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68645.html
2014년 12월 12일, 한겨레, 김병익 선생 칼럼
[특별기고] “그해 겨울(과 봄)은 따뜻”했던 이유 / 김병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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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회상이 따뜻하게 살아오는 것은 나이 하나 더 불으면서 내 삶의 인연들과 거기서 얻은 덕분들이 기특하게 여겨진 때문이리라. 각박한 시절, 넉넉한 일들을 되살려냄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 같다.
10월 하순의 어느 날, 천관우 선생이 한국기자협회의 책임을 맡은 지 며칠 안 된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거구에서 울려오는 걸걸한 음성으로 천 선생님은 작은 몸집의 내게, 기자협회장으로서 일을 되도록 하지 않고 게으르게 견딤으로써 “무능하다는 비난을 감수하겠다”는 내 취임사가 마음에 들었다며 격려해주셨다. 유신 정권의 강압으로 <동아일보> 주필에서 물러나 한국사 저술을 하시면서 울울한 심정으로 참담한 현실을 못 견뎌 하시던 천 선생님은 “기자들의 위신과 의지를 곧추세우기 위해” 오히려 일하지 않는 회장이 되겠다고 한 내 마음을 바로 짚어주신 것이었다. 40년 전인 1974년 10월이었다. 그러했음에도, 그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나는 내 생애에 가장 일 많고 수선스러운 한때를 보내야 했고, 1년 임기의 연임에도 6개월 만에 내 직책을 마감해야 했다.
선임 회장이 중도 퇴진하면서 젊은 기자들이 메이저 신문 기자들이 협회에 무관심했기에 불상사가 터졌다며 한국기자협회 재건에 뜻을 모았고, 그 열정 어린 설득을 못 이겨 나는 ‘허락 없이 외부활동에 나선’ 벌로 무기휴직 당한 채 회장에 나섰다. 취임 닷새 만에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채택했고 이 운동이 전 신문·방송사에 확산되면서 언론계 전반이 거듭 태어난 듯 용기와 열정으로 거대한 물살처럼 뜨겁게 확산, 실천되었다. 기자들은 기관원의 편집국 출입을 막았고 사실 보도 기사들을 실었으며 기자들 간의 연대로 이 자유 언론 운동은 폭넓게 번졌다. 그 전에도 두어 번 선언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전 언론계가 참여하는 전폭적인 운동이었고 무엇보다 실천적이고 지속적이었다. 그 힘찬 물살은 참으로 도도했다.
‘무사, 무능’을 모토로 했던 나와 집행부는 물론 조용할 수 없었다. 언론기관과 기자, 피디들의 연대를 도모하며 그 운동의 확산과 실천 작업을 도모해야 했다. 그 운동으로 신문은 사실 보도로 조금씩 열어갈 수 있었지만, 독재 권력이 그 자유언론에의 열정을 방치할 리가 없었다. 12월에 들면서 정보기관은 기업체들한테 동아일보에 광고를 주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그래서 생긴 백지 광고면을 시민들은 뜨거운 격려의 말들로 채워주었지만 몇 주 버티던 신문사가 결국 굴복해서 이듬해 3월 투쟁하는 기자들을 대량 해고했고 <조선일보>에도 그 비슷한 사태가 벌어졌다. 두 신문사와 <동아방송> 등 당시 해고된 기자와 방송인이 160명이 넘는 대량 사고였고 해직 언론인들은 투위를 결성하고 투쟁을 계속했다. 기자협회에도 금일봉을 희사하는 등 남모르는 격려와 후원들이 잇달았다. 이 동아-조선 언론 사태는 여러 백서와 회고록으로 많이 기록되어 널리 알려져왔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 겪은 참으로 감동적인 일들 중 고백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장면 둘만 회상하며 그분들께 ‘40년 만의 뒤늦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1975년 3월, 한꺼번에 직장에서 밀려난 기자들이 무직자가 되어 매일 벌이는 신문사 앞의 항의 시위를 지지하는 한편 당장의 그들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나는 동료 언론인만이 아니라 문인, 종교인, 변호인 등 몇몇 분야 인사들에게 이 사태를 해소하기 위한 활동과 함께 해직 언론인들의 생활비 부조를 위한 모금을 부탁했다. 그때 받은 숱한 호응과 격려 속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회상되는 것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주도한 시인 고은 선생이 약정한 날 땀을 뻘뻘 흘리며 숨차게 달려와, 두툼한 봉투를 내밀며 씩 웃던 말 없는 웃음이었다. 드디어 해냈다는 안도감이 스며 있는 겸손한 미소였다. 기자협회는 그렇게 모아준 돈을 두 신문사 투위에 전달했다. 친구 황인철 변호사도 동료들과 함께 애써준 그 모금도 4월의 기협 집행부가 남산에 연행되었다가 퇴진함으로써 1회로 끝나고 말았다. 이 퇴직 기자들 후원은 <기자협회보 축쇄판> 등의 간단한 기록으로 볼 수 있거니와, 고은 선생의 일기집 <바람의 사상> 1975년 4월11일치에 “기자 130인에게 매월 5만원씩을 주는 일을 질의”하여 “우리 자유실천은 5인분을 배당받았다”고 짧게 적혀 있고 18일치에는 “후원금 걷었다. 10만원 넘었다. 2만5000원이 한도액인데 그 세 갑절이 된 것이다”라고 담담히 씌어 있다(금액에 혼란이 있다. 숫자는 원문대로). 지난주에 나온 <한국작가회의 40년사>는 문인들의 동아일보 격려광고문을 모두 수록해 감회를 더해주었지만 고은 선생의 이 후원금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침내 책임을 완수했다는 듯 자족하며 짓던 선생의 그 흐뭇해하던 웃음은 그분을 뵐 때마다 그 소박한 얼굴에 언제나 따스하게 겹쳐 다가온다.
기자협회는 언론자유 실천이란 바깥일 말고도 해결해야 할 큰일이 안으로 하나 더 있었다. 전임자가 <기자협회 10년사> 편찬을 계획하고 원고와 편집까지 마치고는 그 제작과 비용을 내게 떠넘긴 것이다. 그런데 동아일보 광고 사태 때문에 으레 찬조하던 정·관계와 기업들이 후원을 피했다. 문화부 기자로 알게 된 출판사 여러 군데가 도와주었지만 몇곳은 돈은 주지만 광고는 내지 말아달라고 했다. 궁지에 몰린 나는 친구 오규원 시인에게 그가 홍보직원으로 근무하는 태평양화학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전혀 아는 분이 아니기에, 도무지 기대할 수도 없는 ‘밑져야 본전’의 막판 심정이었다. 다행히 서성환 사장과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참으로 다급했기에 나는 매우 간곡했을 것이고 그 고충이 분명하기에 무척 진지했을 것이다. 내 말을 듣고 서 사장은 얼마가 필요하냐고만 물었다. 나는 “500만원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면담을 마친 뒤 궁금해하는 오규원이 “간도 크다”고 혀를 차던 기억으로 보아 참 큰 금액이었다.(이 ‘10년사 발간’에 대한 <한국기자협회 50년사>의 “제작비는 협회 자체 예산에 광고료를 보태 충당했다”는 서술은 정확하지 않다.)
서 사장은 그 거액을 뒷말 없이 보내주었고 ‘수출 150만달러 돌파’의 태평양화학 광고가 실린 <기자협회 10년사>는 예정대로 제작되었다. 이 때문에 서 사장이 후에 혹 어떤 곤욕을 치렀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그 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는 어디에도 밝힌 적 없고 그분께 감사의 인사조차 못 드렸다. 이 큰 결례가 늘 내게 짐이 되었다가 뒤늦게 지난봄 후배가 다리를 놓아 만난 자리에서 그분의 아드님께 ‘40년 만의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우리도 모르는 선친의 일화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되레 내게 고맙다고 했다. 지난가을 서 회장은 서울대병원 의학연구비로 10억원을, 북한 영유아 영양 지원 사업으로 10억원을 사재로 기부했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보도를 신문에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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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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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뒤늦은 회상이 지금 새삼 이처럼 따뜻하게 살아오는 것은 나이 하나 더 불으면서 내 삶의 인연들과 거기서 얻은 덕분들이 기특하게 여겨진 때문이리라. 서로 할퀴고 윽박지르는 요즘처럼 각박한 시절, 아무 말 없이 수줍게 씩 웃는 웃음으로 마음을 나누고 그저 “해드리죠”란 담담한 한마디로 크게 지원해준 넉넉한 일들을 되살려냄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 더없이 사납고 삼엄했지만 그 소란 가운데 우리 ‘일부 불순분자들’ 간에 나누던 조용한 교감은, 엄혹한 겨울철이었기에 더욱 포근해지는, 박완서의 소설 제목처럼 “그해 겨울은 따뜻했”던 감사의 정서로 젖어들게 하고 있었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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