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6월 항쟁의 발아였던 서울대학생 박종철의 죽음. 1987년 1월17일 당시 김중배 논설위원의 칼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는 시대의 죽음을 직시했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에 따르면, “완곡하지만 감성적인 표현으로 독자들의 양심을 자극”한 칼럼이었다. 박종철 사건 담당이었던 당시 서울지검 형사부 안상수 검사(현 창원시장)는 “수사 도중 이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아 진실을 꼭 밝히리라는 결의를 다지게 됐다”고 했다. 전두환 독재 정권의 보도지침으로 눈 가려진 언론이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한 시절, 김중배를 포함해 죽음을 제대로 응시하려던 동아일보 언론인들의 ‘분투’는 빛이 났다.
김중배 선생(84)은 박종철의 죽음과 6월 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을 “영화로만 볼 수 없는 영화”라고 말했다. 그의 사회부 후배들은 발로 찾은 진실을 세상에 알린 주인공들이었다. 그는 “‘노털’이지만 그때 기억이 아직 희석되지 않고 있다”며 “영화를 통해 6월 항쟁을 다시 체험한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 9일 서울 중구 ‘뉴스타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200자 원고지 몇 장에 빼곡히 자신이 하고픈 말들을 적어왔다. ‘박종철’과 ‘동아일보’, ‘죽음’과 ‘생명’, 그리고 ‘세월호’까지. 그가 꺼낸 수많은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것은 ‘언론’과 ‘권력’이었다. 먼저 ‘1987’을 관람한 소감을 물었다.
- 영화 ‘1987’ 어떻게 봤나.
“정직하게 영화로만 볼 수 없는 영화랄까. 그 당시를 목격했던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칼럼을 쓰고 있던 사람으로서, 또 6월 항쟁 집회 현장을 찾았던 사람으로서, 많은 체험을 했다. 체험의 기억이 희석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통해 다시 6월 항쟁을 체험한 기분이었다.”
- 소위 ‘꽂힌 것’이 있었나.
“죽음이다. 옛날 30년 전 글을 복고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린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에서 난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고 썼다. 이 글은 저 죽음(박종철의 죽음)을 응시해야 할 것 같아서, 그 눈을 피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썼다. 영화 ‘1987’은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을 응시하게 했다. 응시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응시할 때만이 역사의 진전을 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노털’이 너무 회고적인 것 같다.(웃음)”
- 영화에서 잘 드러나지만 경찰은 부검을 막으려고 화장을 재촉하고, 사실을 은폐했다.
“박종철의 죽음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래도 기자들, 검사, 교도관 마침내 시민들이 일어나서 죽음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 이후는 어떠한가. 죽음의 확산이 끝났다고 할 수 있나. 이를 테면, 2009년 용산 철거민 사태. 가까이는 백남기 농민의 사망 사건. 죽음은 계속됐고 그 죽음을 죽이려는 악랄한 행태는 반복됐다.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밀실에서 죽음을 맞았는데 백남기 농민은 서울 도심 대로에서 많은 사람들의 목격 속에 그렇게 됐다. 영화는 과거 완료가 아니라 현재·미래 진행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 당시 언론 이야기가 궁금하다.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어기기 힘든 시절이었다. 내가 칼럼을 쓸 때도 굉장히 난삽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어렵다보니 현학적인 표현이 많았다. 독자들은 그 ‘행간’을 읽는다고 했다. 신문 수용자들 스스로 기자가 무슨 뜻으로 문장을 쓰는지, 더 깊게 읽었던 것이다. 독자들을 우매한 존재로 간주하는 글과 말들이 많던 시절이었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다. 그 당시 신문을 가두판매하던 청소년들이 무엇이 중요한지 직접 빨간 색연필로 표시해서 팔곤 했다. 빨간 표시가 된 기사가 중요 기사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조적으로 그들을 ‘거리의 편집자’로 부르곤 했다.”
- 영화에서는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가 등장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언론인이다.(편집자주 : 윤상삼 동아일보 기자는 박종철을 죽음으로 몬 고문의 수법이 물고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분과 연이 있나?
“윤상삼 기자는 정말 성실했던 후배 기자였다. 1991년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민주화 운동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기설씨의 유서를 동료인 강기훈씨가 대필했다는 대표적 용공 조작 사건)이 있었다. 당시 ‘김기설의 자필이다, 아니다’로 말이 많았다. 공안 당국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는 강기훈의 필적이라고 결론 냈고 이로 인해 강기훈은 오랫동안 고초를 겪다가 재심(2015년 5월)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 출입이던 윤상삼 기자는 ‘검찰에서도 유서가 김기설 필적이 맞다고 했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내왔다. 나는 편집국장이었다. 1면으로 편집했다. 이 보도에 검찰총장부터 들고 일어섰는데 결국 2판(배달 판매)에는 못 나가고 1판(가두판매)에만 나갔던 걸로 기억한다. 윤상삼이 살아서 어떤 경로로 어떻게 확인한 것인지 생생하게 증언해줬다면…. 강기훈 사건 이야기가 나오면 윤상삼이 생각난다. 그는 일찍 죽었다.(1999년 작고)”
- 그 당시 동아일보는 잘 나가는 신문 아니었나.
“지면 제작은 편집국 몫이라는 분위기였다. 편집국 독립을 따로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굴러갔다. 당시 언론사 사주도 일정 부분 우호적이었다. 사회 밑바닥 정서가 독재와 권력 비리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억압과 탄압 때문에 독재나 부정에 대한 비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비정상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사주들이 긍정적이었던 까닭은 역시 그런 자유로움이 신문 판매에 영향을 미쳤다는 데 있다고 본다. 1968년 최석채는 ‘신문은 편집인 손에서 떠났다’고 했는데 그런 기류가 점차 현실이 된 것이다.”
- 자본과 사주가 유착하면서 신문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건가.
“내가 칼럼을 쓸 때만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도 있었다. 내 칼럼으로 동아일보 명예회장이 안가에 불려 다녀야 했지만, ‘칼럼 하나로 오너가 안가에 드나드는 것이 맞는 것이냐’에 대한 문제의식은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이후엔 많이 달라졌다. 자본과 권력의 유착에서 신문 사주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장기간의 권력 탄압과 통제만 사라진다면 제대로 신문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땐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하기 전이니까.”
- 자본과의 싸움이 어렵다는 것을 느낀 적 있나.
“편집국장일 때였을 거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구미 공업단지 안의 두산전자에서 1991년 3월16일과 4월22일 두 차례 걸쳐 각각 페놀 30여 톤과 1.3톤이 낙동강으로 유출된 사건)이 발생했다. 교수들과 환경 운동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민 취재반’을 결성해 보도를 했다. 이와 관련해 경영진 쪽에서 압력이 시작됐는데 권력의 압력과는 달랐다. ‘외부 압력’과 ‘내부 압력’은 달랐다. 외부 압력은 거칠고 무섭지만 ‘그냥 내가 한번 안기부 가서 두들겨 맞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독재도 수명이 다하던 때고 언론인 구속도 크게 줄었으니까.(웃음) 그러나 (자본을 통한) 내부 압력은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다.”
언론인 김중배는 1957년 한국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첫 발을 디뎠다. 1963년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긴 그는 군사독재 시절인 1982년 3월부터 ‘그게 이렇지요-김중배 세평’을 연재하며 권력의 부당함을 비판했다. 김중배는 1990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다 1년 만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사표를 던졌다. “언론은 이제 권력과의 싸움에서 보다 원천적인 제약 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이 말은 ‘김중배 선언’으로 남아있다.
- 6월 항쟁은 ‘미완’이라는 평가가 많다.
“1997년 6월 항쟁 10주년 사업을 맡은 적 있다.(김중배 선생은 6월민주항쟁 10주년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상임공동대표로 활동했다.) 그때도 10년을 ‘기념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6월 항쟁 정신이 만신창이가 됐는데 무슨 기념인가 싶었다. 사람들과 건배사할 때도 ‘6월 항쟁 완성을 위하여’라고 했었는데…. 미완을 이야기하다보면 세월호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다시 30년 전 케케묵은 글을 언급해 죄송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한 후배가 ‘선배 글이 생각난다’고 했다. 아이들의 죽음을 다시 죽이려는 박근혜 일당이 하는 짓을 보고 나서다.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단식할 때 그를 매도하고 종북·좌빨로 몰아가던 일당의 작태를 보라. 여전히 누군가는 좌파와 사회주의 타령을 하며 죽음을 매도하고 있다. 이것이 언제 끝날까. 끝날 순 있을까. 세월호 1주기 후 언론은 ‘외부 세력’을 운운했다. 죽은 아이들이 안타깝고 슬퍼서 행진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외부 세력인가. 사드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사드는 성주만의 문제인가. 적폐 청산이 진행되니 자칭 ‘엘리트 언론’들은 피로감을 말한다. 자신들이 피로하면 ‘내가 피로하다’고 써야지, 왜 일반화하고 보편화하는가. 죽음을 죽이려 했던 세력만 피로감을 느끼나보다.”
- 6월 항쟁에서 시작된 저항은 30년 뒤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사실 불안하다. ‘잘못된 국가’로의 회귀를 꿈꾸는 세력들은 재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노력할 것이고 권력을 포섭하려 할 것이다. 저널리스트들은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촛불혁명은 정말 위대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지배했던 시기에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다. 세계 주류에 역행했다. 그들의 양심을 믿고 정의를 믿어야 하지만 우리 삶이 반드시 그렇게 진행되진 않는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퇴행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펀더멘털은 여전히 신자유주의적이다. 위대했기 때문에 더 불안한 것이다. 우리 언론이 정말 사람을 위해, 사람과 세계를 위해, 아이들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우리가 촛불을 모았던 마음 만큼은 계속 안고 가야 하지 않겠나.”
-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김중배 선생을 관통하는 건 ‘언론’ 같다.
“직선제 요구를 수용한 1987년 6·29 선언 가운데 하나는 ‘자유언론의 창달’이었다. 언론을 통제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과오를 얼마나 반성했나. 당시 동아일보에 있을 때 독재 정권 시절의 잘못된 보도로 우리가 얼마나 사람들을 오독케 하고 판단을 그르치게 했느냐, 그러니까 국민을 상대로 반성하자고 했다. 그런 제안이 일언지하 묵살됐다. 정도는 다르지만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했을 때 일본 아사히신문은 전쟁 중에 자행했던 오보를 고백하고 국민들에게 사죄했다. 사장과 편집국장을 경질하고 자사 내용을 1면에 사고로 실었다. 1987을 보면서 우리 언론이 떠올랐던 이유다. 한국 언론은 과오를 반성하고 ‘사람의 눈’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고, 그렇게 해야지.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고공에 있는 노동자들도 보일 것 아닌가.”
6월 항쟁의 발아였던 서울대학생 박종철의 죽음. 1987년 1월17일 당시 김중배 논설위원의 칼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는 시대의 죽음을 직시했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에 따르면, “완곡하지만 감성적인 표현으로 독자들의 양심을 자극”한 칼럼이었다. 박종철 사건 담당이었던 당시 서울지검 형사부 안상수 검사(현 창원시장)는 “수사 도중 이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아 진실을 꼭 밝히리라는 결의를 다지게 됐다”고 했다. 전두환 독재 정권의 보도지침으로 눈 가려진 언론이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한 시절, 김중배를 포함해 죽음을 제대로 응시하려던 동아일보 언론인들의 ‘분투’는 빛이 났다.
김중배 선생(84)은 박종철의 죽음과 6월 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을 “영화로만 볼 수 없는 영화”라고 말했다. 그의 사회부 후배들은 발로 찾은 진실을 세상에 알린 주인공들이었다. 그는 “‘노털’이지만 그때 기억이 아직 희석되지 않고 있다”며 “영화를 통해 6월 항쟁을 다시 체험한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 9일 서울 중구 ‘뉴스타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200자 원고지 몇 장에 빼곡히 자신이 하고픈 말들을 적어왔다. ‘박종철’과 ‘동아일보’, ‘죽음’과 ‘생명’, 그리고 ‘세월호’까지. 그가 꺼낸 수많은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것은 ‘언론’과 ‘권력’이었다. 먼저 ‘1987’을 관람한 소감을 물었다.
▲ 언론인 김중배는 6월 항쟁의 발아였던 서울대학생 박종철의 죽음 이후 1987년 1월17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칼럼을 썼다. 그는 시대의 죽음을 직시하고자 했다. 그의 완곡하고도 감성적인 표현은 독자들의 양심을 자극했다. 지난 9일 서울 중구 뉴스타파 사무실에서 언론인 김중배를 만났다. 그의 뒤에는 또 다른 언론인 고(故) 리영희 선생의 사진이 있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정직하게 영화로만 볼 수 없는 영화랄까. 그 당시를 목격했던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칼럼을 쓰고 있던 사람으로서, 또 6월 항쟁 집회 현장을 찾았던 사람으로서, 많은 체험을 했다. 체험의 기억이 희석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통해 다시 6월 항쟁을 체험한 기분이었다.”
- 소위 ‘꽂힌 것’이 있었나.
“죽음이다. 옛날 30년 전 글을 복고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린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에서 난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고 썼다. 이 글은 저 죽음(박종철의 죽음)을 응시해야 할 것 같아서, 그 눈을 피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썼다. 영화 ‘1987’은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을 응시하게 했다. 응시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응시할 때만이 역사의 진전을 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노털’이 너무 회고적인 것 같다.(웃음)”
- 영화에서 잘 드러나지만 경찰은 부검을 막으려고 화장을 재촉하고, 사실을 은폐했다.
“박종철의 죽음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래도 기자들, 검사, 교도관 마침내 시민들이 일어나서 죽음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 이후는 어떠한가. 죽음의 확산이 끝났다고 할 수 있나. 이를 테면, 2009년 용산 철거민 사태. 가까이는 백남기 농민의 사망 사건. 죽음은 계속됐고 그 죽음을 죽이려는 악랄한 행태는 반복됐다.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밀실에서 죽음을 맞았는데 백남기 농민은 서울 도심 대로에서 많은 사람들의 목격 속에 그렇게 됐다. 영화는 과거 완료가 아니라 현재·미래 진행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 당시 언론 이야기가 궁금하다.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어기기 힘든 시절이었다. 내가 칼럼을 쓸 때도 굉장히 난삽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어렵다보니 현학적인 표현이 많았다. 독자들은 그 ‘행간’을 읽는다고 했다. 신문 수용자들 스스로 기자가 무슨 뜻으로 문장을 쓰는지, 더 깊게 읽었던 것이다. 독자들을 우매한 존재로 간주하는 글과 말들이 많던 시절이었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다. 그 당시 신문을 가두판매하던 청소년들이 무엇이 중요한지 직접 빨간 색연필로 표시해서 팔곤 했다. 빨간 표시가 된 기사가 중요 기사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조적으로 그들을 ‘거리의 편집자’로 부르곤 했다.”
▲ 영화 ‘1987’에는 윤상삼 기자가 등장한다. 그는 박종철을 죽음으로 몬 고문의 수법이 물고문이라는 사실을 밝힌 동아일보 기자다. |
“윤상삼 기자는 정말 성실했던 후배 기자였다. 1991년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민주화 운동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기설씨의 유서를 동료인 강기훈씨가 대필했다는 대표적 용공 조작 사건)이 있었다. 당시 ‘김기설의 자필이다, 아니다’로 말이 많았다. 공안 당국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는 강기훈의 필적이라고 결론 냈고 이로 인해 강기훈은 오랫동안 고초를 겪다가 재심(2015년 5월)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 출입이던 윤상삼 기자는 ‘검찰에서도 유서가 김기설 필적이 맞다고 했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내왔다. 나는 편집국장이었다. 1면으로 편집했다. 이 보도에 검찰총장부터 들고 일어섰는데 결국 2판(배달 판매)에는 못 나가고 1판(가두판매)에만 나갔던 걸로 기억한다. 윤상삼이 살아서 어떤 경로로 어떻게 확인한 것인지 생생하게 증언해줬다면…. 강기훈 사건 이야기가 나오면 윤상삼이 생각난다. 그는 일찍 죽었다.(1999년 작고)”
- 그 당시 동아일보는 잘 나가는 신문 아니었나.
“지면 제작은 편집국 몫이라는 분위기였다. 편집국 독립을 따로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굴러갔다. 당시 언론사 사주도 일정 부분 우호적이었다. 사회 밑바닥 정서가 독재와 권력 비리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억압과 탄압 때문에 독재나 부정에 대한 비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비정상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사주들이 긍정적이었던 까닭은 역시 그런 자유로움이 신문 판매에 영향을 미쳤다는 데 있다고 본다. 1968년 최석채는 ‘신문은 편집인 손에서 떠났다’고 했는데 그런 기류가 점차 현실이 된 것이다.”
- 자본과 사주가 유착하면서 신문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건가.
“내가 칼럼을 쓸 때만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도 있었다. 내 칼럼으로 동아일보 명예회장이 안가에 불려 다녀야 했지만, ‘칼럼 하나로 오너가 안가에 드나드는 것이 맞는 것이냐’에 대한 문제의식은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이후엔 많이 달라졌다. 자본과 권력의 유착에서 신문 사주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장기간의 권력 탄압과 통제만 사라진다면 제대로 신문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땐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하기 전이니까.”
▲ 김중배 선생은 지난 9일 미디어오늘 인터뷰를 위해 200자 원고지 몇 장에 빼곡히 자신이 하고픈 말들을 적어왔다.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기를”이라는 ‘김중배 칼럼’의 일부 문구가 인상적이다. 사진=김도연 기자 |
“편집국장일 때였을 거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구미 공업단지 안의 두산전자에서 1991년 3월16일과 4월22일 두 차례 걸쳐 각각 페놀 30여 톤과 1.3톤이 낙동강으로 유출된 사건)이 발생했다. 교수들과 환경 운동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민 취재반’을 결성해 보도를 했다. 이와 관련해 경영진 쪽에서 압력이 시작됐는데 권력의 압력과는 달랐다. ‘외부 압력’과 ‘내부 압력’은 달랐다. 외부 압력은 거칠고 무섭지만 ‘그냥 내가 한번 안기부 가서 두들겨 맞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독재도 수명이 다하던 때고 언론인 구속도 크게 줄었으니까.(웃음) 그러나 (자본을 통한) 내부 압력은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다.”
언론인 김중배는 1957년 한국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첫 발을 디뎠다. 1963년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긴 그는 군사독재 시절인 1982년 3월부터 ‘그게 이렇지요-김중배 세평’을 연재하며 권력의 부당함을 비판했다. 김중배는 1990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다 1년 만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사표를 던졌다. “언론은 이제 권력과의 싸움에서 보다 원천적인 제약 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이 말은 ‘김중배 선언’으로 남아있다.
- 6월 항쟁은 ‘미완’이라는 평가가 많다.
“1997년 6월 항쟁 10주년 사업을 맡은 적 있다.(김중배 선생은 6월민주항쟁 10주년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상임공동대표로 활동했다.) 그때도 10년을 ‘기념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6월 항쟁 정신이 만신창이가 됐는데 무슨 기념인가 싶었다. 사람들과 건배사할 때도 ‘6월 항쟁 완성을 위하여’라고 했었는데…. 미완을 이야기하다보면 세월호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다시 30년 전 케케묵은 글을 언급해 죄송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한 후배가 ‘선배 글이 생각난다’고 했다. 아이들의 죽음을 다시 죽이려는 박근혜 일당이 하는 짓을 보고 나서다.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단식할 때 그를 매도하고 종북·좌빨로 몰아가던 일당의 작태를 보라. 여전히 누군가는 좌파와 사회주의 타령을 하며 죽음을 매도하고 있다. 이것이 언제 끝날까. 끝날 순 있을까. 세월호 1주기 후 언론은 ‘외부 세력’을 운운했다. 죽은 아이들이 안타깝고 슬퍼서 행진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외부 세력인가. 사드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사드는 성주만의 문제인가. 적폐 청산이 진행되니 자칭 ‘엘리트 언론’들은 피로감을 말한다. 자신들이 피로하면 ‘내가 피로하다’고 써야지, 왜 일반화하고 보편화하는가. 죽음을 죽이려 했던 세력만 피로감을 느끼나보다.”
▲ 김중배 선생이 지난 9일 서울 중구 뉴스타파 사무실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사실 불안하다. ‘잘못된 국가’로의 회귀를 꿈꾸는 세력들은 재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노력할 것이고 권력을 포섭하려 할 것이다. 저널리스트들은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촛불혁명은 정말 위대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지배했던 시기에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다. 세계 주류에 역행했다. 그들의 양심을 믿고 정의를 믿어야 하지만 우리 삶이 반드시 그렇게 진행되진 않는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퇴행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펀더멘털은 여전히 신자유주의적이다. 위대했기 때문에 더 불안한 것이다. 우리 언론이 정말 사람을 위해, 사람과 세계를 위해, 아이들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우리가 촛불을 모았던 마음 만큼은 계속 안고 가야 하지 않겠나.”
-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김중배 선생을 관통하는 건 ‘언론’ 같다.
“직선제 요구를 수용한 1987년 6·29 선언 가운데 하나는 ‘자유언론의 창달’이었다. 언론을 통제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과오를 얼마나 반성했나. 당시 동아일보에 있을 때 독재 정권 시절의 잘못된 보도로 우리가 얼마나 사람들을 오독케 하고 판단을 그르치게 했느냐, 그러니까 국민을 상대로 반성하자고 했다. 그런 제안이 일언지하 묵살됐다. 정도는 다르지만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했을 때 일본 아사히신문은 전쟁 중에 자행했던 오보를 고백하고 국민들에게 사죄했다. 사장과 편집국장을 경질하고 자사 내용을 1면에 사고로 실었다. 1987을 보면서 우리 언론이 떠올랐던 이유다. 한국 언론은 과오를 반성하고 ‘사람의 눈’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고, 그렇게 해야지.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고공에 있는 노동자들도 보일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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