 삐뚤삐뚤하고, 글자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지거나 쏠린 것이 많다.  

또 글줄에서 글자의 아래 획과 위 획이 서로 닿거나 엇물린 것이 없으며, 한 판의 같은 글자에 같은 꼴과 크기가 없지만 글자모양은 비교적 정연한 편이다. 

전형적 금속활자본의 모습이다. <증도가>는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기 전에 금속활자로 만든 책을 최이가 1239년 강화도에서 번각본으로 인쇄한 책으로, 고려 초기 주자인쇄의 특징을 알 수 있는 귀한 사료로 평가된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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