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5일 일요일

기독청년학생운동에서의 새문안교회의 역할/ 서경석 목사, 2005년 10월 5일

기독청년학생운동에서의 새문안교회의 역할/  서경석 목사(서울조선족교회) 

지금도 나는 새문안대학생회만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그만큼 당시의 새문안대학생회는 대학생회 회원들에게는 삶 전체였고 기독교신앙 전부였다. 그곳에서 기독교를 알게 되었고 나라와 민족의 문제를 깨달았고 또 인생의 목표를 찾았다. 그리하여 새문안대학생회는 지나간 70-80년대에 서울제일교회(박형규목사 시무)대학생회와 함께 당시 진보적인 기독학생 운동의 진원지였다. 66년에서 88년까지 23년간의 새문안대학생회 역사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 간 회원이 아마 백명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지난 7-80년대의 한국교회의 인권운동이 120년의 기독교역사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였다면 그 운동의 한 축이 새문안대학생회였다. 당시 기장교단이 한국교회의 인권운동을 주도했지만 새문안대학생회는 예장 통합임에도 불구하고 기장 이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새문안교회 대학생회는 66년 홍성현목사님이 강도사로 새문안교회 부교역자로 오셔서 대학생모임을 처음 시작한 것이 그 효시다. 그리고 67년에 처음 대학생회가 창립되었다. 초대회장은 이일영장로이고, 부회장은 서원석 장로, 서기는 김용담 장로, 회계는 이숭리 권사, 그리고 나는 총무였다. 그러나 당시 사회주의에 심취했었던 나는 중도에 총무직을 사표를 내고 교회출석을 중단했다. 그런데 68년에 홍 목사님이 “신앙지도는 내가 할 터이니 네가 회장을 맡아 대학생활동을 책임 맡았으면 좋겠다고 하시어서 마지못해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할 수는 없었다. 회장직을 맡은지 몇 달만에 26명의 대학생회 회원 중 3명을 제외한 나머지 회원을 전부 내 편으로 만들어버렸다. 홍 목사님에 이어 대학생회를 지도하셨던 김종렬목사(당시 강도사)님께서 이러한 상황을 보고 충격을 느끼셨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지만 대학생회는 “우리의 현재의 상태를 솔직히 인정하고 이 자리에서부터 정직하게 하나님을 탐구해가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나아갔다. 69년 내 다음에 회장이 되신 분은 형님되시는 서원석 장로시다. 형님은 회장으로서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 원당농촌봉사활동을 통해 대학생회를 크게 키우셨다. 그즈음 나는 대학생회 1학년 학생들의 세미나를 주도하면서 대학생회를 이념형 의식화집단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고 70년 YWCA 소사수양관에서 가진 대학생회 하기수련회는 강사로 오신 은준관목사님이 감탄을 할 정도로 대학생회의 방향과 내용에 있어서 선진적인 모습을 과시할 수 있었다. 70년 가을, 전태일열사의 분신이 있고 이를 항의하는 학생운동이 마무리 될 무렵 새문안대학생회는 주일예배 후 교육관에서 <참회와 호소의 금식기도회>를 개최했다. 이 기도회를 주동했던 나는 졸업까지 포기할 각오로 임했는데 당시 지도목사님이셨던 김종렬목사님이 이를 피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격려의 말씀과 기도를 해주셨다. 그 당시 회원이 120명이었는데 이중 80명이 농성에 참석했고 그중 40명이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강신명목사님께서 강단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고 계신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강 목사님의 기도와 간절하신 설득에 못이겨 우리는 점심에 농성을 풀었다. 그리고 교회의 노력으로 조사는 받았지만 구속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 전태일사건 기도회는 그후 70년대 진보적인 한국기독학생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평가되었다. 이후 새문안교회 대학생들은 KSCF를 중심으로 하는 진보적 기독학생 운동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다음해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운동도 새문안대학생회가 주도를 했고 대학생회 사무실은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 사무실이 되어 수천명의 젊은이들을 공명선거 참관인으로 전국의 투표소에 파견하는 일을 수행해 냈다. 그리고 71년 6월. 나는 군대를 갔다. 


나보다는 후배가 기술하는 것이 더 낫겠지만 73년 새문안교회 언더우드학술강좌가 끝난 후의 횃불시위도 대학생회로서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그전에 대학생회헌신예배 때 이근복(목사) 대학생회 회장이 광고시간에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낭독하는 바람에 대학생회가 기능정지되었다. 그 후 대학생들은 반성을 하고 교회 안에서 시위하는 것보다 세상 속으로 나가는 것이 더 낫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대학생회 회원 40명은 결단기도회를 갖고 언더우드학술강좌가 끝난 후 숨겨온 횃불에 불을 당겨 광화문을 향해 횃불시위를 했다. 광화문네거리에 다 도착해서야 닭장차가 왔고 전원이 앞을 다투어 닭장차에 올라탔다. 그렇지만 이사건도 교회의 노력으로 구속자가 생기지 않았다. 


첫 번 구속자들은 74년 민청학련사건 때문에 발생했는데 이로 인해 서경석목사, 서창석집사, 신대균목사, 김형기목사, 권진관목사, 이원희목사 이렇게 여섯이 감옥을 갔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감옥가는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상황이 이러하니 새문안대학생회는 당연히 당회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교회에서 정부에 저항하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대학생회는 기능정지를 당해야 했다. 그렇지만 대학생회는 계속 이어져 갔고 한동안 지하 대학생회로 존재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자기 대에 와서 새문안대학생회 전통이 끊겨서는 안 된다는 결연한 각오를 가지고 필사적으로 전통을 이어갔다. 그런가 하면 당회에도 대학생회를 폐쇄하는 것은 교회가 군사독재정권과의 대결에서 지는 것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이 점에서는 강신명 목사님이나 김동익 목사님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서경조목사님의 증손자라는 점도 보호막이 되었지만 목사님과 당회원들의 역사의식이 아니었다면 그 엄혹한 군사독재시절에 대학생회는 문을 닫고 말았을 것이다.  


70년대 후반이 되면서 나는 청년회원이 되었고 또 몇 년 후에는 고등부 반사가 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새문안교회 내의 운동권세력은 대학부, 청년부, 그리고 고등부까지 확대되었다. 젊은이들은 교회가 갱신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식있는 장로님이 선출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장로선출에 젊은이들이 몰표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조직표가 130표 정도가 되었고 장로선출은 저녁예배에서 했기 때문에 그 표만으로도 누구를 당선시킬 수는 없어도 누구를 떨어뜨릴 수는 있었다. 우리는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장로선출에 개입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장로가 되신 분들은 다시 대학생회의 탄압에 앞장섰다. 


82년1월에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내가 미국으로 떠난 이후 진보적인 기독학생운동은 아이덴티티논쟁에 휘말리면서 분열했다. 새문안교회 출신들은 크리스챤 아이덴티티를 강조했고 기장제일교회 출신들은 사회과학이념을 강조했다. 새문안교회의 분위기가 더 신앙적이었던 탓도 있었고 당시 새문안대학생회를 지도한 김용복 박사가 신앙에 입각한 사회운동을 강조한 영향도 커서 새문안교회 출신들은 기독학생운동은 신앙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그러나 그 후의 기독학생운동은 불행히도 이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민주화 이후에는 몰락의 운명을 겪어야 했다.   


88년1월, 나는 목사가 되어 귀국했다. 귀국할 즈음 대학생회는 폐쇄의 위기에 처해 있었고 운동권은 교회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그렇지만 대학생회가 교회로부터 탄압을 받는 것을 보면서 나는 거꾸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조직화된 힘으로 교회갱신을 하겠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교회갱신은 그렇게 세상적인 방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갱신은 우리 같은 '운동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젊은 시절에 이 점을 깨닫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그 댓가를 지불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89년 1월 나는 사회주의혁명을 지지하지 않는 개량주의자라는 이유로 진보적인 기독교운동권에서 축출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새문안 대학생회 출신들은 둘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그 후 새문안대학생회 출신들은 새로운 시민운동인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만드는 일에 나섬으로써 새로운 시민운동의 시대를 열었다. 뒤에서 도와준 김용담 판사까지 포함해서 서경석, 윤경로, 서원석, 이형모, 이숭리, 유재현, 신대균, 유종성, 장신규, 신철영, 김석준, 권용우 등 경실련 운동의 주역들은 다 새문안대학생회와 청년회 출신들이었다.  


지금 새문안대학생회 출신들은 사회각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김석준, 유승희 등 국회의원들도 있고 목사도 20명은 되는 것 같다. 예장(통합) 총회본부에서도 새문안출신이 핵심요직에서 일한다. 새문안교회가 이 모두를 다시 불러 모으고 관계를 다시 만들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자 이제는 정리를 하자. 지난 7,80년대 독재시대에 새문안대학생회가 신앙적으로, 그리고 이념적으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이 운동을 긍정적으로 기술하는 이유는 한국교회가 군사독재에 저항한 것은 너무도 옳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성교회가 투쟁할 수 없을 때 대학생, 청년들이 대신해서 투쟁의 대열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성교회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보호하는 일을 충실하게 감당함으로서 시대적 사명을 다했다. 


88년, 대학생회가 폐쇄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대학생회가 복음주의의 입장에서 다시 출발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지난날의 운동권 대학생회는 87년 민주화 이후에는 달라져야 하는 것이 역사의 필연이었으리라. 왜 이 때 운동권 대학생회를 폐쇄했는가하는 토론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보다는 대학생회의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군사독재가 존속되는 한 대학생회는 어떤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존속되어야 한다는 당회원들의 역사의식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66년부터 88년까지의 긴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역사는 단순히 새문안교회 역사에만 속하지 않는다. 이 역사는 한국 기독학생운동사의 일부이자 한국교회사의 일부이고 한국 민주화운동사의 소중한 일부다. 이 역사에 대한 발굴, 그리고 객관적인 평가는 새문안교회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사와 한국역사의 소중한 자료로 남겨져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새문안교회 젊은이들이 반드시 되돌아보아야 하는 역사다. 지금의 새문안교회 젊은이들이 옛날 박정희, 전두환 독재시대에 새문안대학생들이 무슨 일을 했는가를 파악해 보는 것은 새문안의 참모습을 찾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에도 귀중한 시사점이 된다. 최소한 오늘의 젊은이들이 자기들의 부모시대보다 얼마나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진지하게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출처 https://goo.gl/q5By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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