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을 벌하고 예비범죄자로 낙인하여 구금하는 굴곡진 시대를, 자연과 대화하며 노닐다 간 사람. 이처럼 역설적인 인생이 또 있을까요. ‘우익’ 선생은 평생 ‘좌익’ 사상으로 인해 몸은 자유롭지 못했으나 영혼만은 온전히 자유로웠던 사람입니다.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상서로운 구름이 흐르는 마을)에는 490여년간 마을을 지켜온 옥천 전씨 집성촌 귀내(龜川)마을이 있습니다. 야옹(野翁) 전응방부터 후손 전우익에 이르는 곧은 반가의 법도가 남아 있는 마을입니다. 흘러간 시간만큼 쇠락한 기와집들이 마을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곳. 이 봄, 산수유 꽃향기에 이끌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외가 식구들과 함께 갑작스런 여행을 떠났습니다.
전응방 그리고 전우익
곧고 바른 반가의 법도를 배운 이들이 일제 앞에 순응할 리 없었겠지요. 마을 앞 냇가에 이르자, 외숙부가 마을의 역사와 돌거북 얘기를 꺼냅니다. 마을의 정신을 지키는 상징물 돌거북은 조선 정신의 맥을 끊어버려야 한다며 일본 순사들이 폭파해 버렸기에 지금은 없습니다. 배워야만 이길 수 있다고, 마을에서만 일본 명문대학으로 유학한 청년이 대여섯 명이었고, 신학문을 배우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청년들의 배움이 깊어질수록 저항도 거세어져 일제는 마을 이름을 귀내(龜川·거북의 등처럼 생긴 바위가 냇가에 있는 마을)에서 구천(九川)이라는 의미 없는 이름으로 바꾸어 버렸다지요. 일제의 노력이 집요한 만큼 지키려는 정신도 집요했습니다. 총명한 청년들은 일제를 거쳐 6·25전쟁을 겪는 동안 감옥으로, 북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 마을에 유난히 청상과부와 유복자가 많은 이유입니다.
무실댁과 이안댁이 살던 기와집 앞을 지날 때에는 가족들의 눈가가 붉어집니다. 무실댁과 이안댁의 남편은 전우익 선생과 함께 서울상대 전신인 경성상업전문학교에서 공부한 지식인이었지요. 그들은 자손을 남기지도 않고 갓 시집온 색시만 남겨둔 채 월북했습니다. 수절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무실댁과 이안댁은 시부모를 봉양하며 귀내에서 평생을 살다가 저승길에 올랐습니다. 가족들이 두 어른의 절개를 칭송할 때, 저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않은 답답한 여인들이라며 탄식했습니다. 그 시절 여인들은 그런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는 어머니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갓 스물 여인들에게 강요된 운명은 너무나 잔혹해서 끝내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곧고 바른 반가의 법도는 야옹정(野翁亭)에서 시작됩니다. 마을 서쪽에 자리 잡은 야옹정은 종갓집과 함께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야옹 전응방(1493~1556)은 중종 때 진사(進士)에 급제했지만, 조부 전희철의 뜻에 따라 벼슬을 하지 않고 이곳 귀내마을에서 학문을 닦으며 야인으로 지냈습니다. 전희철은 문종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상장군(上將軍)에 이르지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추악함을 목도한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합니다. 임종할 때에도 자손들에게 관직을 탐하지 말고 매년 영월 단종의 묘소에 참배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조부의 뜻을 받든 전응방은 야옹정을 짓고 퇴계 이황 선생과 벗이 되어 학문을 닦았습니다. 야옹정 현판에 새겨진 이황 선생의 글씨는 지금도 선명합니다. 야옹정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글을 배울 수 있는 배움의 요람이었습니다.
귀내마을이 대중에게 알려진 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쓴 전우익 선생에 이르러서입니다. 권세와 부귀를 천하게 여기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사는 가문의 법도는 후손에 이르러 더욱 향기롭게 피어났습니다. 우익 선생 생가 담벼락에 만개한 산수유 꽃처럼 말이지요. 야옹정 바로 우편에 있는 우익 선생 생가에 다다르니, 사랑마루 앞 산수유 꽃 활짝 피고, 축 밑엔 제비꽃과 민들레가 피어 우리를 반깁니다.
사상을 벌하고 예비범죄자로 낙인하여 구금하는 굴곡진 시대를, 자연과 대화하며 노닐다 간 사람. 이처럼 역설적인 인생이 또 있을까요. ‘우익’ 선생은 평생 ‘좌익’ 사상으로 인해 몸은 자유롭지 못했으나 영혼만은 온전히 자유로웠던 사람입니다. 기억하는 우리들이 살아 있는 한 죽지 않는, 불멸의 전우익 선생과 끝나지 않는 대화를 시작하려 합니다.
전우익을 추억하는 사람들
우익 선생의 뒷집이 우리 외가입니다. 그 집에서 유년기를 보낸 어머니는 우익 선생의 대궐 같은 기와집과 집안의 내력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하셨지요. 춘향목이라 불리는 금강송으로 지은 기와집은 귀내마을 대지주의 자손 우익 선생이 평생을 살다 간 집입니다. 지금은 장남 전용구씨(64)가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익 선생 가문의 땅을 밟지 않고는 귀내마을을 거닐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땅을 소유하였지만, 구한말 토지개혁 때 땅은 소작농들에게 돌아갔습니다. 남은 토지는 청년운동을 하는 동안 활동비로 쓰였구요. 우익 선생 부친인 전영기 선생이 월북한 후 자손들은 가난과 벗하며 살았습니다.
딸의 기억 속 아버지는 어두운 시간에는 오로지 책을 읽고, 해가 있는 시간에는 밭을 매고, 부들로 자리를 매고, 나무를 가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운동권 학생들과 문인, 종교인들에게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던 집. 가난한 이웃들이 무엇이든 빌리러 왕래하던 집. 자손들이 물려받은 유일한 재산은 아버지의 맑고 곧은 정신입니다. 이번 여행에는 우익 선생의 장녀인 전우경씨(55)가 함께하며 고인을 추억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낙으로 사셨던 분 같아요.
“우리 집 대문은 늘 열려 있어. 탈곡기가 우리 집에만 있었는데, 우리 일을 미루더라도 이웃들에게 먼저 빌려줬어. 그런데 낫, 호미는 안 빌려줘. 그건 돈 없어서 못 사는 게 아니라 게을러서 준비를 못한 것이라고. 현명한 분이시지.”
본인은 일류대학 나오신 분이 6남매의 공부에는 관심이 없으셨어요. 막내 빼고는 대학 공부를 한 분이 없잖아요.
“막내도 입대 전에 잠깐 대학을 다녔을 뿐인 걸.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이 쓸모없다, 머리에 지식만 차면 역사를 왜곡하고 민중을 괴롭히는 괴물이 되는 거다, 그러니 좋은 책을 많이 읽어라 하셨지. 돈과 명예에 연연하며 째째하게 살지 말고 멋있게 살자고 강조하셨어. 문인들, 신부님들, 스님들… 그분들과 밤새 촛불 켜놓고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자랐지.”
6남매가 결혼할 때 100만원씩 주셨다구요.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책인데, 받은 인세가 많을 텐데요.
“65세인 큰오빠부터 막내까지 똑같이 100만원을 주셨지. 막내 장가갈 때는 그 돈으로 예복을 사기도 힘들었어.(웃음) 책 인세도 대부분 사랑의 재단에 기부하신 걸. 자식들 빚 갚는 데 쓰였다는 말도 있는데, 아니야. 돈은 쓰면 없어지잖아? 돈 물려받은 거보다 어떤 어려움도 다 이겨낼 수 있는 정신을 물려주신 게 감사해.”
가족만 아는 인간 전우익의 모습이 궁금해요.
“난 아주 부잣집에 시집을 갔어. 돈에 관심 없는 아버지 때문에 평생 고생한 엄마를 보며 부잣집에 시집 가리라 결심했었지. 그런데 남편이 사기를 당해서 사업이 부도가 나고 교도소에 가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매일 새벽 전화를 걸어오셨어. ‘안녕하세요, 멋진 우리 딸 맞나요? 지금 정말 좋은 인생 경험을 하는 거 아시죠? 남편에게 잘하세요. 오늘 내가 읽은 책에 좋은 구절이 나와요. 읽어드릴까요?’ 이런 대화를 매일 주고받았어. 고난을 이겨내는 힘을 유산으로 주신 것 같아. 형편 어려운 딸을 만나러 오실 때에도 배낭 가득 책을 선물로 사오셨어. 지인들이 결혼을 할 때 축의금도 책으로 내셨으니까.(웃음) ‘아버지, 선물을 하려면 돈과 쌀을 주세요. 이게 뭐예요?’ 농담으로 따지고 들면, 대꾸도 안 하셔.”
좋은 책이 돈보다 가치 있다고 강조하셨죠. 어린 시절, 자식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요.
“나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경찰의 관리를 받는 줄 알았어.(웃음) 이웃 마을 안동에 가실 때도 안동보다 먼 봉화 경찰서에 가서 허락을 받아야 했고, 매일 경찰관이 아버지가 집에 계신지 감시하러 왔어. 경찰관이 집에 오면 밥 먹고 가라고 붙잡고, 농사 지은 것도 나누어주고…. 둘이 친했어.(웃음)”
사람을 아끼고 좋아한 분이셨던 것 같아요. 2003년에 처음 쓰러지셨을 때,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당한 게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요.“그건 아니야. 뇌경색이었지. 밤에 마실 다녀와서 약병을 손에 쥔 채 쓰러지신 건데, 정신을 차려보려고 자신의 손을 물었던 흔적, 전화기를 잡고 전화를 해보려 애쓴 흔적이 있었어. 다음날 아침에야 발견되어 병원에서 8개월, 집에서 9개월을 보내셨지. 마지막엔 치매가 왔지만, 어린아이가 된 아버지는 많은 웃음을 주고 가셨어.”
손녀 언년이를 유난히 예뻐하셨어요. 서울 오실 때도 업고 오시고.
“언년이가 못생겼잖아.(웃음) 다들 못났다 하니까 더 귀하게 대하셨지. 어린아이가 바른 소리를 잘했어. 누구든 바른 소리 하는 사람을 좋아하셨잖아.”
그러고 보니 저도 못나서 예뻐하셨나봐요. 아무나 안 주시는 소나무 받침대를 제겐 세 개나 주셨어요.(웃음)
“나무에는 깨끗한 영이 있다고, 필통을 깎고 받침대로 잘라서 나눠주는 게 낙이셨지. 부들로 맨 자리를 등에 매고 서울 지인들에게 선물하러 가면, 초라한 행색을 보고 걸인인 줄 알고 빌딩 수위들이 내쫓고 그랬어.(웃음)”
거기도 산수유 꽃, 피었나요?
할아버지, 사월 귀내마을엔 산수유 꽃향기 가득합니다. 거기도 산수유 피었나요? 권정생 선생님, 이오덕 선생님과 더불어 생각을 벌하지 않는 그곳에서 봄날을 즐기고 계시지요? 대학 시절, 도무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 귀내마을로 찾아갔을 때, 군불에 된장 끓여 주시며 밤을 지새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지요. 동서양 철학자 이야기,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서 시작하여 노신, 도연명, 곡식, 산수유 이야기까지… 춘향목 향기가 깃든 기와집 사랑채는 제게 작은 우주와 같았습니다.
노신과 도연명의 글을 읽으라 하셨는데, 15년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실천을 못하고 있어요. 마흔이 되면 김용준의 ‘근원수필’ 같은 글을 쓰는 이가 되라 하셨는데, 지식만 쌓고 공부가 부족한 저는 그런 글을 쓸 자신이 없어서 부끄럽습니다. 언젠가 도연명 평전을 쓰고 싶다며 준비한 자료를 많이 보여주셨는데, 이루지 못하고 가신 게 아쉽습니다.
‘농사를 짓는 일은 풀을 뽑는 일이기도 하다. 잘못된 역사의 잡초를 뽑아주지 않으면 곡식이 오그라지고 녹아 버린다. 그러나 곡식이 자리 잡고 제대로 크면 잡초가 맥을 추지 못한다. 세상을 바로잡는 근본인 민중이 곡식처럼 잘 자라야 하는데, 민중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 편을 들어왔다. 나라를 이렇게 만든 근본적 책임은 민중이 져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다. 자신의 허망한 욕심을 뿌리치고 땅바닥을 단단히 딛고 일어서라.’
거듭 강조하시는 말씀을 노트에 적은 다음, 청년들은 어떤 꿈을 꾸고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여쭈었지요. 그때 주신 말씀은 제 가슴에 깊이 새겼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논의를 하려 들지 마라. 그걸 짊어지느라 사람은 지친다. 많은 이들이 가슴에 심어 키울 수 있는 작은 씨앗 같은 이론이어야 사람들 사이에 싹을 틔운다. 너의 인격과 삶이 다른 사람에게 씨 뿌려져 싹을 틔우도록 해라. 너의 착한 마음을 잘 지켜서 못된 놈들을 살찌우는 먹이가 되지 않도록 너를 잘 지켜라.’
실천하지 못하는 마음은 늘 어지러워서, 그럴 때마다 나이테 한 줄 한 줄에 깃들어 있는 나무의 맑은 영과 대화하라고 주신 나무토막을 오래도록 어루만지며 할아버지 말씀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2015년, 이 땅엔 곡식이 타들어 갑니다. 잡초를 뽑아내지 못하고 땅바닥을 단단히 딛고 일어서지 못한 민중들에 대한 꾸지람 같습니다. 그곳의 봄은 어떤가요?
*마을 역사 자문: 전봉욱(55·옥천 전씨 42세손)
<박상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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