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요새 배운 새 단어는 ‘가즈아’다. 암호화폐에 투자한 투자자들이 가치 상승의 비원을 담아 외치는 일종의 주문(呪文)이다. 하긴 리플의 작년 상승률이 3만6000%였고, 그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초라한’ 성적을 낸 비트코인의 상승률이 1300%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참고로 필자는 단돈 1원도 암호화폐에 투자한 바 없다).
이것은 인류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수익률이다. 아무리 가격 변동성을 감안해도 엄청나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혹자는 현재의 암호화폐 투자 열풍을 17세기 초반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에 비견하지만 투자 대상의 균질성, 참가자의 광범위함, 거래소 간 연계성 등을 감안할 때 튤립 투기와 견줄 바가 아니다. 따라서 이 현상을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묻지마식 투기’로 치부하거나, 정부가 나서서 확실하게 규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큰 착각이다. 반대로 암호화폐가 일상에서 ‘버젓한 화폐’로 등극할 것이라는 믿음도 잘 따져봐야 한다. 그렇다면 암호화폐에 대해 우리가 그래도 이성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어떤 것일까?
첫째, 그레셤의 법칙이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은 현실에서 여러 화폐 후보들이 경쟁할 때 궁극적으로 어떤 후보가 화폐로 등극할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정답은? ‘악화가 화폐가 된다’는 것이다. 구리 동전과 금 동전이 있을 때 금값이 오르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누가 아깝게 귀한 금 동전으로 물건값을 치를 것인가? 받는 곳에서는 ‘금 동전 대환영’을 대문짝만 하게 써 붙여도, 주는 사람은 언제나 구리 동전으로 지불한다. 그래서 금 동전은 유통에서 퇴장하고 오직 구리 동전만이 화폐가 된다.
그레셤의 법칙을 잘 이해한다면 암호화폐는 적어도 현재 상태로는 절대로 ‘정상적인 화폐’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현실의 불환지폐들과 비교할 때 ‘양화’들이기 때문이다. 작년 상황에서 누가 피자 사먹고 비트코인으로 지불하겠는가. 조금 있으면 가치가 오를 것 같은데. 그 귀한 암호화폐로 지급을 하는 때는 인질 몸값을 지불할 때뿐이리라.
둘째, 암호화폐는 압도적 매력을 가진 투자자산이다. 국채도, 부동산도, 삼성전자 주식도, 엔화도 암호화폐 앞에서는 경쟁 상대 자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암호화폐의 매력은 온전히 가치 상승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가치 상승의 핵심에는 넘쳐나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비탄력적이라는 점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암호화폐의 가치 상승이 계속될 것인가는 금융시장이 암호화폐의 공급 비탄력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상당 부분 달려 있다.
필자는 그 관건을 암호화폐를 수납하는 가상은행(예를 들어 비트뱅크)의 등장 여부로 보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금본위제가 19세기의 대표적인 화폐제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한된 금의 공급량에도 불구하고 금화와 태환되는 은행권을 발행하던 은행의 등장 때문이다. 은행은 신용창조를 통해 태환 은행권을 발행함으로써 금의 공급 부족이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다(물론 은행권의 남발과 뱅크런이라는 부작용이 뒤따랐다). 중요한 점은 적어도 현재의 가상공간에서 이런 가상은행의 출현을 금지하는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은행이 과연 출현할지, 또 가상공간의 투자자들이 가상은행의 은행권 남발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을지에 따라 암호화폐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암호화폐의 정책적 효과다. 현재의 가치 상승률이 유지되는 한 현존하는 통화정책은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3만6000%의 수익률 앞에서 기준금리 0.25%를 변화시키는 게 무슨 의미를 가지겠는가? 무조건 규제를 강화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조금 더 근본적인 천착이 필요하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우리는 계속 ‘가즈아’의 주문 속에 갇혀 있을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출처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05&aid=000106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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