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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출판의 문화사'- 실크로드와 페이퍼로드
혜초와 고선지는 만났을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한국문학사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여행기이자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문헌 중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혜초는 통일신라시대 최치원(857∼?)보다 110년쯤 앞선 719년 16세의 나이로 유학길에 올랐던 신라의 승려였다. 중국 광저우에서 남인도 출신의 승려 금강지(金剛智)와 제자 불공(不空)에게 밀교를 전수받은 혜초는 당 현종 시대(723년경), 4년여에 걸쳐 인도를 비롯해 카슈미르·아프가니스탄·중앙아시아 일대를 답사하고 돌아왔다.
당시는 동아시아 일대가 오랜 전란을 마치고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요동 일대에서 당을 위협하던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와 발해, 일본이 모두 중국의 유교식 율령체제를 받아들였다. 동아시아 각국이 불교를 사회통합 이념으로 활용하면서 문화적 동질성이 크게 강화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활발한 교역과 문물 교류가 전개되었다. 사회가 안정되자 사회적 문제를 넘어 인간 자신의 문제를 탐구하는 구도의 길을 추구하게 되었고, 혜초의 뒤를 이어 일본의 엔닌 등이 구법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과연 한 개인이 불경을 구하고자 하는 신심만으로 4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그토록 머나먼 순례의 길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혜초의 순례가 본질적으로 구법여행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나 동천축에서 중천축,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에 이르는 혜초의 기록들은 불교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언어와 의식주 같은 일상사와 지리, 기후 등 자연환경 심지어 각 지역의 임금들이 소유하고 있는 전투 코끼리의 수와 병력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또 아랍 제국이 인도 방면에 어느 정도 세력을 펼치고 있는가 하는 등 국제정세까지 두루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중국으로 귀환한 뒤 스승 금강지의 장례를 당 현종의 도움으로 성대하게 치르고, 이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보낸 기록이 있는 점 등으로 비추어 당 조정과 혜초의 밀접한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은 건국 세력부터 서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실크로드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수양제를 격파하고, 당 태종까지 물리친 고구려의 존재는 당의 서역 진출에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등 뒤에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고구려가 존재하는 한 서역 진출에 나설 수 없었던 것이다. 흔히 실크로드라고 부르지만, 문명 교류의 가장 중요한 길목은 톈산산맥에서 발원한 시르다리아 강과 파미르 고원에서 발원한 아무다리아 강 사이에 위치한 트란스옥시아나 였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남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대발견의 시대 이전까지 동서양이 만나는 문명충돌의 길목이었으며 트란스옥시아나의 패자(覇者)가 그 시대 세계문명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었다. 트란스옥시아나로의 진출을 위해 혜초가 다녀왔던 길을 되밟아 서역 정벌에 나섰던 사람이 바로 '힌두쿠시의 제왕'이라 불렸던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수 고선지였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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