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화장>의 임권택 감독이 31일 오후 서울 사간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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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작가 유치진의 <자매>(1955)엔 한국전쟁 발발 무렵 부산 국제시장 부근을 배경으로 한 인간 군상들의 처절함이 담겨있다. 오로지 생존이 우선 가치였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은 최근 영화 <국제시장>(2015)에 일부나마 담겨 관객에게 전해지기도 했다.
올해로 팔순을 맞은 임권택 감독은 그 시대를 온 몸으로 버텨낸 인물이다. 1962년 장편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발표하기까지 임권택 감독은 그저 국제시장 부근에서 군화를 떼다가 팔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청년이었다. "몸이 하도 약해 만날 나자빠졌어. 그 와중에 영화를 만난 건 운이었지"라고 임권택 감독이 웃으며 잠시 회상에 빠졌다.
그런데 이 모든 게 그저 운일 뿐일까. 정식 개봉을 앞둔 <화장>(9일 개봉)까지 포함하면 장편 영화만 102편이다. 관객 반응은 부침이 있었지만 그가 한 길을 계속 걸었던 건 분명 한국 영화사에선 상징적인 일이다.
이번 작품으로 임권택 감독은 배우 안성기와 김호정, 김유리를 내세워 인간의 욕망에 천착하고자 했다. 지난달 31일 만난 임 감독은 "관객들 반응이 참 궁금하다. 젊을 때는 이런저런 생각을 막 담다가도 이 나이가 되니 아무래도 거짓된 삶을 담을 수 없어 더 염려가 많아진다"며 내심 걱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관록의 노장도 관객 앞에선 여전히 아이 같을 뿐이었다.
사실주의에 대한 애착...그래서 안성기-김호정 필요했다
알려진 대로 <화장>은 소설가 김훈의 동명 작품을 원작으로 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연출한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임권택 감독은 보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간 언급됐던 '임권택 영화 같다'는 틀을 깨고 싶었다". 이 한 마디가 <화장>을 만들게 한 동기였다. "김훈 작가의 짧고도 힘찬 문장을 영상으로 옮기는 게 힘들어, 제작 초반에는 마치 수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던 임 감독의 설명에서도 새삼 그의 고민 지점을 읽을 수 있었다.
"100여 편을 해오면서 그간 우리 문화를 담는다거나 수난사와 연관된 고단한 사람들을 담아왔다. 작품을 열심히 찍은 건 사실이지만 속으론 내 틀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다.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자문하면 또 막연했다. 마침 명필름(<화장>의 제작사)에서 소설을 영화화 하겠다고 해서 봤더니 틀에서 도망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김훈 선생 소설이 일종의 관념 세계일 수도 있는데 그 안엔 현실의 역동성이 강하게 담겨 있다. 문장의 힘에서 벗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사실감을 심자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주인공 오상무(안성기 분)는 욕망의 상상을 안고 현실을 사는 사람인데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 상상과 현실을 대비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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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병을 앓는 아내(김호정 분)와 그를 극진히 간호하는 오상무. 그리고 그 앞에 나타난 젊은 여직원 추은주(김규리 분)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화장>을 채우는 주요 이야기다. 거칠게 보면 흔한 불륜 로맨스로 보일 수 있는 사건을 임권택 감독은 인물 내면에 세밀하게 집중했다.
"그래서 오상무 역이 중요했지. 병상 생활을 하는 부인을 두고 딴 감정을 품는 게 혐오스럽게 보이지 않아야 해서 안성기라는 연기자가 필요했다"고 임권택 감독이 설명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은 증발했지만 부부로서 오랜 시간을 지켜온 일종의 '이지적 선행'을 행하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취화선>(2002) 이후 안성기와의 재회가 성사됐다.
"사실 김호정씨는 지금껏 만난 적 없는 배우였다. 명필름이 천거했지. 병으로 얼굴과 몸이 망가졌지만 젊었을 땐 예뻤겠다고 상상될 만한 모습을 원했는데 제격이었다. 예전에 <만다라>(1981) 때 갈비뼈가 두드러지게 보여야 한다며 안성기와 전무송이 굶어가며 연기했는데 김호정은 더 하더라. 그 많은 날을 굶고 채소만 조금 먹나 싶었다. 이 여자가 사고를 내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아내가 죽는 장면에선 원래 마른 인형을 놓고 쓰려했는데 김호정을 그대로 눕히고 썼을 정도였다."
영화 끊으면 금단현상 느껴..."부족했지만 베껴먹기 영화는 할 수 없었다"
감기로 많이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영화와 배우 이야기에 임권택 감독은 수 십 분을 쉬지 않고 답변했다. 짧으면 1년, 길어도 4년 간격으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힘은 영화에 대한 그만의 열정이 그만큼 강했기에 가능해 보였다. 이 말에 임권택 감독은 "근데 이 정도면 영화 찍는 게 관성이 된다. 조금이라도 놀고 있으면 큰일이라도 난듯 초조해졌다"고 말했다.
"만날 하는 소린데 운이 좋은 거라고 한다. 어렸을 때 무슨 인연이 됐는지 영화를 시작한 거 말이다. 배운 것도 없고, 우리 집안이 좌익운동을 하다 뿔뿔이 흩어졌기에 안정적인 취직을 할 수도 없었다. 장사 수완도 부족해서 군화를 팔고난 후엔 참 막막했는데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간 장사꾼들이 영화 제작을 하니 심부름 좀 하라고 했다. 그때가 <장화 홍련>을 찍을 때였다. 제작부 밑에서 배우들 화장품 상자 날라 주고, 조명도 잡고, 밥도 시켜주고 그랬지. 일 하다 보니 재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임권택 너는 영화를 해야 한다'고 보낸 거 같다."
그의 말대로 천명이었던 게 아닐까. 연출 데뷔 이후 약 10년간 임권택 감독 필모그라피의 절반이 채워졌다. 1962년부터 1972년 <명동 잔혹사>까지 50편의 작품을 발표했던 것. 예전 인터뷰에서 임권택 감독은 "초기작 50편은 지금 봐도 너무 부끄러워 외면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질문을 다시 꺼내니 그가 웃는다. "수정할 기회를 누가 준다고 해도 싫다. 그때 영화들은 지금의 삶과는 무관한 액션오락영화들인데 최선을 다해 찍은 거다"라며 임 감독은 "허구세계를 뭐 그리 열심히 찍었는지... 다시 그 고통의 세월로 돌아가는 게 싫다"라고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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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의 진짜 영화 인생은 그 이후가 될 것이다. 물론 <장군의 아들>(1990) 시리즈 같은 작품은 흥행과 별도로 평단의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꾸준하게 그는 사실주의에 천착했다. 요즘의 여러 감독들이 장르를 달리하며 변신을 꾀하는 것과 비교될만한 지점이다.
"그 많은 작품을 찍을 수 있는 비결? 당시 나온 대중소설을 싸그리 다 읽었다. 삼국지, 수호지도 외워 다녔지.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노동자 모임 등에 가서 얘기해 주곤 했다. 그들이 재밌어 하는 모습에 신이 나더라. 수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양심을 걸고 표절한 작품은 없다.
그때 아마 시나리오와 촬영 임기응변을 대부분 배웠던 거 같다. 부끄러운 초기작이지만 돌이켜 보면 치열하게 찍었다. 언젠가 TV에서 1960년대 영화가 나오더라. 아주 유치하고 형편없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찍은 영화였다(웃음).
기본적으로 내가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땐 모든 게 미국영화 베껴먹기였다. 미국서 살다온 사람도 아닌데 한국에서 미국 흉내 내는 걸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지. 영화는 삶을 정직하게 담아내는 것인데 그렇게 보면 공상 과학 영화 이런 건 지금도 못 찍는다. 소질도 부족하다. 그나마 <화장>이 관객에게 설득력을 얻는다면 내겐 성공이다."
인터뷰 말미 임권택 감독은 쉼에 대해 얘기했다. "<화장> 이후엔 조금 쉴 생각을 하고 있다. 감기에 걸려도 3일 이면 나았는데 한 달 동안 아픈 걸 보니..." 말끝을 흐리면서도 그는 한국 영화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상업주의 흐름에서 세월이 지나도 오래 남을 수 있는 영화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 영화를 생각하는 그의 진짜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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