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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을수록 가난해지는 나라…2명 중 1명 빈곤층
등록 : 2015.01.13 20:12수정 : 2015.01.1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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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일자리 찾기 ‘하늘의 별따기’
만 65살 이상 노인 빈곤율 48.1%
OECD 평균 11%보다 훨씬 높아
중·장년→노년 갈수록 빈곤율 치솟아
노인 일자리 부족이 가장 큰 원인
정부 추진 사업도 월 20만원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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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인빈곤율은 50%에 육박한다. 정부는 노인의 사회참여 기회 확대와 빈곤율 완화를 위해 각종 노인 일자리 사업을 시행 중인데, 낮은 임금과 일자리 부족 등의 문제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한 노인이 폐지를 모아 고물상으로 나르고 있는 모습.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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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노인이 가난한 나라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수준이다. 통계청이 지난해 9월에 낸 ‘2014년 고령자 통계’를 보면, 노인빈곤율은 48.1%에 이른다. 만 65살 이상 노인 둘 가운데 한 명은 빈곤층이라는 이야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나라들의 평균치(11% 안팎)를 고려하면, 아무리 ‘노인빈곤율 1위국’이라고는 하지만 50%에 육박하는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국 다음으로 노인이 가난한 나라는 오스트레일리아로 30.2%였다. 노인복지제도가 탄탄한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의 노인빈곤율은 각각 1.5%, 2.8%다.
노인빈곤율을 생애주기별로 살피면 문제의 원인이 좀더 뚜렷해진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해 10월 ‘고령화에 따른 노년부양 부담과 시사점’ 연구보고서에서 오이시디의 2012년 통계 등을 토대로 한국의 평균 빈곤율은 41~50살 8.9%, 51~65살 17.3%, 66~75살 45.6%라고 밝혔다. 오이시디 국가의 연령대별 빈곤율은 우리와 사뭇 달랐다.(41~50살 9.5%, 51~65살 9.9%, 66~75살 11%)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의 빈곤율은 중년에서 장년으로, 그리고 다시 노년으로 넘어가면서 급격히 치솟는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보고서는 “한국의 경우 50대 이전에는 안정적인 소득에 기반하여 중산층의 삶을 살지만, 50대 이후 고용안정성이 떨어지고 노후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여 취약계층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짚었다. 또 “특히 50대 이상이 은퇴 뒤 생계형 창업을 시작하지만 자영업 동종업종의 과다경쟁 속에서 살아남지 못해 폐업 및 실패를 경험하는 현상이 있다”고 덧붙였다.
나이를 먹어가는 이들한테 한 가지 더 우울한 소식은 고령화 속도다. 유엔이 정한 기준을 보면 65살 이상이 전체 인구의 7% 이상이면 고령화사회,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에 해당하는데, 한국은 이미 2000년 ‘고령화사회’에 진입했다. 이어 3년 뒤인 2018년이 되면 ‘고령사회’ 진입이 확실시된다. 초고령사회 진입 예상 시점도 2026년이라 앞으로 10여년밖에 남지 않았다. 고령화사회에서 고령사회로, 다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 시간이 각각 18년, 8년밖에 안 되는 것도 일본이나 미국, 독일 등 다른 선진국과 비교할 때 가장 빠른 수준이다. 저출산 국가에서 노인 인구가 급격히 많아진다는 건 이들을 부양해야 할 생산가능인구(15~64살)가 비슷한 속도로 감소한다는 뜻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통계청의 인구통계 등을 활용해 ‘실제 1인당(취업자 기준) 노년부양 부담액’을 계산해보니 2000년 12만7000원에서 2013년 20만1000원으로 뛰었다.
가난한 노인은 많아지고 이들을 부양해야 할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의 부담이 많아지는 데 따른 일차적 해법은 노년층의 고용 확대다. 김광석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지난 8일 “노인을 부양하는 세대의 고용을 확대해 부양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노년층 고용률을 끌어올려 노인 인구가 은퇴와 함께 가파르게 빈곤계층으로 전락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좋은’ 노인 일자리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노인빈곤율 상승을 최대한 억누르려고 2004년부터 노인 일자리 사업을 시행 중이지만, 효과가 크지 않다. 가짓수는 많지만 저임금 등 문제로 빈곤 완화에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다는 평가가 많다.
보건복지부가 추진하는 노인 일자리 사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사회공헌형과 시장진입형이다. 먼저 사회공헌형 일자리는 정부가 ‘노인 일자리 예산’으로 참여 노인의 인건비와 경비를 전액 지원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시장진입형 일자리는 정부가 사업비 지원 등을 통해 노인 창업과 이를 통한 노인고용률을 높이자는 취지다.
두 가지 일자리 모두 한계가 있는데, 사회공헌형은 ‘고용’은 안정적이되 낮은 인건비가 걸림돌이다. 이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는 노인은 한달에 20만원의 ‘임금’을 받는다. 이를 연봉으로 따지면 192만~256만원에 불과하다. 시장형은 그나마 고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수입이 없다. 이를테면 쇼핑백 제조업이나 포장업, 식품제조업 등에 참여해 시장에서 얻는 성과만큼 수익으로 가져가라는 게 시장진입형 일자리 사업의 취지인데, 자본력과 기술력 모두 뒤처지는 이들 노인 ‘영세’사업단이 시장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일을 원하는 대다수 노인은 한달에 20만원도 채 얻을 수 없는 시장형보다는 박봉이나마 사회공헌형을 선호한다. ‘월급 20만원짜리 일자리’도 구하기 쉽지 않은 게 노인의 현실인 것이다.
고현종 노년유니온 사무처장은 “시장진입형 일자리 사업을 시행한다며 창업을 위한 시설지원이나, 창업과 관련한 교육 기회의 제공 등 제도적 뒷받침이 없으니 규모가 영세한 어르신들 사업의 성공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며 “노인 일자리 사업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먼저 정부가 이 사업의 취지와 목표를 확실히 정립해야 한다”고 짚었다. 고 사무처장은 또 “특히 시장형 일자리는 가짓수를 늘리기보다 시설지원을 강화하는 등 내실을 좀더 다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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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73606.html
노인과 진보 / 권명아
등록 : 2015.01.1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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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이 넘은 할머니가 일흔 어름의 할머니에게 “한창 좋은 때다”라고 말하는 풍경이 참 먹먹했던 적이 있다. 늙음과 젊음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몇 백 년을 살았는지 가늠하는 게 헛된 고목 아래 앉아 나이듦에 대해 묻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곱씹어본다. 유용하고 무용한 세상의 지식을 많이도 들춰보았지만, 나이 들며 마주하는 낯설고 두려운 질문에 대해 그 지식의 서재에서 답을 찾기는 참으로 어렵다. 세상을 향해 서슬 퍼런 목소리를 내고 조언과 진단을 서슴지 않는 지식인에게도 나이 들며 부딪치는 질문은 그저 홀로 침잠해야 하는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물론 건강에서 재테크까지 나이 들면서 챙겨야 하는 일들을 조언해주는 정보는 넘쳐난다. 그러나 나이듦과 정치라는 두 항을 이어주는 지식이나 담론은 거의 부재하다.
다만 세대 논쟁만이 뜨겁다. 세대 논쟁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와 나이듦에 대해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진보, 혁명, 변화.’ 이런 단어에서 우리는 암암리에 젊음, 청춘을 연상한다. 보수가 ‘늙음’, 오래됨과 자연스레 연결되듯이 진보는 언제나 ‘젊음의 것’이었다. 이는 근대 주체가 형성되어온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그러나 ‘보수=늙음’, ‘진보=젊음’이라는 식의 의미 연결을 넘어서지 않는 한 우리는 정치적 주체에 대해 진부한 세대 논쟁을 넘는 새로운 담론 지형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진보라는 개념 자체가 ‘앞으로 나아간다’(progress)는 의미를 지녔기에, ‘젊음’의 시간성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이론적 입장에 따라 진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데 차이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래된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생태주의나 근대적 개념이 인간 모두를 자유롭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굳이 ‘진보’라는 개념을 선호하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이 있다. ‘진보’라는 개념은 품을 수 있는 주체가 한정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한계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기득권 수구 집단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사유는 때로, 아니 언제나 현실에 뒤진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원래 살던 대로 살 권리’를 요구하는 밀양 할매들의 십년이 넘는 투쟁은 ‘청년 진보’라는 표상을 뒤흔들었다. 또 혐오를 무기로 삼는 청년 우익의 등장은 보수가 더 이상 오래된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뼈아프게 환기시켰다. 그러나 ‘밀양’을 ‘진보정치’의 맥락에서 사유하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듯이, ‘진보정치’의 맥락에서 나이듦을 사유하는 것은 아직은 시작 단계다.
나이듦을 단지 숫자로 환원되는 ‘나아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나이듦은 육체의 나아감을 측량하고 관리하는 기술과 학문의 대상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노화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나아감에 속한다. 그러나 나이듦이란 신체적 상태의 변화와 생각, 정서, 관계 맺음, 삶과 사회에 대한 태도의 변화 역시 함축한다. 이는 단지 노화에 국한되지 않는 존재론적 나아감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나아감이야말로 정치적 사유가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근원적 차원이다.
젊은 세대의 호감을 얻기 위해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입고 청년 문화에 동참하는 진보정치의 노력은 가상하다. 그러나 이런 ‘청춘의 코스프레’는 어쩌면 나이듦에 대한 진보정치의 불안의 표상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이듦이라는 차원을 이론과 실천 속에서 감당하지 못한다면 진보정치는 그 자체의 나아감에도 근원적인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청바지를 벗고,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종편의 괴성으로 상쇄시키고 있는 저 ‘고집불통의 노친네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민중 속으로’ 나아가는 진보정치의 길인지도 모른다.
권명아 동아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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