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일, 중앙일보, 송호근 교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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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우리는 아직도 '국민'시대를 산다
[중앙일보] 입력 2014.12.02 00:02
국가경계가 무너진 지구촌 시대, 전 세계 74% 시장과 관세장벽을 튼 한국은 아직도 ‘국민시대’를 고수하는 유별난 나라다. 미국 대통령은 보통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Dear American Citizens!)’으로 말문을 연다. ‘국민’은 전쟁, 재난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호칭될 뿐이다. 한국의 대통령들은 그냥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다. 연두교서나 담화문에서 ‘시민 여러분’으로 시작했다가는 온 나라가 시끄러울 것이다. 거꾸로 박원순 시장이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했다면 드디어 본심을 드러냈다고 대서특필 될 것이다. 우리에겐 부산시민, 광주시민은 존재해도 ‘한국 시민’은 없다. 형용모순이다. 뭐가 문제인가?
미국 시민, 독일 시민은 역사적 위상이 뚜렷한 존재이기에 형용모순이 아니다. 19세기 100여 년 동안 지배층과 겨루는 과정에서 내부 결속력과 독자적인 시민정신을 길렀다. 복고적·특권지향적 귀족계급에 맞서 진취적·평등지향적 윤리를 내세웠다. 상공업 발전에는 계약과 신뢰가 필수적이었고, 문화적 품격과 세속적 경건성을 결합시켰다. 내부 갈등이 발생하면 ‘자치’로 풀었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는 ‘타인에의 배려’를 우선해야 한다는 공존윤리가 시민의 발명품인 ‘자치행정’에서 움텄다. 유럽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권력에 도전해 왔을 때 계급타협으로 풀었던 것도 공존의 정신이었다. 국민(國民)이 되기 전 그들은 시민(市民)이었다. 워싱턴 시민, 베를린 시민이 아니라 가족·사회·국가의 균형을 지향하는 보편인이었다. 시민권이란 ‘나’를 위해 ‘남’을 존중할 의무를 뜻한다.
우리에겐 그런 시민적 경험이 미천하니 시민권도 온전할 리 없다. 학식·교양·재산을 겸비한 중산층이 폭넓게 형성됐는데 왜 시민 호칭은 이렇게 낯설고 어색한가? 시민층이 사회를 주도할 정신적 양식을 못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공익과 공존보다는 사익과 출세에 여념이 없었다. 그것은 한국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식민 시기와 전쟁으로 전통적 지배층이 와해된 그 빈 공간을 차지하려는 선점경쟁이 발생했다. 산업화 시대에 더욱 가열된 이 출세경쟁이 ‘건강한 시민성’보다는 ‘남다른 능력’을 키우라고 명령했다. 이 ‘남다른 능력’ 명세서엔 공존과 공익, 타인에의 배려 같은 것은 없다. 언어와 요리, 문화와 예술 같은 교양시민의 필수덕목도 없다. 고급아파트와 자동차 과시욕, 그리고 권리 사수를 위한 소송 의욕이 빛난다.
그래서 이런 부끄러운 일들이 발생한다. 아파트 경비원 자살, 재계약 시비와 일괄해고 통지. 속사정을 들어보면 양측 모두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경비원이 근무태만이거나 주민이 하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민주노총의 재빠른 개입이 주민의 경계심을 촉발했을 거다. 고용연장과 최저임금 보장이라는 민주노총의 강수(强手)에 주민은 계약파기로 맞섰다. 경비원은 최저임금 이하의 월급에 혼신의 힘을 쏟지 않고, 주민은 월 2만원 추가부담을 아끼려 해고를 불사한다. 이 경우 시민성은 증발한다. 한편 전기요금 아껴서 경비원 월급을 올려주는 아파트가 강북에 생겼다. 부자 동네에서 일어난 저 치졸한 장면은 ‘국민’으로만 살아온 탓이다. 국가 명분에 수직적으로 동원된 원자화된 개체인 국민은 수평적 관계에는 한없이 미숙한 존재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자제와 양보, 이것이 시민성이다.
이 해가 가기 전에 다시 묻고 싶은 게 있다. 세월호 참사 말이다. 일부 시민들은 넌더리를 낼 것이다. 세월호 관련법이 통과되었고 진상규명도 진행된 마당에 ‘그냥 지켜보라’는 호통이 들리는 듯도 하다. 그런데 묻고 싶다.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청해진해운에 철퇴를 내리고, 관련 공무원들을 일벌백계하는 국가의 감시와 처벌을 그냥 구경하면 되는가? 신설된 국가재난처가 획기적 조직 원리를 도입해도 구조 기능의 민영화에 잠재된 공공성의 소멸을 방지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한 고통, 우리도 공범일 수 있다는 죄의식은 저무는 이 해와 함께 묻어야 하나? 각성하던 시민들을 다시 ‘국민’으로 귀속시켰던 것은 ‘국가개조!’라는 저 강력한 발언이었다. 자성의 물결에서 사회개혁의 단초를 발견하려던 시민들은 결국 민생과 색깔 프레임 속으로 빨려 들어 자유롭지만 무기력한 국민이 되었다. ‘국가개조’로 수직적 그물망을 다시 꿰맬 수 있겠지만 실밥이 아예 터져 있던 수평적 그물망, 그 허약한 시민성은 어찌할 것인가? 사태해결의 책임과 권리가 국가에 양도된 지금 시민은 그냥 관객이다. 국가가 법의 칼날로 참사의 원인과 과정을 토막 낼 때 법치의 원천인 시민성 배양의 기반도 동시에 토막 날 것이다. 우리는 아직 국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미국 시민, 독일 시민은 역사적 위상이 뚜렷한 존재이기에 형용모순이 아니다. 19세기 100여 년 동안 지배층과 겨루는 과정에서 내부 결속력과 독자적인 시민정신을 길렀다. 복고적·특권지향적 귀족계급에 맞서 진취적·평등지향적 윤리를 내세웠다. 상공업 발전에는 계약과 신뢰가 필수적이었고, 문화적 품격과 세속적 경건성을 결합시켰다. 내부 갈등이 발생하면 ‘자치’로 풀었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는 ‘타인에의 배려’를 우선해야 한다는 공존윤리가 시민의 발명품인 ‘자치행정’에서 움텄다. 유럽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권력에 도전해 왔을 때 계급타협으로 풀었던 것도 공존의 정신이었다. 국민(國民)이 되기 전 그들은 시민(市民)이었다. 워싱턴 시민, 베를린 시민이 아니라 가족·사회·국가의 균형을 지향하는 보편인이었다. 시민권이란 ‘나’를 위해 ‘남’을 존중할 의무를 뜻한다.
그래서 이런 부끄러운 일들이 발생한다. 아파트 경비원 자살, 재계약 시비와 일괄해고 통지. 속사정을 들어보면 양측 모두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경비원이 근무태만이거나 주민이 하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민주노총의 재빠른 개입이 주민의 경계심을 촉발했을 거다. 고용연장과 최저임금 보장이라는 민주노총의 강수(强手)에 주민은 계약파기로 맞섰다. 경비원은 최저임금 이하의 월급에 혼신의 힘을 쏟지 않고, 주민은 월 2만원 추가부담을 아끼려 해고를 불사한다. 이 경우 시민성은 증발한다. 한편 전기요금 아껴서 경비원 월급을 올려주는 아파트가 강북에 생겼다. 부자 동네에서 일어난 저 치졸한 장면은 ‘국민’으로만 살아온 탓이다. 국가 명분에 수직적으로 동원된 원자화된 개체인 국민은 수평적 관계에는 한없이 미숙한 존재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자제와 양보, 이것이 시민성이다.
이 해가 가기 전에 다시 묻고 싶은 게 있다. 세월호 참사 말이다. 일부 시민들은 넌더리를 낼 것이다. 세월호 관련법이 통과되었고 진상규명도 진행된 마당에 ‘그냥 지켜보라’는 호통이 들리는 듯도 하다. 그런데 묻고 싶다.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청해진해운에 철퇴를 내리고, 관련 공무원들을 일벌백계하는 국가의 감시와 처벌을 그냥 구경하면 되는가? 신설된 국가재난처가 획기적 조직 원리를 도입해도 구조 기능의 민영화에 잠재된 공공성의 소멸을 방지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한 고통, 우리도 공범일 수 있다는 죄의식은 저무는 이 해와 함께 묻어야 하나? 각성하던 시민들을 다시 ‘국민’으로 귀속시켰던 것은 ‘국가개조!’라는 저 강력한 발언이었다. 자성의 물결에서 사회개혁의 단초를 발견하려던 시민들은 결국 민생과 색깔 프레임 속으로 빨려 들어 자유롭지만 무기력한 국민이 되었다. ‘국가개조’로 수직적 그물망을 다시 꿰맬 수 있겠지만 실밥이 아예 터져 있던 수평적 그물망, 그 허약한 시민성은 어찌할 것인가? 사태해결의 책임과 권리가 국가에 양도된 지금 시민은 그냥 관객이다. 국가가 법의 칼날로 참사의 원인과 과정을 토막 낼 때 법치의 원천인 시민성 배양의 기반도 동시에 토막 날 것이다. 우리는 아직 국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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