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데는 머리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22일 있었던 '민주부산 공간의 재발견' 시민답사 중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의 한 길목에서 초등학생부터 교사까지 40명이 답사 길잡이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백발의 할머니가 혼자 지키고 있는 작은 구멍가게,1978년부터 1년 반 동안 책을 매개로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저수지 역할을 했던 양서협동조합의 현장이었다.
중부교회-양서협동조합 연계활동
보수동 책방골목은 마주오는 사람에게 어깨를 비켜주어야 하는 골목의 풍경을 수십년째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얼마전 '책은 살아야 한다'는 축제가 성황리에 끝난 이 곳. 이전에는 인터넷 서점의 출현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고 더 이전에는 새학기만 되면 참고서를 사러온 중고등학생들로 북적거리던 골목. 유신체제 말기 숨막힐 듯한 억압과 감시의 공기 속에서 청년들은 뜻맞는 사람들과 사회과학 서적을 찾아 이 골목으로 찾아들었다.
책방골목 중간 높은 계단 위로 까치발을 해야 보이는 십자가 건물이 중부교회,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버팀목이었던 고 최성묵 목사가 계셨던 곳이다.
중부교회는 유신체제 말기의 숨막힐 듯한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종교를 매개로 청년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다. 중부교회 대학생부 전도사로 있던 김형기(53·현 경주팔복교회 담임목사)씨는 1977년 이 곳에서 교회를 드나들던 청년운동가들과 함께 양서협동조합을 구상했다.
합법적인 협동조합의 형식을 빌려 책을 매개로 시민운동과 문화운동을 결합하려던 김씨의 구상은 1978년 4월 107명의 조합원으로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을 출범시켰다.
조합원들은 매달 1천원 이상 출자를 하고 '전환시대의 논리''뜻으로 본 한국역사''씨알의 소리'등을 돌려 읽고 토론했고 조합원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았다. 중부교회 계단을 내려오면 바로 보이는 튀김가게가 첫번째 사무실이었다.
책방 골목 내 2층 건물을 빌린 뒤에는 1층은 직영서점인 협동서점을 꾸리고 2층에서는 농촌문제연구반,연극반 등 소모임을 운영했다. 부마항쟁의 배후로 지목돼 1979년 말 신군부에 의해 해산될 당시 양협의 조합원은 600여명에 이르렀다. 대학생 교사 시민과 가정주부 고등학생까지 총망라됐다.
민주공원 차성환 관장은 "양협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창의적인 운동 모델을 통해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면서 "억압적인 시대에 운동에 공포감을 가진 대중과 이들로부터 분리된 운동가들을 한 데 모으고 교육하는 마당이었던 셈"이라고 설명했다.
좋은 책으로 세상을 바꾸려던 양서협동조합의 정신은 마산 대구 울산 서울 수원 광주 등으로 확산됐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는 도서원 운동과 대학가 사회과학서점 등으로 이어진다.
도서원-사회과학서점 활성화
부전시장 입구 상가건물 틈에 숨어있던 아롬도서원은 1988년 부산에서 처음 만들어진 도서원이었다. 회원 대상과 도서 성격을 세분화한 도서대여점 형태의 도서원은 사회과학 서적을 돌려읽고 두세명씩 무릎을 맞대고 토론하던 소모임 성격이 강했다.
이후 현재 부산진구 가야우체국 맞은편 일꾼도서원에서는 당감동 일대 태화고무 등 신발공장과 금속부품 공장의 노동자들 10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지역마다 햇살도서원 광장도서원 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도서원이 생겨났다.
이들 노동관련 도서원은 노동조합운동 경험이 일천하던 시기에 노동자들의 역량을 키우고 노동운동을 외곽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서면 옛 은아극장 옆 4층 건물에 세들어있던 늘푸른도서원은 고교생들의 터전이었다. 560여명의 회원이 가입비 3천원,한 달 회비 2천원을 내고 '스비까(스스로를 비둘기라고 믿는 까치에게)''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등을 빌려보거나 기타반 등에 참여했다.
이후 노동도서원은 노동운동의 주요 인력들을 배출했고 늘푸른도서원은 1997년부터 지역 주부들이 환경 참교육 의정참여 등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신모라 창조어머니모임 같은 지역공동체운동으로 맥을 이어가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학가의 사회과학서점도 전성기를 맞았다. 한때 부산대 앞에는 6~7개의 사회과학서점이 자리를 다툴 정도였다. 학생들은 대개 학생운동가 출신이었던 가게 주인을 '형''누나'삼아 서점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에서 보자"같은 약속 쪽지를 붙이고 확인했던 서점 앞 게시판도 사회과학서점을 학생들의 사랑방으로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조잡하게 제본됐던 5·18 광주항쟁의 기록을 몰래 돌려보고 신입생 시절 강의실보다 사회과학서점을 더 자주 들락거렸던 시절은 그러나 1990년대 중반을 지나 '신세대'가 뜨고 지식 유통 구조가 변하면서 아득한 '옛 이야기'가 됐다. 1990년대 후반 부산대 앞 사회과학서점 '나사(나라사랑) 살리기 운동'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대학가의 사회과학서점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특별취재팀=임성원기자(문화부) 이현우·최혜규기자(사회부) hooree@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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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원=차성환(민주공원 관장) 김종세(민주공원 경영기획팀장) 김영주(민주공원 교육기획팀과장) 김선미(부산대 강사) 이일래(부산대 강사)
부산일보·민주공원 광복60돌 공동기획
출처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05102600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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