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9일, 시사인, 임지영 기자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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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중 한 명을 잃으면서 ‘죽음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내 삶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온전히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담금질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EBS <다큐 프라임> ‘데스(Death)’ 3부작을 만든 김미안 작가의 경험담이다. 모두 죽음을 알지만 ‘나’와 관련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몇 해 전 암으로 어머니를 여읜 40대 김여란씨는 말기 암이라는 선고를 받고도 어머니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치료와 관리를 잘 받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현실감각이 없었던 거다.” 환자 본인에게도 뒤늦게 알렸다. 애써 죽음을 부정하는 동안 임종 준비할 시간을 잃었다. 임박해서야 이별을 실감했다. 죽음은 도처에 있다. 특히 올 한 해는 세월호 참사,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 등 갑작스러운 사건·사고가 많았다. 데뷔 시절부터 꾸준히 대중의 관심을 받던 스타들도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기척 없는 동료의 죽음도 갑작스러웠다. 30대 직장인 김나경씨는 “큰 사고가 유난히 많은 한 해였기 때문에 저절로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다. 젊다고 비켜가지는 않더라.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과 그 이후에 대해 생각하는 밤이 늘었다”라고 말했다. 죽음에 대처하는 자세. 김씨뿐만 아니라 지금을 사는 모든 이의 고민이다. 최근 방영된 EBS <다큐 프라임> ‘데스’는 과학계는 물론 철학·심리학·종교학 등 다양한 분야가 말하는 죽음의 실체에 대해 살핀다. 각계 전문가들이 정의하는 죽음은 삶의 끝, 부재, 경험의 끝, 심장정지 등 각각 다르다. 인간에게 죽음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다. 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문명의 시발점이라고 말했다.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문명을 일으켰다. 문화를 통해 영속과 불멸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앤드루 실케 영국 동런던 대학 범죄학과 교수는 공포관리 이론으로 죽음을 설명한다. 그는 죽음에 직면하면 속한 집단이 무조건 옳다고 여기는 내집단(內集團) 편향성이 가장 먼저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현재 자신이 어느 쪽에 있든지 반대 방향의 사람을 밀어낸다. 세월호 사건에 적용하면 이렇다. “내집단의 경우 그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중심으로 뭉치게 된다. 가족이나 아이들의 가치는 더욱 중요해지고 위상도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내집단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경멸받을 것이다.” <다큐 프라임> ‘데스’ 제작진은 짧은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대상자들은 지하철역을 나서면서 죽음과 관련된 긍정적인 문구의 포스터를 보게 된다. 역 앞에는 기부 캠페인이 진행 중이다. 6시간 동안 진행된 캠페인의 모금액은 42만원이었다. 보통 약 10만원이던 데서 4배 늘었다. 죽음에 대한 긍정 이미지가 기부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후의 실험에서도 죽음을 연상할 때 이타적인 행동이 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삶을 좀 더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는 죽음이란 주제를 ‘소프트’하게, 부정적이지 않게 접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미국에서도 1960년대 죽음 교육이 성교육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미네소타 대학에서 죽음에 관한 최초의 강좌가 개설됐다. ‘죽음학’이다. 1970년대에는 600개 넘는 죽음학 강의가 생겼고 5년 뒤에는 배로 뛰었다. 어떤 대학은 죽음·임종·사별과 관련된 학위나 자격증을 따는 과정을 두고 있다. 얼마 전 국내에 출간된 <죽음학 수업>은 미국 킨 대학의 노마 보위 교수가 진행하는 수업 ‘긴 안목으로 보는 죽음’을 다루고 있다. 보위 교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묘지를 찾는다. 사람이 죽을 때 육신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보라는 의미에서다. 부검
우리도 ‘웰다잉 지도사 자격증’ 과정이 생기는 등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하지만 죽음의 질 지수는 OECD 34개 나라 가운데 최하위다. 죽음이 면전에 닥칠 때까지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게 아직까지는 자연스럽다. 임종 의료 전문가인 윤영호 서울대 의대 연구부학장은 우리가 복지국가를 말하지만 정작 죽음 앞에 놓인 삶의 질에 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죽음을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돌봄의 대상으로 여겨 무의미한 고통 연장을 줄이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방송인 노홍철이 관에 들어가는 체험을 하면서 한동안 임종 체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임종 체험은 영정 사진을 찍고 유서나 유언을 남긴 뒤 수의를 입고 관에 들어가보는 프로그램이다. 유언장을 써놓는 일은 나이가 따로 없다 12월에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목숨>의 이창제 감독은 1년 동안 호스피스 병동에서 만난 이들을 촬영했다. 남은 시간 평균 21일, 삶의 끝에서 이별을 준비하는 이들은 하루하루가 곡진하다. 이 감독 역시 가까운 이의 부고를 접하고 영화 촬영을 결심했다. “가까운 분들이 한 달 차이를 두고 갔는데, 죽음이란 게 내 멱살을 잡고 끌고 온다고 할까. 이야기를 하라고 숙제를 하라고, 그렇게 강하게 왔다.” 그는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죽음을 체험시키고 싶었다. “그런 체험들을 왜 하냐면 잘살기 위해서다. 삶의 끝에 가서 찾는 의미들이 진짜 의미 있는 게 아닐까. 삶의 마지막에 가서 후회하는 것과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우리 삶의 가치로 매겨져야 되지 않을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건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들만이 아니다. 정현채 서울대 의대 교수는 <죽음을 원할 자유>(케이티 버틀러 지음) 추천사에서 죽음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분위기를 우려한다. ‘심각한 질병이나 죽음은 우리 삶에서 언제라도 마주칠 수 있기 때문에 젊고 건강할 때 죽음에 대해 제대로 사유해야 한다. 자신이 큰 병에 걸렸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불치병으로 죽음의 순간이 필연적으로 닥쳤을 때 심폐소생술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러한 자신의 의사를 밝힌 사전 의료의향서를 작성하거나 유언장을 써놓는 일은 나이가 따로 필요 없다.’ <죽음에 관하여>라는 네이버 웹툰이 있다. 저승에 가기 전 들르는 곳에서 신이 갓 죽은 이들을 맞이한다. 그는 말한다. “두려울 수 있어. 생각조차 하기 싫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죽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건 현실이란 거야. 부정, 긍정을 떠나 그냥 있다는 사실 말야. 항상 곁에 있어. (중략) 그냥 알고만 있으면 돼. 그것만으로 변할 거야.” 김영하 작가 역시 최근 낸 에세이집 <보다>에서 말했다. ‘죽음과 종말을 떠올리면 현재의 삶이 더 진하고 달콤해진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파국을 상상해보는 것은 지금의 삶을 더 각별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카르페 디엠이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와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은 그렇게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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