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5일 일요일

국제신문 기획시리즈- 기억하라 그날의 함성〈 3 〉 마산으로 번진 시위물결

3·15 기념탑 집결 "가자 시내로"

"부산 학우 피흘리고 있다" 경남대서 불길

밤되자 퇴근길 시민들도 가세 격렬한 시위

최근 들어 기념행사 시들 '잊힌 항쟁'으로


1979년 10월 17일 경남대. 부산의 시위 소식이 전해진 이날, 경남대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미 일부 이념서클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종합대학 승격 등 학내 문제를 내세워 22일 대규모 시위를 준비하던 터라, 부산 시위는 장작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고 있었다.

이날 오후 7시께 경남대 도서관에서는 난데없는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한 학생이 술에 취해 들어와 혼자서 '유신선포 7주년 기념식'을 벌인 것. 이 조그만 소동은 교내 전체로 퍼져나갔다. 민주화에 대한 학생들의 열망은 폭발 일보 직전의 뇌관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들불처럼 일어난 학생시위

18일 오전 경남대 도서관 앞 나무와 게시판에는 격문이 하나 나붙었다. '청년학도여 일어나라. 거리마다 우리들의 맑은 피를 뿌리자!'. 거의 동시에 교문 앞에서는 부산항쟁 소식이 담긴 신문이 뿌려졌다.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학교측은 아예 이날 오후 휴교령을 내렸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군수사 당국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 정성기(경남대 경제통상학부·당시 경제학과 3년) 교수는 "YH사태와 김영삼 야당총재의 제명 등을 보면서 더 이상 침묵하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3·15 이후 처음으로 22일에 교내·가두시위 계획를 잡았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해 우리도 당황했다"고 회고했다.

학생들이 모여들자 시위계획을 함께 짰던 정인권(당시 국제개발 3년)이 열변을 토했다. "지금 부산에서는 우리의 학우들이 유신독재에 항거, 피를 흘리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자유 진리에 대한 이상이 높다해도 행동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나가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왔고 삽시간에 1000여명의 학생들이 시위대열을 형성했다.

학생들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가두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경찰 저지선을 뚫을 수 없자 오후 5시 3·15의거 기념탑 앞에서 집결하기로 했다.

당시 창원공단 노동자로 시위에 가담했던 박영주(45·프리랜서 작가)씨는 "그때는 일반시민이라고 해도 말로 표현만 못했을 뿐 독재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며 "학생들의 시위소식을 듣고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3·15의거 기념탑으로 모였다"고 술회했다.

오후 5시. 전경들이 지키고 있던 3·15의거 기념탑 주변으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몇십명씩 무리를 지은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학원자유! 유신철폐!"를 구령삼아 스크럼을 짠 채 시위를 시작했다. 제일여고를 지날 때 여고생들은 "오빠 힘내세요"라며 박수를 쳤다.

경찰의 제지로 대오가 무너지고 다시 뭉쳐지길 반복하며 학생들은 수출자유지역까지 진출했다가 다시 3·15 기념탑으로 돌아와 연좌농성을 벌였다. 

#암흑천지로 바뀐 도심

오후 7시. 날이 어두워지자 학생들은 "시내로 가자"는 외침과 함께 불종거리 쪽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 도로변 벽돌담을 허문 뒤 벽돌 조각을 집어 경찰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평화적이던 시위가 폭력적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남성동파출소 주변에서 경찰이 타고온 마산시청 버스 2대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모두 깨버렸다. 이에 맞서 경찰도 최루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후퇴한 학생 시위대는 불종거리로 다시 밀렸다가 웅성거리고 있던 퇴근길 시민들의 시위 참여로 큰힘을 얻었다.

창동과 부림시장, 오동동, 불종거리 등 시내를 누비며 경찰과 대치하던 학생과 시민들은 누군가 "경찰이 옥상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고함을 지르자, 상가나 사무실을 향해 "불꺼라 불꺼!"라고 외치기도 했다.

박영주씨는 "불이 켜져 있으면 자신들의 얼굴이 노출될 것을 우려한 시민들이 행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불을 끄도록 했다"며 "불이 켜진 상가나 민가 사무실에는 돌멩이가 사정없이 날아가 얼마되지 않아 시내가 암흑천지로 변했다"고 회상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시위가 과격한 만큼 경찰의 진압도 난폭해져 경찰이 방망이를 마구 휘둘러대는 통에 피투성이가 된 시민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시위군중은 점점 더 늘어 민중봉기의 양상이 한층 뚜렷해졌다.

박씨는 "남성동과 북마산·양덕·자산동파출소 등이 잇따라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고 회원동과 산호동파출소 등은 불에 탔다"며 "부상당한 시민은 즉석에서 시위대가 모금을 벌여 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병원으로 후송하는 등 시위시민들은 이심전심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비가 내렸으나 한번 불붙은 시위불길은 꺼질 줄 몰랐다. 공화당사와 방송국도 습격을 받았다. 격화된 시위는 20일 새벽까지 계속됐다. 정부는 이날 정오를 기해 위수령을 발동, 민중항쟁을 폭동으로 규정하기에 바빴다.

마산시위로 505명이 연행되고 59명이 재판에 회부됐지만, 당시 언론은 시민 봉기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잊혀가는 항쟁정신

항쟁의 진원지였던 경남대에서는 지난 7일부터 사흘동안 '한마 시월제'가 열렸다. 부마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5월 대동제와는 별도로 학생들이 지난 85년부터 열고 있는 행사다.

하지만 사흘동안 진행된 이 행사에서 부마항쟁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프로그램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관련 행사로는 동아리연합회가 여는 '10·18이란 무엇인가'라는 학술행사가 고작일뿐, 나머지는 체육대회와 가요제, 온라인게임대회, 토익왕 선발대회 등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모 단과대학에서 개최하려던 부마항쟁 관련 학술행사는 지원자가 적어 무산됐다.

총학생회는 대자보와 팸플릿 등을 통해 부마항쟁의 의미를 알리려 했지만, 학생들의 현실적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경남대 정영현(사회학과 3년) 학보사 편집국장은 "참여세대라고들 하면서 참여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단순히 즐기기에만 치중하는 풍토는 문제가 있다"면서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선배들의 뜻을 이어받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출처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41012.2200620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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