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③ 유시춘이 묻고 이호철이 답하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두번째 주자인 원로 소설가 이호철(오른쪽) 선생과 유시춘(왼쪽)씨가 회고한 60~70년대 문인운동의 전사와 작가회의 창립의 배경을 2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사진은 두 선후배가 지난 26일 경기도 고양시 선유동 이호철 선생의 집필실에서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다.
이어 시인 고은-김형수, 문학평론가 백낙청-임홍배, 시인 양성우-이승철,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소설가 황석영-정도상,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이호철은
이호철은 193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50년 6·25전쟁 때 인민군으로 징집당해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나 남쪽에 정착했다. 53년 문학소년 시절부터 써온 습작을 들고 황순원을 찾아가 창작 지도를 받았고 <문학예술>에 단편 <탈향>(1955)과 <나상>(1956)이 연달아 추천되면서 등단했다. 피난지 부산에서 힘겨운 생계 노동을 한 경험 등으로 실향민의 정서를 그려내 대표적 분단작가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그의 소설은 10여개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61년 <판문점>으로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고 62년 <닳아지는 살들>로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89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했고 92년 예술원 위원에 추천받았으며 연작소설 <남녘 사람 북녘 사람>으로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2004년 독일어로 번역된 <남녘 사람 북녘 사람>으로 독일 예나의 프리드리히실러대학(예나대)이 주관하는 ‘프리드리히 실러 메달’을 받기도 했다.
장편소설과 전집으로 <소시민>(삼중당·1972), <서울은 만원이다>(삼성출판사·1972), <남풍 북풍>(현암사·1977), <문>(민음사·1981),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중앙북스·2009), <이호철 전집 1~7>(청계연구소·1988~91) 등이 있다.
▶▶유시춘은
유시춘은 1950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하던 73년 월간 <세대>에서 중편 <건조지대>로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그때 심사위원을 맡은 이호철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고교 교사로 재직하다 85년 해직된 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서 일했다. 87년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첫 <인권보고서>를 썼다. 2001년 국민의 정부 시절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2007년부터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소설집으로 <안개 너머 청진항>(창작과비평사·1995) <우산 셋이 나란히>(푸른나무·1990) 등이 있다. 그밖에도 <6월 민주항쟁>(2004년 청소년권장도서), <70 80 민주화운동사-우리 강물이 되어> 등 잊혀져가는 민주화운동을 기록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1974년 1월7일 아침 10시
이호철이 전체 진행을 맡고
염무웅이 작성한 선언문을
백낙청이 낭독한 뒤 끌려갔죠
그날 밤 훈방돼 술을 마시는데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됐어요
그해 11월18일 광화문 네거리서
송기원, 이시영이 펼침막 들고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는데
그게 자실 출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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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문인들의 현실 참여는 71년 4월19일 출범한 첫 재야운동단체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합류한 젊은 문인들이 주도했다. 사진은 73년 11월 초 서울 종로 와이엠시에이(YMCA)에서 민수협의 재야 원로들이 시국간담회를 열고 있는 모습으로, 왼쪽부터 이호철, 지학순 주교, 함석헌, 김재준 목사, 천관우, 법정 스님, 계훈제·김지하씨 등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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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춘 1984년 선생님께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대표를 맡으셨지요. 그 배경에는 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 단체에 참여해온 이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71년 상설 재야운동 단체로는 처음 출범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이하 민수협)에서 운영위원을 지내신 게 시작인 셈인가요?
이호철 ‘민수협’ 결성 준비 모임은 71년 4월9일 서울 와이엠시에이(YMCA) 빌딩 8층에서 했어요. 문인으로는
남정현, 한남철, 방영웅, 염무웅, 박태순 등이 함께했지요.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64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를 주도했던 김도현과 이재오도 만났던 기억이 납니다. 김재준 목사, 이병린 변호사, 언론인 천관우·양호민 선생 등이 주도했고 우리 문인 일행은 뒤에 앉았습니다. 회의 내용은 정파적 불편부당 원칙, 운영방안 확정과 운영위원 인선 등이었지요.
그 열흘 뒤 4·19 기념일에 맞춰 바로 서울 대성빌딩에서 출범식을 열었습니다. 발기인 44명 가운데 문인이 10명이나 됐고, 선언문은 천관우 선생이 썼는데 그는 가장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일했지요. 대표위원으로 김재준·이병린·천관우 세 분을 선임하고 운영위원 10명 안팎을 뽑았는데 기억나는 이로 원주의 장일순, 김숭경 박사, 강기철 교수, 법정 스님, 그리고 여성으로 김정례 등입니다. 사무국장으로 함석헌의 퀘이커교도 제자인 전덕용을 지명했고요.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허름한 사무실을 마련해서 자주 운영위원 회의를 열었습니다. 얼마 뒤 함석헌이 미국에서 귀국해 대표로 합류하고 운영위원으로 리영희, 계훈제 등이 보강되었지요.
천관우는 마침 이웃이어서 자주 어울렸는데, 큰 허우대에 어울리는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호남이었지요. 분수없이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자기절제, 비록 짧은 문장 하나에도 철저히 구석구석 살피는 섬세함을 갖춘 그가 내게는 당대의 거인으로 느껴졌습니다. 동시대의 인물로 김재준, 함석헌, 장준하, 이병린, 지학순 등은 후대들이 나름 이모저모 챙겨드리는 데 비해 천관우는 깊은 망각 속으로 묻혀 버린 게 안타까워요.
유 그해 가을 지식인 64명이 시국선언을 하는데 문인이 22명이고, 더 놀라운 건 문학외적인 글쓰기나 행동을 전혀 하지 않기로 유명했던
이희승, 안수길, 최인훈 등이 참여한 겁니다. 선생님이 뭔가 활약을 한 덕분이겠죠?
이 이희승, 안수길 두 분은 내가 직접 찾아뵈었지요. 민수협은 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새 국면을 맞았어요. 남북관계의 진전을 바라는 민수협의 기대와 달리 남도 북도 비슷한 독재체제를 구축하면서 서로 닮아갔고, 남은 끝내 72년 10월 유신 선포로 이어지더군요.
서울대 문리대가 대규모 시위를 일으킨 건 유신 선포 1년 만인 73년 10월2일(10·2 데모)인데 비상총회에서 밝힌 4개 선언문을 보면 그 정신과 방향이 80년대 끝까지 관통하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파쇼통치 중단, 국민생존권 보장, 중앙정보부 해체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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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월5일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발표된 이른바 ‘문인 및 지식인 간첩단’ 사건은 재일동포 잡지 <한양>과 연계를 빌미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앞서 1월7일 나온 ‘문인 61인 개헌지지 성명’이 발단이었다. 이호철(소설가) 임헌영(문학평론 가·중앙대 강사) 김우종(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정을병(소설가·한국가족계획협회 지도부장) 장병희(문학평론가·국민대 강사·필명 백일)씨 등 5명이 ‘반공법 및 간첩 혐의’로 구속됐던 이 사건은 재판 끝에 무혐의나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훗날 박정희 정권의 조작 사건으로 밝혀졌다. 사진은 그해 10월31일 서울 서대문구치소 앞에서 이호철(왼쪽)·장병희(오른쪽)씨가 석방 환영의 꽃다발을 들고 인사하는 모습이다. 이호철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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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파문이 전국으로 번져가던 즈음인 11월5일, 민수협도 15명 이름으로 첫 시국선언을 발표했지요. 서울 와이엠시에이 1층 식당에서 천관우가 작성한 선언문을 김재준 목사가 낭독했지요. 독재공포정치의 폐해를 지적하고 입국의 기초인 민주주의의 뿌리를 상기시킨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9명 모두 곧바로 종로경찰서가 준비한 스리쿼터에 실려 갔지요. 조서 작성을 마치고 난로도 없는 썰렁한 대기실에 앉아 지루하게 기다리는데 해가 질 무렵 서장실로 들어가니 종로경찰서장이 최대한 예의를 갖춰 통사정을 하는 겁니다. 행정 관례상 형식이니 준비된 반성문에 손도장 하나만 눌러주십사 하는 거였지요.
함석헌은 반성할 것이 추호도 없노라고 서장을 호령하고, 김재준은 법대로 하라고 버티고…, 공수가 뒤바뀌어 되레 서장이 쩔쩔매던 모습이야말로 유신의 정당성에 동의하지 못하는 그 시절 자연인들의 모습이었겠지요.
유 그로부터 두 달 뒤인
74년 1월7일 ‘문학인 61인 개헌지지 선언’이 나오지요.
이 그날은 월요일, 오전 10시 명동성당 맞은편 지하다방 코스모폴리탄에 스무명 남짓 모여서 염무웅이 작성한 선언문을 백낙청이 낭독했고, 내가 전체 진행을 맡았습니다. 원로 안수길, 박연희를 비롯해 한남철, 백낙청, 김지하, 황석영, 천승세, 송영 등이 현장에서 바로 경찰에 끌려갔어요. 이번에는 중부경찰서였는데, 두 달 전 종로서와 분위기가 비슷했어요. 경찰들도 모두 실실 웃었고 더러는 만난 참에 저자 서명을 해달라기도 했지요. 그날 김지하가 ‘1974년 1월7일의 이호철’이라며 석간 백지광고란에 내 캐리커처를 그려줬는데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저녁에 공화당의 정구영 의장과 예춘호 사무총장이 전격 사퇴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일제히 환호했지요. 그날 밤 통금시간 임박해서 전원 훈방으로 풀려나와 근처 술집에서 급히 한잔 마신 뒤에 김지하, 송영, 황석영은 우리집까지 같이 와서 새벽까지 마셨어요. 잠드는 둥 마는 둥 새벽이 되었는데 ‘긴급조치 1호’가 발동했다는 뉴스를 듣고는 우리는 부랴부랴 각자 급히 흩어졌지요.
유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이 그 후폭풍으로 몰아쳤습니다. 핵심 기소 내용은 무엇인가요?
이 ‘긴조 1호’가 발동하자 바로 가택연금을 하더군요. 가끔 담당 형사를 집으로 불러들여서 소주잔도 주고받으며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기도 했지요. 그러다 74년 1월14일 보안사에서 나왔다며 끌고 갔어요. 열흘간 조사받고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지요. 김우종, 임헌영, 장백일(본명 장병희), 정을병과 함께 5명이었죠. 그 시절 일본 민단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한양>에 기고한 내용을 문제삼았어요. 그런데 그 잡지에 글을 쓰고 고료를 받은 문인은 수백명을 헤아렸어요. 특히 72년 3월 창간 10돌 기념호에는
예술원 회장 박종화, 한국펜 본부장 백철, 문협 회장 김동리, 연대 총장 백낙준, 국회의원 모윤숙 등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축시를 썼을 정도였으니까요. 민간인인데도 보안사가 수사를 하고, 거기에 불법구금과 가혹행위를 자행한 뒤 버젓이 중앙정보부의 이름을 빌려 검찰에 송치했고, 담당 이창우 검사는 이를 그대로 인정해 우리를 기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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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월 이른바 ‘문인 간첩단 사건’의 빌미가 된 은 62년 3월 재일동포 김기심(발행인)·김인재(편집인)씨가 일본에서 펴낸 한국어 종합교양지로 애초 ‘5·16 혁명공약’을 실을 정도로 박정희 정권에 우호적이었으나 끝내 유신 공안정치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사진은 63년 1월호 ‘한양’ 표지.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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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훗날에도 이런 보복성 수사는 끔찍하게 반복적으로 자행되는데요, 그 무리한 기소와 재판의 배경에는 중정과 보안사의 샅바싸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 우리가 간첩이라니 참 우습지요. 장준하·백기완 주도의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에 ‘30인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이 결정적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요즈음 재심 거쳐 무죄판결이 줄줄이 나오고 있는 간첩사건들이 대부분 그때 중정 작품이었고, 보안사는 경쟁에서 밀렸다고 생각하고 밀어붙였던 것이라고 합니다. 연일 언론에 대서특필한 것과 달리 결국 정을병은 무죄 석방, 나와 장백일은 집행유예로 풀려났지요. 이때 문협의 문인들이 대거 석방 탄원서에 서명한 건 의외이지요. 회원 600여명 가운데 295명이 서명했을 뿐 아니라 <조선일보> 선우휘도 글로 힘을 보탰어요. 그는 평소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요. 그 모든 과정에는 고은 시인의 빼어난 기동력이 작용했지요.
서대문의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는 동안 많은 이들을 만났어요. 이듬해 75년 4월9일 전격 처형당하게 되는 인혁당 관계자들은 이따금 내게 간식을 보내주기도 했고요, 곧이어 김지하를 비롯해 이철, 유인태, 나병식 등등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들어오더군요. 거기에 이들을 변론하던 강신옥 변호사까지 뒤따랐죠.
유 그 사건 때 저는 등단한 직후였고 고교 교사 신분이었지만 두려움을 떨치고 법정에 갔었죠. 너무나 권위적으로 호통치던 검사, 법정 정리의 경직된 자세 등등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해 10월30일 석방되신 뒤 보름 남짓 만에 자실이 창립합니다. 경이로운 점은 그 시절 문협은 관변 성격을 면치 못한 채 문학직능단체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와는 사뭇 다른 문학운동 조직으로 자실의 위상과 정체성을 설정한 겁니다.
74년 11월18일 오전 10시 광화문 네거리. 갓 등단한 송기원과 이시영이 펼침막을 펼쳐들고 경찰과 몸싸움을 하는 게 자실 출범의 순간인데요, 이후의 신산스러운 풍찬노숙 여정을 예시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그런데 그 무렵 한편으로 나는 보수 문인들의 문협 이사장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제안을 한 사람은 한남철이고 이문구가 적극 나섰지요.
문협은 김동리 인맥이 주류를 형성했다고나 할까요. 우스갯소리로 ‘무교동 사무라이’라고, 소설가 강용준, 하근찬, 박경수 그런 사람들이 호위를 하고. 그런데 조연현과 김동리는 사이가 안 좋았어요. 조연현은 김동리가 월탄 박종화를 제치고 문협 이사장을 하는 데 불만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서정주를 내세웠다가 이기지 못하니까 조연현 자신이 직접 이사장 선거에 나선 거였지요. 75년 1월12일 문협 정기총회 겸 이사장 선거에서 결국 내가 260여표인가 얻고 조연현이 520여표로 당선되었지요.
유 이 선거에서 고은 시인이 자원해서 이호철 선대본부장을 맡아서 뛰었고, 끝난 뒤 ‘영광뿐인 패배’라 일갈했다고 들었습니다.(웃음) 자실 출범하자마자 곧바로 고난이 덮칩니다. 양성우 시인 파면, 신동엽 전집, 조태일 시집 판금 조치 등등 유신 말기 여러 부문운동에 닥친 엄혹한 탄압에도 자실은 꾸준히 관심과 지원을 유지했지요.
(다음회에 이어짐)
사진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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