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6일 목요일

‘지방정부 20년’ 시민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시사in 천관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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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지방정부 탄생 20주년이 되는 해다. 지방자치제는 박정희 정권 시절 중단되었다가, 민주화 이후인 1991년 지방의회 의원 선거를 치르며 재개되었다. 지방정부의 단체장까지 선거로 뽑는 완전한 지방선거는 1995년부터다. 이를 제1기 지방선거라고 부른다. 2014년에 선출된 지방정부 수장들은 제6기 단체장이다.

지방정부 20년 역사는 동시에 ‘지방정부 무용론의 역사’이기도 하다. 여론은 끊임없이 지방정부의 존재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옹호자들의 대응 논리는 효과가 크다고 보기 힘들었다. 옹호 논리의 핵심인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치는 대중이 체감하기보다는 당위론에 머물렀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윤무영</font></div> 
ⓒ시사IN 신선영
ⓒ시사IN 윤무영

<시사IN>은 지방정부 20주년을 맞아 그동안 비교적 조명되지 않았던 가치에 주목했다. 지방정부는 ‘혁신의 실험실’이 될 수 있다. 몸집이 무겁고 실패의 부담이 큰 중앙정부와 달리, 지방정부에서는 다양한 혁신을 비교적 부담 없이 실험해볼 수 있다. 지방정부는 그 수가 많다. 6기 지방정부 기준으로, 지방정부는 모두 244곳이다. 광역단체 17곳과 기초단체 227곳이 있다.

한 지방정부의 혁신 실험이 실패하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지 않고 조용히 사라진다. 하지만 성공한 실험은 지방정부 시스템 특유의 확산 메커니즘에 올라탄다. 실패는 지역 단위에서 걸러지는 반면 성공은 전국으로 퍼져나간다. 지방정부 체제에서 특히 혁신 실험의 ‘수익률’이 매우 높은 것은 이런 비대칭 구조 덕분이다.

한 지방정부에서 일어난 혁신이 널리 퍼져 나가는 장면이야말로 지방정부 체제가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나와 한참 떨어진 어느 기초단체에서 시도한 작은 실험이, 지방정부 특유의 확산 메커니즘을 타고 흘러들어와 결국 나의 삶을 바꿀 때, 우리는 지방정부가 주는 진짜 효용을 누리게 된다.

 혁신은 선거를 통해 확산된다 

전남 함평군은 광주광역시와 서해 사이에 있다. 인구가 4만명이 채 안 되고,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30%를 넘고, 주민의 3분의 2가 농·어업에 종사한다. 어느 모로 보나 특별할 것 없는 이 시골 지방정부의 작은 실험이 겨우 10여 년 만에 전국 대다수 출산 가정에 영향을 주는 정책으로 진화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출산장려금은 전남 함평군에서 시작했다. 2007년 당시 충남 서천군수가 출산장려금을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출산장려금은 전남 함평군에서 시작했다. 2007년 당시 충남 서천군수가 출산장려금을 전달하고 있다.

인구 유출과 고령화에 시달리던 함평군은 2002년에 전국 최초로 출산장려금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해를 거듭할수록 이웃 지방정부로 퍼져 나갔다. 2004년 8곳을 시작으로, 2005년 29곳, 2006년 30곳, 2007년 43곳, 2008년 48곳이 출산장려금을 도입했다(이정철·허만형의 논문 ‘출산장려금 제도의 정책 확산 연구’, 2012). 이제 출산장려금을 주는 기초단체는 200곳이 넘는다.

혁신 확산의 동력은 선거 경쟁이다. 4년마다 선거를 치르는 지방정부의 수장은 이웃 지방정부의 혁신을 복제해 도입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선거는 수장이 유권자에게 반응하는 강도를 극적으로 높인다. 지방자치제 도입 이전에 임명직 수장은 주민보다는 인사권자인 내무부 장관의 요구에 최우선으로 반응했다. 선거 경쟁이 없으면 혁신보다는 ‘안전운행’이 미덕이 된다.

옆 동네 지방정부가 출산장려금을 도입했을 때, 지역 유권자의 비교와 원성을 흘려 넘길 수 있는 지방정부 수장은 흔치 않다. 유권자의 생활권이 가깝거나 아예 겹친다면 직접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에, 선거 경쟁에 따른 모방 효과는 인접 지역일수록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2010년 이후 복지 논쟁의 잣대가 되다시피 한 학교 무상급식 정책도 기초단위 지방정부의 실험에서 출발했다. 2009년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김상곤 교육감이 선출되기 전부터, 경기도 과천시·성남시·군포시는 학년이나 학교 규모에 따라 무상급식 실험을 시도하고 있었다. 셋 다 당시 한나라당 소속 단체장이 있던 시절이다. 경기도 교육청이 이를 포착해 실험을 확장하며 판을 깔았다. 2010년 지방선거는 무상급식이라는 아이디어를 그야말로 폭발시켰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경기도 교육청 제공</font></div>무상급식도 지방정부의 실험에서 출발했다. 2010년 당시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배식 중이다. 
ⓒ경기도 교육청 제공
무상급식도 지방정부의 실험에서 출발했다. 2010년 당시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배식 중이다.

 지방정부의 ‘성공한 실험’은 어떻게 퍼지나

2014년 2월, 송파구에 사는 세 모녀가 전 재산인 현금 70만원을 월세와 공과금으로 놓아둔 채 번개탄을 피워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의 복지 전달체계에 심각한 구멍이 뚫려 있다는 신호로 여론에 충격을 주었다. 

복지 전달체계가 지나치게 관대하면 무임승차가 발생한다. 반대로 지나치게 엄격하면 송파 세 모녀와 같은 복지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 수요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최대한 주민과 가까운 단위에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주민과 가장 가까운 행정의 최소 단위는 동 주민센터다.

서울 노원구(구청장 김성환)와 서대문구(구청장 문석진) 등은 이에 착안해서 동 주민센터를 ‘복지 허브’로 전환하는 실험에 착수했다. 주민센터의 일반 행정 업무를 대폭 줄였다. 서류 발급 등 행정 처리를 전산화·자동화하고, 청소·주차단속·민방위 등 여러 업무를 구청으로 넘겼다. 이렇게 확보한 여력을 복지 업무로 집중시켰다.
복지 상담과 복지 수혜 사례가 모두 늘었다. 서대문구는 2013년 88일에 걸쳐 관내의 5만5510가구를 조사해 1565가구를 새로 발굴해내고, 이 중 833가구가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뚫었다. 기존 복지 관리에도 벅찬 옛 시스템으로는 이와 같은 대규모 신규 발굴사업은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

주민센터를 복지 전달체계의 중심에 놓는 혁신은 상급 정부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형태로 확산되었다. 보건복지부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의뢰해 <복지 전달체계 개편 우수사례 매뉴얼>을 만들었는데, 이 보고서는 서대문구 사례를 주요 연구 대상 중 하나로 다루었다.

지난 2월 서울시는 행정부시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동 마을복지센터 추진본부’를 출범시켰다. 서울시내 423개 동 주민센터 모두를 2018년까지 복지센터로 전환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계획대로 추진된다면 서울시의 복지 전달체계는 주민센터 중심으로 재편이 완료된다. 성동·성북·도봉·금천구가 1단계 사업부터 전면 시행하기로 했고, 9개 기초단체는 시범 시행에 참여한다.

서울시가 발표한 복지센터 전환 계획안을 보면 노원구와 서대문구 등 선도적인 지방정부들이 거쳐온 혁신 실험 과정이 대부분 녹아 있다. 기초 단위 지방정부의 실험이 활발하고 다양할수록, 중앙정부나 광역 단위 지방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혁신 정책의 옵션’이 늘어난다.

 정당 정책의 실험실이 된 지방정부

새정치민주연합의 2014년 지방선거 공약 중에 지방정부 관련 10대 공약이 있다. 생활임금제, 지자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보호자가 필요 없는 환자안심병원 등이 핵심 공약으로 제시되었다. 이들 공약은 중앙당의 기획력으로 등장한 게 아니다. 5기 지방정부에서 했던 여러 실험 가운데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는 평을 받은 혁신이 고스란히 중앙당의 공약으로 자리 잡았다. 공공부문 정규직화는 서울 노원구 등이, 환자안심병원은 서울시가 실험했다.

최저임금만으로는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문제의식으로, 우선 공공기관 종사자의 임금부터 적정 수준으로 책정해 지급하는 정책이 생활임금제다. 각종 사업을 민간에 발주할 때도 생활임금 기준을 지키는 민간기업에 가산점을 주어 정책 확산을 유도한다. 노동자 평균임금의 50%를 기준선으로, 여기에 권역별 물가와 생활비 등을 고려해 생활임금을 산정한다. 서울 성북구(구청장 김영배)와 노원구(구청장 김성환) 등이 참여연대의 제안을 받아 2013년부터 이 실험을 시도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경제 정책의 핵심 어젠다로 내놓은 ‘소득 주도 성장론’의 콘텐츠 중 하나로 생활임금제를 내세웠다. 문 대표는 3월10일 남경필 경기도지사(새누리당)와 만난 자리에서 “경기도가 도입한 생활임금제도와 소득 주도 성장론이 맥을 같이한다”라고 말했다.

 GIS를 활용한 행정? 공부하니 달라지네

‘목민관클럽’은 시민단체인 희망제작소와 기초단체장들이 주축이 되어 2010년에 만든 지방자치 연구모임이다. 지방정부 혁신 사례를 공유하고, 두 달에 한 번꼴로 포럼을 개최해 공부한다. 2010년 9월에 창립해 올해로 5년째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기초단체장 55명과 광역단체장 4명이 회원이다. 이 모델은 자발성과 직접 접촉이라는 장점 때문에, 잘만 작동한다면 빠르고 실질적인 확산 메커니즘이 된다(우리가 뭐 했냐고? 할머니는 알던데! 참조).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기초단체장이 주축인 목민관클럽은 두 달에 한 번꼴로 포럼을 개최해 혁신 사례를 공유한다. 
ⓒ연합뉴스
기초단체장이 주축인 목민관클럽은 두 달에 한 번꼴로 포럼을 개최해 혁신 사례를 공유한다.

목민관클럽은 창립 취지부터 혁신의 확산을 목표로 내걸었다. 창립취지문의 한 대목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목민관클럽은 각 지역의 혁신적인 정책 경험을 공유하고 상호 학습할 수 있는 협의체다.”

2014년에 윤석인 희망제작소 당시 소장은 5기 지방정부 혁신 사례 77개를 소개하는 <지방자치가 우리 삶을 바꾼다>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의 ‘슈퍼스타’는 광주 광산구(구청장 민형배)다. 공익활동 지원센터, 참여형 복지공동체, 한국형 사회경제 모델, 비정규직 정규직화, 빅데이터 행정 등 5개 혁신 사례에 이름을 올렸다. 

가장 눈에 띄는 혁신은 빅데이터 행정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공공데이터 278종을 한데 모아 GIS(지리정보 시스템)로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데이터가 한데 모이자 주민의 특성이 드러났다. 동별로 가족 구성, 직업 구성, 자녀 연령대가 다른 패턴을 보였다. 한데 모인 데이터는 여러 혁신 실험을 촉진하는 ‘기초 혁신’이 되었다. GIS를 기반으로 버스 노선을 조정하고, 맞춤형 범죄 대책을 세우고, 불법주차 해소 방안을 모색했다. GIS 도입을 주도한 최용선 당시 광산구 정책팀장(현 국회 권은희 의원실 보좌관)은 목민관클럽 정기포럼을 비롯해 각급 지방정부가 앞다투어 찾는 인기 강사가 되었다.

 ‘나쁜 실험’의 유혹에 빠지기도 쉽군


전라남도가 2006년 영암에 유치한 자동차 경주대회 F1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한국에서 열리지 않는다. 전남은 2년 연속으로 대회 개최를 거르기로 했고 대회 조직위원회 조기 해산도 검토한다. 경기장 등 인프라 구축비용을 제외하고, 순수 운영비 적자만 1900억원이 쌓였다. 대회 유치 당시부터 사업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박준영 당시 전남지사는 유치를 강행했다.

국제 스포츠 대회는 지역민의 자긍심을 높여 지방정부 수장의 지지를 탄탄하게 만든다. 지역에 돈이 풀리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경기 호전 효과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지방정부는 물론 중앙정부 재정에도 커다란 부담을 안긴다. 문제는 이 비대칭에서 나온다. 장기적인 손실이 드러날 시점에는, 단기 혜택을 누린 수장은 이미 임기가 끝난 후다. 이러면 수장은 장기 손실을 지우더라도 단기 이득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전남 영암군이 유치한 F1 대회(위)는 운영비 적자만 1900억원에 이르는 등 재정에 큰 부담을 안겼다. 
ⓒ연합뉴스
전남 영암군이 유치한 F1 대회(위)는 운영비 적자만 1900억원에 이르는 등 재정에 큰 부담을 안겼다.

지방정부는 혁신적 실험을 확산시키는 시스템이다. 문제는 F1 유치와 같은 ‘나쁜 실험’도 확산되기 쉽다는 점이다. 국제 스포츠 대회의 폐해는 인천에서 반복되었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의 강원도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벌써부터 높다.

 2010년은 전환일까, 우연일까 


고려대 행정학과 김태일 교수는 지방정부 재정을 다룬 책 <재정은 어떻게 내 삶을 바꾸는가>에서 지방정부 시스템의 장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주민 선호에 민감하고(민감성) 지방정부 간에 경쟁이 존재하기 때문에(경쟁) 단체장은 참신한 정책을 고민하게 된다(혁신). 정책의 파급 범위가 작으니 다양한 정책을 시도할 수 있고(다양성), 성공한 정책은 다른 지방정부가 배워갈 수 있다(확산).” 반면에 지방정부 시스템의 단점으로는 단체장이 주민 복지와 관련이 적은 사익을 추구하는 문제, 지방정부 이익을 추구하다 국가 전체에 부담을 지우는 문제 등을 들었다. ‘나쁜 실험’이다.

지방정부 수장은 ‘좋은 실험’과 ‘나쁜 실험’ 양쪽으로부터 유혹을 받는다. 두 힘 중 어느 쪽이 강한지가 지방정부 시스템의 성패를 좌우하는 변수다. 선거는 4년에 한 번인데, ‘좋은 실험’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경향도 있다. 장기적 손실을 감수하고 F1을 유치하거나 경전철을 까는 선택이 단체장으로서는 치적 홍보 효과가 크다. 이 때문에 지방정부 시스템이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효과보다 재정 낭비를 촉진하는 역효과가 더 크다고 보는 관찰자도 제법 있다.

2010년 선출된 5기 지방정부는 몇 가지 면에서 전환점이었다. 첫째, 학교 급식으로 대표되는 복지 문제가 핵심 이슈로 등장한 첫 번째 선거다. 둘째,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지방정부 재정이 극도로 취약해졌다. 유권자의 요구와 지방정부의 주머니 사정이 달라지면서, 과시형 사업보다 생활밀착형 혁신으로 성과를 내보겠다는 지방정부 수장들이 늘어났다. 이들이 2014년 6기 선거에서 대거 생존하면서, 과시형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선거 생존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기대도 자라고 있다(포클레인 치우고 ‘맥가이버’ 되다 참조).

큰 흐름이 바뀐 것일까. 아직은 알 수 없다. 어쩌면 몇 가지 행운이 겹친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지방정부의 혁신과 확산 모델이 제대로 작동해야만 국가 전체가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만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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