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정해우(庖丁解牛), <장자>의 '양생주' 편에 나오는 포정이 소를 해체하는 이야기는 '여지의 철학'에 대한 훌륭한 은유이자 통찰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철학이 있고 종교가 있고 진리에 대한 담론이 있지만 왜 누구도 이를 독점하지 못하는가? '여지(餘地)'는 <장자>를 읽고 노장의 사상을 이해하고 동서양 철학을 아울러 공부하며 거칠지만 세상의 이치를 들여다보고 깨달은 내 나름의 답변이다. <장자> 전편에 걸쳐 단 한 번만 나오는 '여지'란 단어는 내게 '제물론' 편의 <조삼모사> 이야기에 나오는 '양행(兩行)'과 더불어 그 실마리였고 마중물이었다.
좀 길지만 안병주, 전호근 선생이 우리말로 풀이한 '포정해우'를 아래에 통째로 옮겨본다.
庖丁이 文惠君을 위해서 소를 잡는데, 손으로 쇠뿔을 잡고, 어깨에 소를 기대게 하고, 발로 소를 밟고, 무릎을 세워 소를 누르면, 〈칼질하는 소리가 처음에는〉 획획하고 울리며, 칼을 움직여 나가면 쐐쐐 소리가 나는데 모두 음률에 맞지 않음이 없어서 桑林의 舞樂에 부합되었으며, 經首의 박자에 꼭 맞았다. 문혜군이 말했다.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道인데, 이것은 기술에서 더 나아간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해부하던 때에는 눈에 비치는 것이 온전한 소 아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뒤에는 온전한 소는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神을 통해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의 지각 능력이 활동을 멈추고, 대신 신묘한 작용이 움직이면 자연의 결을 따라 커다란 틈새를 치며, 커다란 공간에서 칼을 움직이되 본시 그러한 바를 따를 뿐인지라, 經絡과 肯綮이 〈칼의 움직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데 하물며 큰 뼈이겠습니까?”
“솜씨 좋은 백정은 일 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살코기를 베기 때문이고, 보통의 백정은 한 달에 한번씩 칼을 바꾸는데 뼈를 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칼은 19년이 되었고, 그동안 잡은 소가 수천 마리인데도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막 새로 갈아낸 듯합니다.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 끝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가지고 틈이 있는 사이로 들어가기 때문에 넓고 넓어서 칼날을 놀리는 데 반드시 남는 공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19년이 되었는데도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막 새로 갈아낸 듯합니다. 비록 그러하지만 매양 뼈와 근육이 엉켜 모여 있는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것을 처리하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하면서 경계하여,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고, 손놀림을 더디게 합니다. 〈그 상태로〉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여서, 스스륵 하고 고기가 이미 뼈에서 해체되어 마치 흙이 땅에 떨어져 있는 듯하면, 칼을 붙잡고 우두커니 서서 사방을 돌아보며 머뭇거리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칼을 닦아서 간직합니다.”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다. 내가 포정의 말을 듣고 養生의 道를 터득했다."
- 안병주, 전호근 역 <장자>(전통문화연구회, 2001)
핵심은 여기에 있다. 포정은 어떻게 소를 해체하는가. "彼節者有閒 而刀刃者 無厚 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 必有餘地矣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 끝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가지고 틈이 있는 사이로 들어가기 때문에 넓고 넓어서 칼날을 놀리는 데 반드시 남는 공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必有餘地矣 반드시 남는 공간, 이곳이 여지(餘地)다. 그는 여지를 따라 칼을 놀리기에 거침없이 수월하고 평화롭게 뜻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애당초 經絡과 肯綮*이 없었다면 여지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여지는 여지가 아닌 것까지 여지로 끌어안고 있는 여지다.
문혜군이 그것을 왜 '養生의 道'라 말했겠는가. 우주 만물에 이렇듯 여지(餘地)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 자체가 여지고 여지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일찍이 노자가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라고 말한 뜻도 거기에 있었다. 도가 여지 자체라면 도는 도가 아니기도 한 것이다. 나(是)이면서 내가 아닌 것(非), 내가 아니면서도 나인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절대와 상대, 유와 무의 구별을 넘어서 결이면서 결 아니고 도이면서 도가 아닌 역설, 그것이 여지고 양행이며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이 평화가 이뤄지고 잘 사는 길이련만 그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포정(聖人)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길을 따라가면서도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스스로를 낮춰 처신하였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고 길 위에서도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길의 여지인 것이다.
사족이지만, 여지에 따르면 이러한 내 생각도 당연히 틀린 것일 수 있다.
* 긍경(肯綮) : 肯은 뼈에 살이 붙어 있는 부분(陸德明), 綮은 〈살과 힘줄 따위가〉 엉켜 있는 부분(司馬彪) - 위 책 각주
(2018. 1.12)
출처 https://www.facebook.com/forestwith?fref=n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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