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별세한 정미경 작가의 단편소설 ‘나의 피투성이 연인’(2004). 교통사고로 죽은 작가 남편의 미발표 원고를 유고집으로 엮어 낼지 고민하는 아내의 이야기다.
정 작가의 남편이자 평생의 문학 동지였던 김병종(65)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에게 지난해 봄 소설의 데칼코마니 같은 상황이 닥쳤다. 서울 방배동 정 작가의 작업실에서 아내의 미발표 장편소설 원고를 찾아냈다. ‘100일을 붉어서’라는 제목이었다. 암 발병 한 달, 입원 사흘 만에 눈을 감은 정 작가가 정리하지 못하고 떠난 원고였다. 완벽주의자였던 정 작가가 원고를 책 더미 속에 던져 둔 건 그 상태로 출간할 생각이 없었다는 뜻일 터였다.
김 교수는 며칠 고민하다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정 작가가 지상에 남긴 마지막 소설 ‘당신의 아주 먼 섬’(문학동네)은 그의 기일(18일)에 맞춰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소설 제목은 김 교수와 출판사가 상의해 바꿨고, 문장은 만지지 않았다. 정 작가 생전에 발표한 근작소설 5편을 묶은 단편집 ‘새벽까지 희미하게’(창비)도 함께 나왔다.
장편소설까지 낸 건 남편의 욕심 아니었을까. 김 교수는 21일 한국일보와 전화통화에서 “부부로 34년을 살면서 정 작가는 내게 한 번도 화내지 않았다”며 “정 작가가 하늘에서 보고 있다면 ‘책이 예쁘게 나왔네. 아빠, 수고했어요’라고 할 것 같다”고 했다. 중견 화가인 김 교수는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이기도 하다. 정 작가는 남편을 ‘최초의 독자이자 마지막 비평가’로 삼아 의지했다. “비평가로서 소설의 완성도만 따졌다면 책으로 내지 말라고 했을 겁니다. 그래도 미완은 미완인 채로 의미가 있을 거예요.”
소설의 무대는 남도의 작은 섬이다. 몇 년 안에 시력을 잃을 거라는 판정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정모와 그의 첫사랑 연수, 제 몸보다 큰 슬픔의 구멍을 지닌, 연수의 딸 이우, 없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에미 가난”을 앓고 사는 언어 장애인 판도, 아들 셋을 바다에 잃은 이삐 할미가 서로를 보듬는 이야기다. 이삐 할미의 음식 맛을 묘사하는 대목에선 ‘감칠맛’의 남도 사투리인 ‘개미’가 자주 나온다. 작품을 읽고 나면 ‘개미 있는’ 소금기가 마음에 남는다. 작가가 남긴 다른 소설들보다 책장이 편하게 넘어간다.
전남 신안군 증도가 소설의 실제 장소다. 정 작가는 5, 6년 전 신안군을 배경 삼은 소설을 써 달라는 당시 신안군수의 요청에 증도를 3번 방문해 스케치했다. 평생 어디든 함께 다녔다는 김 교수가 매번 동행했다. “섬을 둘러보며 ‘여기는 자체로 문학 공간이네’라고 감탄하곤 했어요. 섬의 모습이 소설에 거의 그대로 담겼습니다. 소설 속 ‘소금도서관’은 염전 소금창고를 개조한 ‘소금박물관’이 모델이에요. 소설에 나오는 칠면초, 삘기, 퉁퉁마디, 나문재 같은 염생식물의 이름도 둘이 같이 배우고 외웠죠.” 끝까지 사랑을 잃지 않는 정모는 정 작가의 분신이었을지 모른다. 정 작가는 소설을 쓰는 동안 몸이 쇠약해졌지만, 김 교수와 두 아이, 그리고 잇달아 세상을 뜬 어머니와 오빠를 챙기느라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다고 한다.
“터무니없는 죽음도 악다구니 같은 억센 슬픔의 순간이 지나가면 곧 일상이 돼. 밀물과 썰물을 받아들이듯, 받아들이는 거지. 죽는다는 건 영혼이 우주 저멀리로 날아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정 작가가 만들어낸 소설 속 인물들은 죽음을 끝내 수용한다. 1년 전 “남자 오래 울기 대회가 있다면 결단코 자신 있다”고 했던 김 교수는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였을까. “애달프고 고통스러운 건 여전해요. 정 작가와 나는 문학 동지로 출발해 문학으로 집을 한 채 쌓아 올렸어요. 정 작가는 문학의 순교자처럼 문학의 제단에 삶을 바쳤어요. 남편인 내가 무한정 애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요. 아내의 문학적 성취와 남은 글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으로 슬픔을 이기려 합니다. 언젠가 ‘정미경 평전’을 쓸 겁니다. 격한 슬픔의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출처 http://www.hankookilbo.com/v/b591f8776210439b888dab23ee0a6b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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