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8697.html
2014년 12월 11일, 한겨레, 한승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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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가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한반도를 유린한 역사적 사실을 형상화한 그림. 일제는 자신들 멋대로 조선을 개조하면서 비열한 수법으로 문명(일본)과 야만(조선)의 이미지를 창조하고 대비했다. 식민지배의 결과는 진정한 근대화의 실패였다. 돌베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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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 지배 따른 근대화 실패 탓
과학혁명, 우리 시각으로 다시 봐야
뉴턴의 무정한 세계
정인경 지음
돌베개·1만4000원
“제대로 된 의미에서 근대화가 늦어지고 어쩌면 거의 불가능해진 것이 식민지에서 기인했는데 그걸 거꾸로 식민지가 근대화를 촉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글쎄요,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마도 친일이 친미로 이어지면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대를 이어가며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근대화란 무엇인지, 개발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지 정확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자연과학의 의미부터 완전히 오도하고 왜곡하고 있어요.”
한국의 문화적 토양에서 ‘과학기술 하기’, 과학기술과 우리의 삶의 연결 문제를 고민하며 대중과학서를 써 온 정인경씨의 <뉴턴의 무정한 세계> 제4장 ‘아인슈타인의 휘어진 시공간’ 말미에 나오는 구절이다. 최무영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의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에서 인용한 것이다. 정씨의 문제의식을 대변하고 있다고 느꼈다. 고려대 수학과를 나와 최 교수가 겸임한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한국과학사를 전공한 정씨의 생각도 최 교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뉴턴의 무정한 세계>가 과학분야에서의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아니다. 이 책 중심 내용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를 거쳐 뉴턴에서 완성되는 고전물리학, 다윈의 진화론 충격으로 대표되는 근대 생물학, 맥스웰의 전자기역학 등을 거쳐 에디슨, 니콜라 테슬라가 꽃피운 전기기술,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과 이후 양자물리학의 등장 등 인류의 세계인식 지평과 차원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린 근대 ‘과학혁명’ 핵심 사건들에 대한 역사다. 이 책은 그것을 사실 나열식이 아니라 독자적 시각으로 시대배경을 살펴가며 종합적으로, 그리고 매우 쉽고 명료하게 서술한다.
하지만 이런 점만으로 다른 과학사 책들과의 차별성을 주장할 순 없을 것이다. 지은이는 과학에도 주인이 있다고 한 미국 철학자 샌드라 하딩의 얘기를 빌려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배워 온 그 과학이 과연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근대 과학혁명은 서양인에겐 ‘우리 이야기’지만 정작 우리에겐 남의 얘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과학을 배우는가? 왜 뉴턴과 다윈을 알아야 하는가? 뉴턴과 다윈이 한국 근대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동안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을 해본 적이 없다. 결국 과학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지금까지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 우리의 관점에서 서양 과학사를 다시 살펴보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왜 과학을 공부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그래서 이 책은 구성부터가 독특하다. 세계가 무정한 기계와 같이 자연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입증함으로써 신이나 초월자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고 믿었던 기존 세계를 끝장내버린 뉴턴 혁명을 다룬 제1장 ‘뉴턴의 무정한 세계’는 근대 과학의 충격 속에 “우리는 과연 무식하다”를 되뇌며 자괴하는 이광수의 <무정> 얘기로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제2장 ‘다윈의 잔인한 표본실’은 처참한 식민지 현실 속에 강박증세에 시달린 지식인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제3장 ‘에디슨의 빛과 그림자’는 전차를 타고 다니며 하릴없이 식민지 경성 구석구석을 살피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제4장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동시대의 유카와 히데키를 능가했을 법한 두뇌의 소유자였으나 차별과 좌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요절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의 <날개>로 시작한다.
이는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라 주장하는 ‘과학주의’의 함정을 피해가기 위한, 그리고 분노라는 감정을 배제하고는 제대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행동도 할 수 없다고 지은이가 생각하는 지금의 불평등한 세계와 우리 현실 문제를 직시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장치다. 지은이는 “과학도 감정적으로 느끼지 않고 무엇인가를 배울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해방 전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물리학 학사 자격을 취득한 조선사람은 22명, 그중에서 학술지에 연구논문을 발표한 물리학자는 단 4명뿐이었다. 반면 1945년까지 일본 제국대학 물리학과를 나온 졸업생은 1477명이었고, 1946년에 일본물리학회 창립 때 등록 회원수는 2293명이었다. 일제는 의도적으로 조선사람들에게 고등교육을 시키지 않고 일본인의 명령을 받는 면서기 정도의 식민지 하급관리를 양성하는 차별정책을 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윈의 진화론마저 당시 조선과 중국에는 약육강식, 우승열패를 정당화하고 종국적으로는 열강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형태로 도입됐다.
“근대화가 늦어지고 어쩌면 거의 불가능해진 것이 식민지에서 기인했다”는 최무영 교수의 지적은 이런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상황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별로 바뀐 게 없다. 왜 일본에선 노벨상 수상자들이 줄을 잇는데 우리에겐 없는가라고 탄식하기 전에 먼저 과거 역사를 포함한 사태 전체를 우리의 시각에서 주체적으로 다시 보는 작업부터 하자고 정씨는 얘기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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