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2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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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2일자, 경향신문, 우석훈 박사 칼럼


[생태경제 이야기]‘쿠즈네츠 함수’ 우리에게도 유효할까
우석훈 | 영화기획자·경제학 박사
우리가 잘살게 되면 많은 문제가 과연 해결될 것인가? 경제학에서 이 문제에 관해서 가장 정통한 연구는 1971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사이먼 쿠즈네츠의 실증적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쿠즈네츠의 가설에 의하면, 경제성장 초기에는 불평등이 증가한다. 하지만 일정 수준의 경제성장 단계를 넘어가면 오히려 경제적 불평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를 역U자형 함수 혹은 쿠즈네츠 커브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우리가 지겹도록 들었던 ‘파이’를 키우자는 얘기는 이런 쿠즈네츠 함수가 존재한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다. 초기에는 불평등이 늘어나지만 이 단계를 참고 버티면 언젠가는 개선되는 시점이 온다는 것이다. 쿠즈네츠의 연구는 자본주의 경제가 한참 어렵던 1930년대와 ‘영광의 30년’이라고 불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후 복구 단계를 주로 비교하고 있다. 그는 1985년에 사망하였다. 
<21세기 자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프랑스 경제학자 피케티의 분석은 쿠즈네츠가 사망한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포함하고 있다. 쿠즈네츠 사후, 이 관계가 역전되었다는 것이 그의 논지라고 할 수 있다. 잘살면 문제가 해결되느냐, 잘살아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오히려 심각해지느냐? 우리는 지금 이 논쟁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있다. 
이런 쿠즈네츠 함수가 환경 분야에도 도입되어 있다. 생태에서의 역U자 함수도 작동방식은 같다. 경제 발전의 초기 단계에는 환경 문제가 점점 심해지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이제 그 문제가 개선의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다. 생태주의자들이 기계적으로 경제성장이나 풍요에 대해서 반대만 하지 않는 것은 환경 쿠즈네츠 함수의 존재를 아예 부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생태사회, 생태경제, 주로 유럽 사회들을 모델로 하는 이론들의 배경에는 환경 쿠즈네츠 함수가 존재한다. 스위스나 스웨덴, 이런 나라들이 1인당 국민소득 6만달러를 넘어가던 시기를 잘 살펴보면, 사회와 경제의 생태적 전환이 일정하게는 존재한다. 1인당 에너지 사용량도 줄어들었고, 여러 가지 생태지표들이 좋아졌다. 그리고 농업에 대한 사회적 지지도 높아졌다. 이런 걸 보면 경제적인 것이 생태적이고, 생태적인 것이 또한 경제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예 거짓말은 아니다.
자, 우리의 문제로 돌아와보자.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3만달러, 이렇게 명목소득은 분명히 높아졌다. 그동안 개개인의 빚은 엄청나게 늘어났고, 안정된 직업은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되었다. 이제 청년들은 비정규직도 감지덕지, 파견직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살게 되었다. 실질적인 가처분소득은 개선되지 않는다. 분명히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4대강과 원전이라는 눈으로 보면, 그렇다고 생태적으로 무엇인가 개선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경제적인 의미든 생태적인 의미든, 아름답던 시절의 쿠즈네츠 함수의 작동 가능성을 기대하며 여전히 낙관할 수 있을까? 아니, 쿠즈네츠 함수는 맞지만 우리는 실질소득이 줄어들고 있으니까 경제적으로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는 것일까?

대혼동과 대위기의 시대, 여전히 우리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우리 모두 차분히 한 번 고민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면 우리의 삶이 과연 나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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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mk.co.kr/column/view.php?year=2014&no=794621

2014년 5월 22일, MK, 정태인 박사 칼럼 

[기고]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의 분배 正義
기사입력 2014.05.22 17:10:11 | 최종수정 2014.05.22 19: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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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흔히 공산당 선언으로 번역)은 "유령 하나가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2014년 또 하나의 유령이 전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분배 문제를 다룬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그것이다.

사실 주류경제학은 분배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일정한 조건(완전경쟁시장과 1차동차 생산함수)이 만족된다면. 각 생산요소에 돌아가는 분배 몫은 한계생산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볼리는 실제로 이 분배 몫이 일정하다고 주장했고(볼리의 법칙), 쿠즈네츠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는 분배가 악화되지만 일정 단계가 지나면 개선될 거라고 예언했다(역U자 가설). 이에 따라 성장에만 신경 쓰면 그만이고 섣불리 분배문제를 건드렸다가는 상황만 악화시킬 거라는 주장은 지금도 주류경제학의 신조에 속한다.

프랑스의 마흔세 살짜리 경제학자가 이 모든 주장을 단숨에 엎어버렸다. 리카도, 마르크스 등 고전적 정치경제학자들은 물론 쿠즈네츠의 역U자 가설, 모딜리아니의 평생저축가설, 베커의 인적자본론, 그리고 경제학의 기초 중 기초라고 할 만한 한계생산력설, 심지어 시장실패론까지 피케티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그의 무기는 어느 누구도 쉽사리 부정할 수 없는 장기 통계, 즉 역사적 사실이다. 그가 초점을 맞춘 수치는 "어떤 시점의 한 나라 순자산(피케티의 `자본`)을 그해의 국민소득으로 나누면 얼마나 될까?"(β=W/Y, W는 민간순자산, Y는 국민소득)이다. β에 수익률을 곱하면 그해 자산소유자들이 가져간 몫이 될 것이다(α=rβ). 그는 이 회계적 항등식에 `자본주의의 제1 근본법칙`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붙였다. 

다음 단계는 도마-새뮤얼슨-솔로의 `장기 균형성장 조건`(β=s/g, s는 저축률, g는 경제성장률)과 현실의 수치를 비교하는 일이다. 피케티는 이 방정식에 다소 구질구질한 설명을 덧붙여(제5장) `자본주의 제2 근본법칙`이라고 불렀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β는 19세기 말에 6~7배로 정점을 찍은 뒤 1910년에서 1950년까지 2~3배로 급전직하했다. 두 번의 전쟁과 대공황 이후의 재분배정책 때문이다. 이 수치는 1980년대부터 서서히 상승해서 현재는 4~6배까지 치솟았다. 또한 그는 자산의 수익률(r)은 역사 전 기간에 걸쳐 4~5%라고 계산했다. 그렇다면 자산소유자가 차지하는 몫(α)도 β와 같은 궤적을 그릴 것이다.

21세기에는 어떻게 될까? 만일 경제성장률(g)이 자본의 수익률(r)보다 적다면 자산가들은 점점 더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될 것이다. 이제 누가 잘사느냐, 못사느냐는 재능이나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상속에 의존하게 된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에 나오는 가난한 젊은 귀족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검사가 될 것인지, 돈 많은 미망인을 유혹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다(`라스티냑의 딜레마`). 21세기는 다시 그런 `세습자본주의`가 될 거라는 경고다.

그런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면 글로벌 자본세와 최고세율 80%에 이르는 누진소득세를 전 세계가 동시에 부과해야 한다. 앞으로의 논쟁은 자본수익률이 과연 일정한지와 정책대안을 둘러싸고 벌어질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 `빨갱이`라는 낙인찍기는 이미 시작됐다. 그들에게 `21세기 자본`은 유령인 것이다. 참고로 한국의 2012년 β는 5.6, r=7.1, g=3.8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분배가 악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자본주의의 자산 재분배는 두 번의 세계전쟁과 대공황을 겪은 뒤에 일어났다. 이런 비극을 거치지 않고 사회적 합의에 따라 자산 재분배를 하는 것은 건실한 국가와 자본주의의 역량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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